마르크스의 후기 사상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코뮌이 언제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마르크스는 러시아 농촌 공동체 등 주변부의 공동체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거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들 지역의 코뮌은 고립된 자치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연결된 반제국주의 전략의 일부로 작동하며, 특히 베네수엘라의 ‘엘 파날 코뮌’은 정치·경제적 저항의 핵심 거점이자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과 연대하는 상징으로 부각된다.
경제학자 에밀리아노 브란카초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 위기를 ‘레닌의 순간’으로 정의하며,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는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미국의 막대한 대외 부채가 패권 유지에 결정적 제약이 되고 있으며, 트럼프는 그 부채의 인격화된 존재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유럽의 재무장은 자율적 제국주의 구축 시도이며,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며 신제국 간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노동계급은 해체되어 저항의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나, 자본 집중의 모순은 체제 전복의 가능성도 동시에 열어둔다며, 브란카초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레닌을 기억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고대 로마는 수공 노동자를 멸시하던 극히 위계적인 사회였지만, 노동자들은 동업조합(collegia)과 파업, 보이콧을 통해 권리를 요구하고 저항했다. 특히 제화공, 제빵사, 방직공, 화폐 주조공 등은 집단행동으로 계약 조건을 개선하려 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노동운동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사라 본드는 이런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계급투쟁이 근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고대 노동자들 또한 자기 권리와 존엄을 위한 투쟁을 해왔음을 밝히고 있다.
로마 공화정의 평민회는 하층 시민들이 직접 법안을 제안하고 통과시킬 수 있었던 예외적인 대중 정치 제도로, 다섯 차례의 평민 철수 운동과 함께 법적 평등을 쟁취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며 귀족화된 평민 엘리트의 등장과 제국의 확대는 평민회의 기능을 약화시켰고, 결국 독재자 술라와 아우구스투스의 등장 이후 제도는 형식적 존재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회의 역사는 구조화된 대중 정치가 불평등과 권력 집중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오늘날 퇴행하는 복지제도와 약화된 시민 참여 구조에 대한 중요한 반성을 제공한다.
민족주의는 반드시 파시즘으로 향하지 않지만,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주의를 자신의 도구로 삼아왔다. 저자는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재해석해 민족의 유기적 일체성, 전시 동원 상태, 배타적 순혈성, 국교를 넘는 국가 숭배, 절대적 지도자 숭배로 변형시킨다고 분석한다. 이 글은 민족주의의 스펙트럼을 역사적·정치적으로 조망하며, 그 안에서 파시즘이 어떻게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지를 추적한다.
1953년 모사데그 총리 축출부터 2025년 핵시설 공습까지,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쿠데타, 인질 사건, 전쟁, 비밀 무기 거래, 핵 협상과 파기로 이어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양국은 때때로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지만, 상호 불신과 내·외부 정치가 이를 번번이 좌절시켰고, 최근 트럼프 정부 하의 핵합의 재개 협상도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파국을 맞았다. 저자는 이 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적대와 위기가 지금의 핵 충돌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며, 외교의 필요성을 다시금 환기한다.
싱가포르 작가 하이판(Hai Fan)은 말라야 공산당(MCP) 게릴라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집 ⟪맛있는 굶주림(Delicious Hunger)⟫을 통해, 밀림 속 일상과 전우애, 내면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렸다. 이야기들은 전투보다 생존의 틈새 순간들에 주목하며,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서 금기시돼온 좌익 기억을 되살리는 예술적 시도로 읽힌다. 이 책은 지워진 역사와 억눌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문학적 복원의 작업이자, 탈식민지 국가의 잊힌 좌익 투쟁을 인간적으로 조명하는 정치적 증언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백인 우월주의와 ‘좋은 유전자’ 담론을 통해 고전적 우생학 이데올로기를 은근히 되살리며 인종적 시민권 구분과 국경 안보를 결합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DEI 정책 철폐, 이민자 비방, ‘대체 이론’ 등 음모론은 불만에 빠진 백인 유권자들의 정서에 호소하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잠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더 이상 강제적 우생학이 아니라, 복지 해체·사회적 배제를 통해 “사회적 다윈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극우적 불평등 사회를 정당화한다.
극우 정당은 불확실한 미래와 사회적 불만을 느끼는 젊은 남성들의 좌절을 반페미니즘이라는 정서적 언어로 포착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 젠더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내세워 소속감과 간단한 해답을 제공하며,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와 인플루언서들이 이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 현상은 젊은 세대의 분열을 보여주며, 성평등을 공공의 가치로 재구성하고 다양하고 민주적인 남성성을 제안하는 새로운 사회적 담론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폴란드 대선에서 중도 자유주의 성향의 트샤스코프스키는 극우 민족주의자 카롤 나브로츠키에게 패배했다. 자유주의 정권은 법치와 개혁을 약속했지만 부패, 무능, 기득권화로 실망을 안겼고, 하층·중간 계급의 불만은 ‘국민 우선’을 외치는 반(反)엘리트 정치에 쏠렸다. 이번 결과는 폴란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1989년 이후 자유주의 질서 전반의 실패가 부른 중·동유럽의 구조적 균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