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윤석열, 한일 관계 전망

출처: Unsplash, Ryoji Iwata

1.

일본 총리가 바뀌었다. 이시바 시게루 신임 총리를 만든 자민당 총재 선거는 현대 대의민주주의 정치의 다양한 면을 보여줬다. 이게 앞으로 동북아 정세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치리라 보인다는 점은 한편으로 흥미롭지만 동시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당내 파벌의 정치자금 스캔들의 영향력 하에서 치러졌다. 이 여파로 아소파를 제외한 파벌이 해산하거나 해산을 공식화하면서 파벌의 영향력을 배제한 형태의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직 총리가 출마하지 않는 조건까지 더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9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초반에 대세론을 형성한 것은 고이즈미 신지로였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젊고 신선하지만 미숙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펀쿨섹좌’라는 인터넷 밈은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부패한 기득권 정치’라는 프레임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선 오히려 이게 장점이 될 수 있다. ‘젊고 신선하다’라는 걸 ‘개혁’ 이미지로 포장하고 ‘미숙하다’는 단점을 상쇄하면? 총리를 지냈고 같은 가나가와현을 기반으로 공유하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정치적 보증을 서고, 고이즈미 신지로 본인이 출마 기자회견에서 나름대로 준비된 모습을 보이면서 단점은 가려졌다. 총재 당선 이후에도 이런 이미지가 유지된다면 총선에서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고이즈미 신지로를 지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었다.

대세론을 형성할만한 또 다른 총재 후보는 이시바 시게루였다. 아베 신조와 대립하면서 ‘만년 2등’이라는 이미지를 쌓은 그는 현역 의원들 사이에선 인기가 없었지만 당원표에선 상당히 선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미 아베 신조 정권 당시에 ‘반(反)아베’를 기치로 닦아 놓은 기반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결선에 이시바 시게루와 고이즈미 신지로가 진출한다면, 스가 요시히데와 대립적 관계에 있는 당내의 다른 거물들도 고이즈미 신지로를 지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이즈미 대세론’의 요체였다. 대세를 판단한 현역 의원들은 초반에 고이즈미 지지를 표명했다.

상황은 다카이치 사나에가 간신히 추천인 20명을 모아 후보 등록을 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의원들 사이에 인기가 없는 또 한 사람의 총재 후보였다. 아베 신조의 팬 출신으로 극우적 ‘막말’이 정치적 외교적 안보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 추천인 20인을 모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시됐지만 정치자금 문제에 연루된 아베파 중심의 의원들로 추천인을 채우는 극약처방을 동원한 끝에 후보 등록에 성공했다.

토론이 거듭되면서 아베 신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극우적 표심은 다카이치 사나에로 쏠렸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해고 규제 완화, 정년 연장 등 논쟁적 주제를 ‘개혁’으로 포장하지 못하는 실력 부족에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특유의 스타일이 계속되면서 표를 잃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진행된 입헌민주당 신임 대표 선거에서 노다 요시히코가 대표로 선출되면서 고이즈미 신지로 입장에서 불리한 변수는 늘어났다. 노다 요시히코는 총리 출신의 노장으로 ‘리버럴’을 자처하면서 입헌-공산 공투를 주도했던 에다노 유키오 등과는 결을 달리하는 인사이다. 고이즈미 신지로가 총재가 될 경우 제1야당 대표와의 대결 구도에서 오히려 미숙함이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선거 중반 요미우리, 니혼TV 등의 여론조사 결과가 공개되자 선거 구도는 순식간에 3강 구도로 전환되었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당원표에서 의미있는 지지를 확보할 가능성이 유력해진 것이다. 이제 선거 구도는 ‘개혁 대 기득권’에서 ‘아베 대 반 아베’ 또는 ‘자민당이냐 아니냐’로 전환되었다. 현역 의원에게 인기 없지만 당원표를 다수 확보할 수 있는 2명의 후보와 현역 의원표는 확보하고 있으나 당원표에서 밀리는 1명의 후보가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면, 여기서부터 중요한 건 킹메이커들의 의향이다. 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물은 3인이다. 스가 요시히데, 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가 그들인데, 여기서 스가 요시히데는 이미 일찌감치 갈 길을 정한 상태였다. 기시다 후미오는 1차 투표에선 자파 소속인 하야시 요시마사를 지지하기로 했다. 아소 다로는 아소파 소속인 고노 다로가 출마했음에도 이런 저런 후보들에 발을 걸쳐놓은 상태였다.

3강 구도로 가장 복잡한 고민거리를 안게 된 것은 아소 다로였다. 아소 다로는 스가 요시히데와 대립하고 있었기에 고이즈미 신지로를 지지할 수 없었고, 이시바 시게루와도 과거의 악연 때문에 마찬가지로 지지할 수 없었다. 아소 다로 입장에서 고이즈미 신지로와 이시바 시게루가 2차 투표에 진출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다크호스가 나타난 것이다. 아소 다로는 1차 투표부터 다카이치 사나에를 지지해 결선 구도를 이시바 시게루 대 다카이치 사나에로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실제로 다카이치 사나에가 의원표를 상당히 확보해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3위로 2차 투표 진출에 실패했고, 아소 다로가 원하는 대로 이시바 시게루 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기시다 후미오의 움직임이 있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내 정책을 계승하지 않을 것’이란 취지의 의사 표명으로 기시다파를 이시바 시게루 쪽으로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지지 의원들도 이시바 시게루 지지로 몰렸기 때문에 2차 투표의 결과는 이시바 시게루가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되었다. 결국 이시바 시게루의 당선에는 기시다 후미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시바 시게루가 총재 취임 직후 낸 인사를 보면 스가 요시히데가 부총재를 맡고 하야시 요시마사가 관방장관을 유임하는 걸로 돼 있다. 내각은 방위족, 무파벌에 더해 매우 강경한 ‘반 아베’ 인사가 포함됐는데, 마이니치신문 등의 보도에 의하면 기시다 후미오는 이러한 인사에 대해 거당체제를 원했으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취지로 “12년간의 울분을 푸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고 한다. 부총재였던 아소 다로는 당 최고고문이라는 허울뿐인 명예직으로 밀려나 사진 촬영도 거부하는 신세가 되었고, 다카이치 사나에를 비롯한 아베파는 요직에 단 한 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2.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립된 이시바 정권은 국내적으로는 아베의 유산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탈피하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언론에 의해 ‘이시바 쇼크’로 불리는 주식 가격 하락 등이 벌어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베노믹스’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간 해왔던 이시바 시게루의 정책적 발언들이 자본시장에 단기적인 악영향을 주고 있는 거다.

기시다 후미오가 이런 변화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원래 기시다 후미오의 기시다파는 고치카이(宏池会)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데, 그 기원은 195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재무장 등 안보 중심이 아닌 경제적 이해 중심의 ‘로우 폴리틱스’의 중시가 이들의 지향이었기 때문에, 기시다 정권 초기에는 이들이 외교안보적으로 비둘기파적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숫자가 많은 아베파가 건재했고 주류연합에 아베 신조와 함께 공동정권을 꾸렸다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아소다로의 아소파가 끼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다 사실상 아베 신조로부터 정권을 넘겨받다시피한 기시다 후미오는 정책적 자율성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없었던 거다.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시바 시게루는 대놓고 아베 신조를 부정해 온 인사다. 게다가 아소 다로는 1940년생으로 이제 노쇠해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아소파는 아소 다로의 영향력이 축소되면 파벌 성격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아베파 역시 구심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로 치면 공천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게 될 수 있다. 그러다보니 ‘기시다 후미오가 12년 간 빼앗겼던 보수 본류의 지위를 3년에 걸쳐 되찾는 데 성공했다’는 평까지 나온다. 상황과 조건만 놓고 보자면 ‘아베 유훈 정치’로부터의 탈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대내적 정치 환경의 얘기다. 대외적으로는 어떨까? 이시바 시게루의 정책적 좌표는 2000년대 이후 자민당 주류에 대한 반대로 점철돼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분야도 있는데 국방 안보 분야가 그것이다. 이시바 시게루는 ‘안보 오타쿠’로 불릴만큼 군사 분야에 열정적이어서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견해를 피력해왔다.

다만 재무장을 관철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극우적 흐름과 분별되는 대목이 있다. 아베 신조의 해법이 과거사와 안보 문제 모두를 양보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시바 시게루의 해법은 안보를 위해 과거사를 양보하는 것이다. 즉, 재무장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양해가 필요하므로 과거사 해결에도 적극적이어야 하고 마찰이 될 만한 일은 피해야 한다는 거다.

이시바 시게루의 이런 입장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떤 전략이 가능할까? 한미일의 군사협력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라도 과거사 문제의 전향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협상 테이블을 여는 게 전통적 시각에 의거한 해법이었을 거다. 보수우파의 시각에서 보면  이 테이블에서 이시바 시게루가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에 대해 성의 있는 입장을 표명하도록 하면서 심각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을 정도의 군사 협력을 최소한도로 여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었을 거다. 이는 어디까지나 보수의 시각에서 보면 현실적 방법론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이미 일본에 사실상 조건없이 양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해법을 이미 내놓은 상태다. 이시바 정권에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추가로 요구해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소재는 이미 고갈됐다. 반면 이시바 시게루가 재무장을 달성하기 위해 원하는 한일간 군사 협력은 윤석열 정권 역시 바라는 바다. 모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시바 정권을 상대하게 되었지만, 이미 이전부터 받을 건 없고 줄 것만 있는 상태인 셈이다.

물론 이시바 시게루의 ‘동아시아판 나토 구상’ 같은 것은 미국의 양해가 없으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재무장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순조롭게 이뤄져 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외교안보적 태도가 이를 가능케 할 것이다. 그러면 동아시아 전반의 군사적 압력은 증대될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 유훈 정치를 끝장 낸 반아베파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베 신조 등이 원했던 재무장을 한국 정부의 간접적 도움으로 완성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진보의 시선으로 보면, 일본 정부에 과거사를 고리로 어떤 행동을 요구하며 내줘야 할 것을 지키는(가령 과거사 반성 없이 ~안 된다 등)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수 있는 셈이다. 이시바 정권은 단명할 가능성도 상당하지만, 이후 예상되는 일본 통치 세력의 움직임과 대일외교의 현재 상태를 불가역적으로 바꿔 놓은 윤석열 정권의 태도를 보면 비슷한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략을 재조정하고 새로운 틀로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일 간 갈등은 양국 간 역사나 민족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제국주의를 돌아보고 평화군축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평화가 목표고 나머지는 수단이다. 진보는 평화적 체제를 관철하기 위해 얼마든지 한일 양국의 각자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대중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에 지속적으로 실패해왔다. 이 구도를 직시하지 않으면 한일관계가 얼어붙었다 녹았다 하는데도 동아시아 정세는 일관되게 갈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쏠리는 구조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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