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빌딩”, “아파트”, “일일 임대 주택”… 성중촌(城中村, 중국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난 독특한 사회·경제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문자 그대로 "도시 속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도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도시 내부에 남아 있는 농촌 마을)은 수많은 노동자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와서 가장 먼저 정착하는 곳이다. 성중촌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시장 전환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산물이다. 농사만 짓던 마을 주민들은 이 흐름을 따라 건물을 세워 부를 축적하고, 도시의 더 고급스러운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 글은 광저우 지역 성중촌의 변천사를 정리하며,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자신의 종족 관계(혈연, 지연, 또는 특정한 사회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와 토지 사용권을 활용해 기존의 마을을 산업 단지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에게 임시 거주지를 제공했는지를 설명한다. 주민들은 마을 집단 주식 회사를 설립하고 소규모 사업주와 농민공(농촌 출신 노동자)들에게 지대를 징수하며 점차 도시 주민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동시에 외지인들, 특히 농민공들은 또다시 착취를 당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집행 인력을 고용해 외지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이들에게서 각종 “비용”을 갈취하기도 했다.
오늘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중촌은 점차 사라지고, 더 현대적인 주거 단지로 대체되고 있다. 하지만 저소득 노동자들에게는 성중촌이 여전히 저렴한 주택과 친근한 작은 가게, 식당을 제공하는 곳으로 남아있다. 성중촌의 역사와 실제 집주인 역할을 하는 “토지 세대(土二代, 투얼다이)”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주강삼각주(珠三角, 중국 남부 광둥성에 위치한 주강(珠江)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 지역을 가리키며, 중국 경제와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 지역 외지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옌징(眼镜)
토지 세대: 광저우 성중촌에서의 농민 임대인과 자본 축적의 기반 시설, 넬리 추(Nellie Chu), 2022
(Tu Er Dai Peasant Landlords and the Infrastructures of Accumulation in Guangzhou’s Urban Villages)
서문
광저우의 좁은 거리 위로 해질녘 어둠이 깔리자, 삼륜차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 시장 옆을 끊임없이 오갔다. 이 시장 뒤편에는 빽빽이 들어선 5층짜리 아파트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키스 빌딩(接吻楼)'이라고 불리는데,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하늘을 거의 가리지 않으며, 작은 틈 사이로만 흐린 하늘이 보일 정도다.
마오쩌둥 시기, 이곳은 인민공사의 일부였으며,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당시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 도시화가 완료된 광저우 중심지로 이주했다. 이들은 ‘토지 2세대(土二代)’라고 불린다. 농민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공유된 마을 토지 사용권을 활용해 단기간에 임대 수익 계층으로 전환했다. ‘토지 세대’라는 이름은 부유한 도시 거주자를 가리키는 ‘부유 2세(富二代, 푸얼다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토(土)’는 토지와 농촌 배경을 상징한다. 이들의 ‘호구’(戶口) 신분은 이들로 하여금 해당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부여했다.
이제 이 자리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고향인 내륙 소도시와 농촌을 떠나 광저우의 의류 산업 지역으로 이주해 생활하고 일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지역은 주강삼각주(珠三角)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약 200개의 성중촌 중 하나다. (원문에서는 200개로 표기했지만, 실제로는 1,000개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성중촌의 땅은 더 이상 농업 생산에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오 시대에 인구 통제를 위해 시행된 호구 제도에 따라, 이 땅과 그 주민들은 여전히 완전히 도시에 속하지 않는다. 성중촌은 지난 30년 동안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의 결과물이다. 국유지에 세워진 도시 단지와 달리, 성중촌의 토지 사용권과 개발 권한은 여전히 과거 이곳에 위치했던 농업 생산 대대의 손에 남아 있다. 성중촌에서는 토지의 법적 소유권보다 사용권과 이를 통해 발생한 부의 공정한 분배가 주요 관심사다.
1978년 시장 개혁 직후, 토지 세대는 자신들의 종족 관계를 신속히 복구했다. 이러한 종족 관계는 마오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오 시기에 중국 남부의 많은 농촌 집단은 성씨를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호구 제도에 따르면 토지 사용권 보유자는 여전히 농촌 주민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주택을 일자리와 저렴한 거처를 찾는 농민공에게 임대해 부유한 임대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을 주민 임대인이 운영하는 마을 집단은 일상 운영과 보안 문제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과 기타 후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대규모로 시민들의 토지 사용권이 박탈되는 사례를 기록했지만, 광저우의 이러한 옛 농업 공사 구성원들은 성공적으로 토지 사용권 판매를 막고, 법적 모호한 지위를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이들은 어떻게 시 정부의 토지 몰수를 막았을까? 이러한 모호한 신분은 어떤 부의 축적 방식을 초래했을까? 도시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광저우 의류 마을의 급격한 변화는 계급 기반의 경쟁과 갈등을 어떻게 형성했을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을 탐구하며 광저우 농민 계층의 해체 과정을 연구한다. 특히 성중촌의 토지 세대가 임대 수익 및 기타 축적 활동을 통해 논란이 많은 부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주장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E.P. 톰슨의 고전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1963)은 계급 의식이 문화, 산업화, 노동자의 능동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토지 세대의 사례는 마오 시대 농민 계급이 종족 집단화 기업을 통해 유동 인구로부터 노동력과 지대를 착취하며, 궁극적으로 농촌 인구 감소를 초래한 방식을 보여준다.
토지 세대는 농촌 주민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토지 사용권과 임대 수익을 보유하며 도시 계층으로 부분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 그리고 다양한 행정 구획 사이를 오가며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의 모호한 사회적 지위는 토지 기반 전략을 통해 논란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특히 마을 주민 임대인은 성중촌의 모호한 행정적 지위를 이용해 지대와 기타 이윤 추구 활동을 확대하고 강화했다. 성중촌 토지 매각을 둘러싼 토지 세대와 광저우 시 정부 간의 지속적인 분쟁과 협상은 농촌 토지의 도시화를 지속적으로 지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마을 집단 구성원들은 종족 기반 기업을 통해 전략적으로 토지 매각을 연기하며 시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마을 집단 구성원이 종족 집단을 기업화하여 사실상 임대 수익 단체로 변모했으며, 허가받지 않은 관리 모델을 통해 운영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농민공으로부터 수익을 극대화하면서 이주와 재개발과 관련된 문제에 대응했다.
토지 세대라는 복잡한 위치는 필자가 광저우 저비용 패션 산업에서의 국제적 하청과 수공업적 대량 생산을 연구하면서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이 글은 성중촌 내의 패스트 패션 및 유동 인구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토지 세대 임대 계층이 저비용 패션 산업의 글로벌 상품 체인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토지 기반 임대 수익 형태를 발전시켰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현장에서 수집한 초기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러한 활동이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어떻게 회피하며, 지대 수익의 형태로 농민공을 추가적으로 착취했는지를 보여준다. 토지 세대는 동시에 농촌 주민이자 도시 주민이지만, 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토지를 기반으로 한 전략을 통해 논란이 많은 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 전략은 이들이 집단 토지에서의 생계 기반과 단절하고 점차 도시 핵심부로 편입되면서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축적 전략은 농민 계층 내의 계급 분화를 심화시키며, 유동 인구를 특히 지대 착취와 통제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토지 세대: 농촌과 도시 사이에서
기존 학술 문헌은 약 2억 5천만 명의 농민공(농촌 출신 노동자) 이주와 이동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들은 "이동 인구"로 불리며,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문헌은 호구 제도가 어떻게 인구 통제를 통해 사회와 경제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깊이 있게 다루며, 이 제도가 농촌 출신 이민자들을 도시의 복지와 서비스(주택, 고용, 교육, 의료 보험 등)에서 배제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호구 제도는 여전히 농촌과 도시 간 공간적, 주관적 경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연구들은 농민공이라는 존재를 통해 도시와 농촌 간의 긴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이 긴장은 공간적 차원뿐 아니라 시간적 차원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농촌 이민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배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학술 연구의 또 다른 초점은 이주와 관련된 자본 축적의 역동성이다. 이들은 공간적 이동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넘어서거나 연결한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주민들이 가족 소비와 송금을 통해 농촌 사회 재생산에 기여한다고 서술했고, 다른 연구자들은 특히 "여성 노동자"의 노동 과정을 강조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체력이 다하기 전에 도시 공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며, 일정 기간 일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자녀를 낳고 다음 세대 농민공을 키운다. 이러한 연구의 주요 관점은 농민공의 착취 경험이 중국이 자본을 도시 중심지에 "고정"시키는 정책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농촌과 기타 도시 주변 공간은 노동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저수지로 여겨지며, 이는 도시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노동력과 자본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데 대한 연구는 농민공의 배제 정도를 다루었다. 이는 농민공들이 여전히 농촌 토지 사용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기(Arrighi, 2007)는 농민공이 완전한 탈농민화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산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엘 안드레아스(Joel Andreas)와 잔(Zhan)(2015)은 농민공이 "반(半)무산계급화"를 경험했다고 보고, 황쭝즈(Huang Zongzhi), 가오위안(Gao Yuan), 펑위셩(Peng Yusheng)(2015)는 중국의 사례를 "무산계급화 없는 자본화"로 설명했다. 이들은 농민공이 농촌 토지 사용권을 보유하고 있어 완전한 몰수로부터의 완충 역할을 하며, 도시에서 실업, 무직 상태, 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인류학자들은 농민공이 농촌과 도시 사이에 위치한 사회경제적 차이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러한 불균형은 공간적, 시간적 경계를 넘어선다.
기존 연구는 중국 인구 이동, 도시화, 그리고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자본 축적의 필요성과 이 과정에서 농촌과 도시의 이분법적 전환이 초래한 긴장과 문제를 도시 중심부를 자본 축적의 주요 거점으로, 농촌을 주변 공간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성중촌 관련 인류학 및 지리학 연구는 이러한 논쟁에 비판적 시각을 더하며, 농촌과 도시의 공간적 이분법을 넘어 이주민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한다. 이들은 공간과 장소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적 불평등, 갈등, 그리고 협력을 분석하며 농촌과 도시가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유동적임을 보여준다. 일부 학자들은 국가 주도 도시화 프로젝트와 토지 수탈에 저항하며 농촌 주민 신분을 유지하려는 집단적 노력을 서술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농촌 주민들이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미개하다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정의 요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주목했다. 또한 건축 환경과 소속감이 농촌과 도시 사이에서 불균형적으로 단절될 때 성중촌 주민들이 어떻게 내쫓기고 떠돌게 되는지도 다루었다.
이러한 문헌을 바탕으로, 나는 성중촌의 이동과 발전 과정이 토지 사용권의 상품화와 도시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광저우 성중촌 토지 세대의 사례는 자본주의적 축적이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장 확장 궤적(즉, 농촌에서 도시로의 발전)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농민 임대인의 축적 행위는 안나 츠잉(Anna Tsing)(2015)이 묘사한 "반보루리(斑駁陸離, 뒤얽힌 모습)"를 반영한다. 이는 농촌과 도시 사이의 복잡한 생활 방식으로, 개방적이고 일시적이며 불확실하다. 츠잉은 "부의 집중이 가능했던 이유는 계획되지 않은 다양한 영역에서 창출된 가치가 자본에 의해 점유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중촌은 농촌과 도시의 동태적 차이와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주민과 기반 시설이 크게 변화했음에도 호구 제도가 가져온 공간적, 주관적 분열은 여전히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사실, 성중촌과 얽혀 있는 토지 세대는 여전히 농촌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지만, 완전히 도시 주민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의 집단적 의식의 해체는 선형적이거나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무질서하며 모순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들의 모호한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도시 주민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일종의 "부유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농촌 집단 내에서의 위치가 여전히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샹비아오(項飇, 2017)는 "부유(悬浮) 상태"는 단순한 배제가 아니라 특정 위치에서 제거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고, 뿌리째 뽑히고,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은 역사적으로 거대한 무산계급 연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부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한다. 그들은 입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자가 될 수도 없다. 부유 상태란 바로 입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다.
부유 상태와 논란이 많은 부의 창출
하룻밤 사이 부유한 임대인이 된 농민 임대인의 부는 종종 도시 주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뒤떨어지고 게으르며, 편안한 생활과 부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다. 광저우에서는 이들에게 "자격을 갖춘 자본가"가 될 것을 요구하는 주류 사회의 압력이 존재하며, 이는 특히 1980년대 이후 태어난 토지 세대에게 조롱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찻집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간주되며, 매달 아무런 재정적 결정 없이 배당금을 수령하는 안락한 삶을 산다고 여겨진다. 토지 세대는 도시화된 계층에 의해 배제되면서 농촌과 도시, 그리고 유랑과 개발로 인한 부 창출 사이에 부유한 상태로 놓여 있다.
토지 사용권 매각으로 집단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부동산 개발의 기회에서 막대한 부를 얻었음에도 토지 세대는 사회적·정치적 측면에서 주변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성중촌에서 발생하는 논란이 많은 부를 임대료를 통해 얻으려 하면서 동시에 국제 대도시의 시민으로 상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가정이 사회적 자본과 중국 도시 중심부에서 경험하는 배제를 균형 잡기 위해 자녀를 해외 유학 보낸다.
중국 후사회주의(后社会主义) 전환기에서 변화하는 국가와 시장의 역학에 대응하여, 토지 세대는 일종의 약탈적 투기를 선택했다. 이들은 시장 신호에 반응하며 경제적·정치적 차원에서 행동한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집단 토지가 앞으로 산업과 부동산 개발의 중심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도시 핵심부에 편입되어 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가족은 이미 성중촌을 떠났으며,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분리되면서 종족 간 유대도 약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빠른 산업화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성중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의 투기적 대기 기간에서도 이익을 얻었다.
국가 정책이 점차 시장의 흐름과 결합되면서, 토지 세대는 성중촌에서 발생하는 부에 대해 일종의 승인되지 않은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강화된 산업화와 국제 공급망과의 접속 덕분이다. 구체적으로, 토지 세대의 축적 전략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기반 시설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략은 글로벌 패스트 패션 공급망의 시공간적 조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 가족 연계 책임제를 통해 개인 가구의 수평적 확장 (2) 종족 집단의 기업화와 그로 인한 분화 (3) 외지 노동자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임대료를 징수하는 사적 고용
이 글의 분석은 농민 계층의 해체와 함께 성중촌이 어떻게 부의 경쟁의 장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토지 세대의 축적 행위는 성중촌의 산업화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 신분 및 토지 사용권의 행정적 모호성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보유한 기반 시설과 친족 관계 자원을 결합해 최대한 오랫동안 임대료를 징수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시장 개혁 초기, 마을 주민 임대인들은 다층 건물을 지었고, 가족 연계 책임제를 통해 집단 소득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국가가 토지 사용권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후 주민들은 종족 집단을 활성화하여 이익을 수평적으로 확장했고, 종족 집단은 이 집단 소득을 관리했다.
성중촌 주민들이 글로벌 공급망에 점차 연결됨에 따라, 종족 집단은 합법적 토지 소유자로서의 기업적 지위를 활용해 이 지역의 부동산 개발을 보호하고 투자했다. 그러나 부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의심받게 되면서, 주민 임대인은 성중촌에서 비공식적인 치안 유지와 승인되지 않은 임대료 추구 행위를 통해 외지 노동자를 부당하게 착취하고 박탈했다. 결과적으로 성중촌은 산업화의 속도와 맞물린 불균형적인 축적 공간이 되었으며, 이는 부를 둘러싼 갈등의 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랑과 개발 사이의 모순이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탈중앙화, 산업화, 그리고 가족 연계 책임제
광저우의 ‘제의촌’(制衣村)은 혈연(국가가 아닌)을 중심으로 한 투기적 투자와 정부 관리 실천의 역동성을 분석하기에 독특한 장소다. 이 지역은 여전히 수익성 높은 상업 및 산업 지대로, 광저우 시 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지 않는다. 이웃한 성중촌에서는 시 정부의 강제 수용과 폭력적 철거가 도시화의 결과를 일부 암시하며 투기적 행동을 증가시켰다. 역사적으로 토지 세대는 개혁 초기 마을 집단의 후사회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 시기, 이주와 기업 활동이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의 경제체로서의 부활과 맞물렸다. 종족 집단은 토지를 기반으로 한 친족 및 의례적 정체성일 뿐만 아니라, 기업적 성격을 띠며 토지 사용권을 유지하고 수익 창출 계획을 조직했다. 개혁 이전 수십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한 부는 종족 기업의 권리 주장을 통해 개별 가정들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나, 주변 지역의 빠른 산업화는 종족 내부 가정 간의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발전의 불균형으로 인한 분열 압력을 초래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파우르(David Faure)는 화남 지역 농촌 생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종족은 회사로 적절히 묘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농촌 정체성과 생계는 이러한 회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파우르는 종족을 기업체로 묘사하면서, 종족이 국가 정책과 상업 활동의 역사적·문화적 산물이며, 16세기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음을 강조했다. 중국 제국 시대에 농촌 생계와 지방 관습(세금, 가족 경제 등)을 중앙 정부의 관료 시스템에 통합하려는 압력에 직면하여, 종족은 농촌 주민들이 지방 정체성과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시장 개혁 초기 몇 십 년 동안 종족 기업의 부활은 이러한 유연성이 장기간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파우르는 탈집단화 과정과 호구 제도의 도입이 결국 가족이 마을 집단을 대신하여 주요 경제 단위로 부상하게 했다고 서술했다. 가족은 정주권을 유지하고 각종 임대 수익 계획을 조직하며, 지방 종족 정치와 중앙 관료 시스템으로의 외부 통합 요구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에 들어와, 마을 집단의 해체와 가족 연계 책임제를 통해 공공재의 탈중앙화된 배분이 이루어지면서, 가족은 경제적·행정적 단위로 다시 떠올랐다. 1978년 시행된 시장 개혁과 주강 삼각주 일부를 경제특구로 지정한 조치는 주변 지역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시장 개혁 전, 이러한 성중촌이 속한 인민공사는 마을의 정치, 경제, 사회적 사안을 전반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시장 개혁은 공유지, 생산 수단, 정치 업무의 관리 권한을 마을 집단(마을 위원회)과 생산 대대로 분권화했다. 이러한 조직은 1950년대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처음 조직된 것이었다.
탈집단화가 진행되면서, 제의촌이 위치한 지역은 창업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 활동들은 해주교(海珠桥) 주변에서 시작되었으며, 해주교는 이 농업 마을과 주강 너머의 광저우 중심지를 연결했다. 이 지역은 1930년대 설립된 국영 공장 한 곳이 산업 및 군수용 면직물을 생산하며 성장의 거점이 되었다. 노동자들과 주민들은 이 공장의 잔여 천을 수집하며 의류 산업 초기의 중고 거래를 시작했다. 이후 중산교(中山桥) 아래 대규모 비공식 야외 시장에서 농민공 판매업자들이 실타래와 불량 직물을 팔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관과 심천에서 기차로 원자재와 직물 조각을 들여왔는데, 이 지역에서는 국영 의류 공장이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고객들을 위해 의류를 생산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러한 공장들은 완전히 민영화되어 독립 기업가들이 운영했다. 이때 구매자들 중 상당수는 의류 공장과 장식품 제작 하청 작업을 위해 원재료를 구매한 인근의 젊은 여성들과 어머니들이었다.
제의촌 서쪽에는 전 생산 대대가 운영하던 소규모 의류 공장 집단이 형성되었다. 외지 노동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지역 주민과 홍콩 제조업자 및 중개인 간의 혈연적, 우정 관계도 강화되었다. 이 같은 관계는 외국 의류와 소품 생산 공장들의 성장을 촉진했다. 1986년에는 이미 510명의 외지 노동자가 제의촌에 정착했다. 홍콩과 마카오 화교들과의 혈연적 관계를 통해 주강 삼각주 지역에 수천 개의 공장 마을이 형성되었고, 제의촌도 그중 하나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국경 간 관계와 대규모 금융 투자는 홍콩의 경제 번영을 촉진했고, 홍콩은 서양으로 의류를 수출하는 효율적인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은 동시에 광동 지역을 세계 공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하는 초기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0년 동안, 의류 공급품과 부품을 판매하는 임시 시장 노점이 우후죽순처럼 이 지역 전역에 퍼졌다. 이 시장들은 빈곤한 이주민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에, 시 정부의 묵인을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100명 이상의 의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들이 빠르게 등장하며 주강 삼각주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보여주었다. 많은 가족 기업은 널리 인정받은 "가게 앞, 공장 뒤(前店后厂)" 모델을 채택했다. 이는 비공식적인 공장 작업장을 매장 뒤쪽에 두고, 매장에서는 원단, 부자재, 완제품 의류를 판매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배치는 공장주들이 의류 공급망의 생산과 도매 단계를 독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구매자들이 제조업체로부터 직접 의류를 구매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제조업체와 고객 간의 밀접한 관계를 촉진했다.
동시에 마을 집단 조직은 정치적 경로로 변화했다. 종족 정체성과 과거의 토지 소유권을 보유한 지역 주민들은 마을 집단을 통해 대규모 철거 계획에서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채널은 매우 중요했다. 비록 마을 주민들이 토지 사용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농촌 호구는 도시 주민만이 받을 수 있는 국가 복지 혜택에서 그들을 배제시켰다.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광저우 전역의 마을 집단 구성원들은 토지 사용권을 활용해 이익을 얻는 동시에 지역 부동산 회사들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의류 수출 산업의 확장은 토지 사용권을 통해 주민들이 대규모 토지 수용과 부동산 투기에 대항할 협상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성중촌의 주민들은 토지 사용권을 임대료로 전환해 외지 노동자들에게 임대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의 상업이 번창하면서 넓은 농지가 다층 주택과 상업용 건물들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동시에 농촌 출신 외지 노동자의 수가 계속 증가하면서 저렴한 주거지를 필요로 하는 임대 계층이 점점 커졌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조주(潮州), 온주(温州), 푸젠(福建) 연안 지역에서 온 첫 번째 이주 노동자들이 제의촌 주변의 마을에 정착했다. 이들은 마을 집단 구성원들이 경쟁적으로 건설한 "악수 빌딩(握手楼)"에 세입자로 머물렀다. 결국 일부 이주민들은 이 지역에 자신들만의 의류 공장, 창고, 노점을 설립하며 의류 생산과 공급 조달의 붐을 지속시켰다. 조주, 온주, 푸젠에서 온 이주민들은 점차 의류 생산과 조달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하기 위해, 이들 기업가는 생산 체인의 특정 부분만 담당하는 공장을 설립했다. 예를 들어, 원단 자르기, 청바지에 단추 부착, 자수 장식품 제작 같은 특정 작업만 처리했다.
한편, 쓰촨(四川), 산둥(山东), 후난(湖南), 후베이(湖北)에서 온 노동자들이 이 마을들에 유입되어 공장이나 인근의 운송 산업에서 임시 노동을 수행했다. 조주, 온주, 푸젠 출신 외지인들이 점점 더 마을 전체의 주거지와 상업 공간을 차지하면서, 지역 임대인들은 이 지역을 떠나 해주구(海珠区) 외곽의 더 새롭고 비싼 주거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류 생산 및 조달 사업을 이러한 첫 번째 이주민들에게 매각하고, 대신 더 수익성 높은 부동산 및 주식 시장 투기 활동에 나섰다. 의류 생산과 거래 시장이 번창하면서, 지역 주민들은 곧 의류 공장을 운영하며 겪는 위험과 고된 노동보다 부동산 시장에 투자해 얻는 이익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족 기업화: 수평적 확장과 축적의 실험
시장 개혁과 그로 인한 예상치 못한 이익은 토지 세대의 계급 및 친족 관계를 새롭게 정의했다. 후사회주의 시대의 인구 통제, 국가 통치, 재산 소유권, 사회적 이동성은 모두 종족 조직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친족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수익을 공정히 분배하기 위해 마을 집단은 배당금 제도를 도입하여 임대료를 통해 축적된 이익을 나눴다. 배당금 제도에 따라 각 가정은 매달 수집한 임대료를 종족이 통제하는 공동 자금 풀에 넣었으며, 이 공동 이익은 마을 위원회 내에서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매년 가구별로 보유한 주식 수에 따라 이익이 재분배되면서 마을 집단은 실질적으로 주식 회사로 전환되었다.
마을 지도부와 구성원은 위원회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이는 마오 시대에 공동의 성씨나 혈통을 기반으로 한 생산 대대로부터 발전해왔다. 탈집단화 이후, 이러한 마오 시대 마을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부동산 회사로 전환되어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임을 명확히 밝혔다. 위원회는 종족 지도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들 지도자는 종종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이들은 당 정책을 실행하는 동시에 종족 기업의 일상 활동을 감독하는 중간 관료 역할을 맡았다. 최근 들어, 이러한 마을 지도자들의 직책은 ‘마을장’에서 ‘기업 경영자’로 바뀌었으며, 이는 이들의 행정적 역할이 변화했음을 나타낸다. 지도부는 5년마다 선출되며, 마을 구성원의 안전을 유지하고 화재, 범죄, 사고 등을 방지하는 책임을 맡는다. 또한 임대료와 관리비를 징수하고, 종족 구성원 간의 분쟁을 조정한다. 하지만 지도부는 종종 가장 많은 토지와 자산을 보유한 집안이 주도하며, 이러한 불균등한 구조는 부패의 온상으로 이어졌다.
중국 전역에서 유동 인구가 유입되면서 마을 주변의 상주 인구는 점점 다양해졌고, 토지 사용권을 보유한 마을 주민들은 부동산 개발에 착수했다. 자본 축적의 배당금 제도는 이 지역에서 토지 투기 활동을 촉진했다. 법적으로 토지는 국가 소유지만, 사용권은 개별 가구에 임대되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의 부 축적은 토지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건물 가치 상승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싱(Hsing, 2010)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의촌의 어두운 좁은 거리 위에 세워진 평범한 아파트 건물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귀중한 정치적·경제적 자산으로 여겨진다. 토지 사용권이 여전히 마을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상위 정부에 납부해야 할 세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결국 관료들이 더 엄격한 세법과 집행 조치를 통해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마을 집단 구성원의 부동산 투자는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토지 사용권 소유자가 이를 투자 회사에 임대하여 회사가 건물 건설과 관리를 책임졌다. (2)토지 사용권 소유자가 건물을 직접 임대하며, 이는 주거용 또는 상업용으로 구분되었다. (3) 소수의 경우, 개인이 자금을 모아 독립적으로 토지를 재개발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 한 마을 집단은 주요 도로를 따라 현대식 고층 주택을 건설해 구성원들에게 수십만 위안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 임대인들 사이에서 곧 갈등이 발생했다. 지대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은 주민들 간의 긴장을 초래했으며, 이들의 논쟁은 누가 마을 집단의 합법적인 구성원으로 간주될 것인지와 개인의 이익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의 배당금 제도는 종족 관계망에서 비롯된 계층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이 제도는 특히 행정 지도자와 일반 구성원 간의 이익 몫 불평등에 따라 운영되며, 이로 인해 수혜자들 간의 불평등한 이익 배분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이 제도는 의류 제조업에서 발생하는 자본 축적의 위험을 법적 또는 행정적 토지 권리가 없는 유동 인구에게 전가한다.
따라서 "배당금" 제도는 거의 완전히 관리 또는 행정 제도로 간주되며, 이는 외지 노동자와 소규모 사업자들로부터 징수한 임대료를 축적하고 분배하는 데 사용된다. 유동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마을 주변의 상주 인구는 더욱 다양화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토지 사용권을 보유하고 이를 통해 임대료를 징수하고 다른 부동산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대형 직물 도매 시장과 같은 고수익 상업 지역에 가까운 마을에서는 마을 위원회가 때때로 수십만 위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 위원회 구성원의 토지 사용권이 점차 시장화되면서, 농민공과 지역 주민들 간의 계급적 간극이 심화되었다. 이는 농민공들이 토지 사용권과 국가 복지 보장이 없는 반면, 지역 주민들은 종족 신분과 성중촌의 사회경제적 연결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투기와 창업 활동이 증가하면서 마을 가구 내 세대 간 갈등도 나타났다. 고령 주주들은 은퇴 후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 단기 이익을 선호하며, 배당금 제도를 폐지하거나 즉각적인 수익 배분을 요구했다. 반면 젊은 세대는 장기적인 투자 계획을 통해 아파트나 도매 시장과 같은 새로운 자산 건설에 재투자하기를 희망했다. 결국 마을 구성원들은 타협안을 마련해 일부 자금을 재투자하고, 나머지 자금을 가구별로 직접 배분하는 절충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성중촌이 경제적 중심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내부 갈등과 계층적 분열이 끊임없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약탈적이고 가혹한 임대료 징수
토지 세대 내부의 계급 분열 외에도, 이 지역의 부동산 및 산업이 번성하면서 마을 주민 임대인과 외지 노동자 사이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다. 급속한 산업화는 토지 세대의 또 다른 축적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는 마을 집단이 비공식적으로 고용한 제복을 입은 집행 요원이 현금으로 관리비와 위생비를 징수하며 임대료를 착취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집행과 요금 징수는 외지 노동자들을 감시와 갈취에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2010년 이후, 필자는 광저우의 패스트 패션 산업을 연구하며 한 조립 공장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이곳에서는 종족 집단이 고용한 관리 요원들이 하루 중 여러 시간에 걸쳐 외지 노동자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 위생비, 전기세, 물세, 기타 이른바 관리비를 징수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특히 공장에서 옷이 쌓이고 노동자들이 바쁘게 일하는 시기에는 공장주가 관리 요원들에게 갑작스럽게 돈을 요구받기 쉬웠다. 반대로, 패션 산업의 비수기인 여름이나 춘절 기간에는 요원들이 덜 찾아왔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외지 노동자가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성중촌으로 통하는 모든 주요 도로에는 보안 요원들이 순찰하며 이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저녁 퇴근 시간에는 도로가 열려 있었는데, 이는 이 시간이 광저우 외곽 공장으로 물품과 의류를 운송하는 데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마을 지도부의 임대료 추구 행위는 이 지역의 상업 활동을 통제하거나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지 사업주들의 이익을 종족 기업의 자금으로 전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성중촌의 감시와 통치 체계, 그리고 외지 노동자들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 정치적 구조는 외지 인구의 사회적·공간적 이동 경로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경찰은 이주민 공장주들에게 다양한 명목의 위생비와 관리비를 요구하곤 했다. 외지 노동자가 운영하는 작업장이 번창하거나 국제 고객의 방문이 잦은 경우, 제복을 입은 경찰이 빈번하게 방문했다. 때로는 경찰이 소규모 사업주와 거리 노점상의 호구증 및 영업 허가증을 점검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사업장을 폐쇄하거나 물품을 몰수하기도 했다. 경찰은 또한 삼륜차, 자동차, 오토바이 등이 성중촌 경계 안팎으로 드나드는 시간을 조정했다. 상업 활동이 활발한 시기에는 성중촌에 출입하려는 사람들에게 특별 허가증을 요구했다. 그러나 낮과 저녁 시간대에는 교통이 개방되어 유동 인구의 상업 활동이 재개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체계는 단순한 감시나 통제를 넘어, 외지 노동자와 소규모 사업자들의 경제 활동을 제약하고, 그들의 이익을 지역 종족 경제로 흡수하려는 구조적 전략의 일환으로 작동했다.
이주 노동자와 경찰 및 제복 입은 집행 요원 간의 갈등은 성중촌의 산업화가 어떻게 임대료 추구와 감시 같은 비공식적 그림자 경제를 조장했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중심부의 생활비가 지속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외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갈취가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종종 폭력적인 충돌이나 대규모 항의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14년 성중촌에서 외지 노동자들은 삼륜차 운전자에 대한 경찰의 처벌과 차량 몰수에 항의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몰수한 삼륜차를 원래 주인에게 다시 되팔아 이익을 얻는 방식으로 갈등을 증폭시켰다. 광저우 성중촌의 어두운 아파트에서 은밀히 생활하는 외지 농촌 이주민들의 모습은 도시 주민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범죄와 저렴한 노동으로 가득 찬 세계의 일부로 여겨졌다. 성중촌과 도시 중심부 간의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면서, 이러한 비공식 경제는 도시 주민들과 시 정부에 의해 단지 일시적으로 용인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결론
이 글에서는 마오 시대 종족 기반 공사 구성원들이 토지 사용권을 매각하면서 겪은 갈등과 협상을 통해, 광저우 성중촌에서 민간과 집단의 혼합된 재산권 소유 모델을 형성하고, 외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임대료 추구와 관리라는 비공식 경제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비록 마을 주민 임대인들이 토지와의 감정적 연결을 상실하고 농업 노동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호구 제도에 따른 농민 신분과 자신이 보유한 토지 사용권을 활용한 수익 창출 계획 사이에 끼어 있는 상태에 머물렀다. "토지 세대"라는 용어는 이 특별한 전 농민 계층이 토지 사유화 과정에서 거둔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들이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전략적이면서도 약탈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계급 역학은 성중촌의 외지 노동자들이 감시와 갈취에 취약해지게 만들었고, 이는 자본 축적의 체계 속에서 "추방"과 "약탈"이 구체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방식 중 하나를 보여준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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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