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공공운수노조는 2026년 3.8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고용·임금 등 구조적 성차별과 일터의 성희롱·괴롭힘 등 젠더기반폭력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합니다. 학교 급식실에서 병들어 쓰러지는 동료들, AI 도입 이후 더 빠르고 더 많이 일하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콜센터 노동자들, 젠더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안전은 보호받지 못하는 상담노동자들, 쉴 곳도 화장실도 없이 현장을 떠도는 돌봄노동자들, ‘단정함’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통제당하는 여성승무원들처럼, 여성노동자들은 일상 속 차별과 폭력의 현장에서 자신의 건강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은 여성노동자 건강권을 단순한 산재 예방을 넘어 저임금·감정·꾸밈노동, 젠더폭력, 휴식이 배제된 노동조건 등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전가되는 신체적·정신적 손상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해 조명하며, 총 8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안녕하세요. 아시아나항공 노동조합의 노안이입니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대주제가 ‘나는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라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 자신을 그 타이틀에 대입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의 저는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부장으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는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끔 “어쩌다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됐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가 쑥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라고 멋지게 대답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사실 훨씬 소박한 이유로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저 법정 휴가인 생리휴가를 원하는 날짜에, 휴가의 취지에 맞게 쓸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희 회사는 무급 법정 휴가인 생리휴가조차 제때 쓰지 못하는 곳이었거든요. 연차는커녕 무급 휴가마저 거절당하는 일상을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이 저를 투쟁의 길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인사가 길었네요. 그럼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드려 볼게요. 올해 초, 아시아나항공의 인천공항 터미널이 1터미널에서 2터미널로 변경되었습니다. 대한항공과의 합병에 맞춘 변화였죠. 승객분들에게는 그저 터미널 위치가 바뀌는 일이지만, 일하는 저희에게는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출근 방식입니다. 20년간 본사(강서구)로 출근하던 생활 기반을 뒤로하고 이제 인천공항으로 바로 출근해야 합니다. 저의 출근 준비 시간은 전보다 3시간이나 앞당겨졌죠.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공항 내에 탈의실도, 개인 물품 보관함(라커룸)도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은 본사 탈의실에 외투나 운동화를 보관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지만, 이제 저희에게는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해야만 하는’ 강제된 상황만 남았습니다.
출처: 권수정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항공노동조합 위원장
혹시 승무원 유니폼을 기억하실까요? 저희 유니폼은 사실 보기에만 좋은 옷입니다. 예쁠 수는 있지만 겨울에 따뜻하거나 여름에 통기성이 좋은, 옷 본연의 기능은 몹시 떨어져요. 그래서 일할 때도 불편하지만, 춥고 더운 날씨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계절이 달라진다고 해서 재질이나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지요. 영하 10도의 강추위에 출근하는데, 제 옷은 기내 환경인 24~25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춥지 않으신가요? 출근지가 변경되기 전까지 저는 한겨울 칼바람이 불면 두툼한 패딩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출근했습니다. 회사가 지급하는 구두는 많이 미끄럽고 길은 얼어 있으니, 패딩과 운동화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죠. 회사에 도착해 ‘행어룸(라커룸)’이라 부르던 공간에 옷과 신발을 정리하고 근무를 시작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천공항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하죠.
겨울날 유니폼에 경량패딩만 입고 버스를 기다리면 발등까지 아려옵니다. 정류장까지 가는 미끄러운 길 위에서 온 신경을 구두 신은 발끝에 집중하다 보면 넘어질까봐 덜컥 겁이 나요. 그래도 방법은 없습니다. 이미 비행을 위한 짐만으로도 캐리어가 가득 차 있어, 든든한 롱패딩이나 운동화를 넣을 공간 따위는 없기 때문이지요. 혹시 제가 따뜻한 동남아로 비행을 가더라도 그 무거운 외투를 비행기까지 들고 가야합니다. 저에게는 옷을 보관할 ‘라커’가 없으니까요.
이제 겨울의 끝자락이라 다행일까요? 안타깝게도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사계절이 벌써 눈에 선합니다. 장대비를 뚫고 한 손엔 캐리어,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출근할 우리 승무원들, 한여름에 자켓유니폼에 안에 니트 블라우스까지 입고 땀 흘리며 짐을 이고 지고 출근할 저의 동기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겨울에 “선배님, 경량 패딩은 뭘로 사는 게 좋아요?”라고 물을 신입 후배님의 모습 말입니다. 이제 저희가 입을 수 있는 외투는 부피가 작은 경량 패딩뿐일 테니까요.
작업복을 입는 직업군은 보통 라커가 있습니다. 의사, 간호사, 철도 노동자, 마트 직원 등이요. 유니폼을 입는 대부분의 직업군은 회사로부터 환복할 장소와 보관함(라커)을 제공받습니다. 회사가 입으라고 지시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항공 승무원들에게는 이 당연한 권리가 허락되지 않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항공사가 이런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런 물음들이 결국 저를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로 남게 합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추울 때는 따뜻한 외투를 입고, 더울 때는 땀에 절지 않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10시간 이상의 비행을 시작하고 싶을 뿐입니다.
귀한 시간 내어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제 이 바람들이 그렇게 과한 것인가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나요? 저는 비록 지금은 차가운 길 위에서 유니폼을 여미며 출근하지만, 이렇게 목소리를 내다보면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 승무원들이 적절한 공간에서 편안하게 옷을 갈아입고, 진심 어린 미소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글을 마칩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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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은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항공노동조합 노동안전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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