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서 산재 아니다? “자녀산재법 개정하라”

아버지 자녀산재 피해자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 열려

아버지 자녀산재 피해자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참세상 박도형 기자.

아버지 요인의 자녀산재를 산업재해로 인정하라는 행정소송이 제기됐다. 현행 산재보험법이 자녀산재의 범위를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로만 한정하면서, 아버지 요인의 경우 산재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 19개 단체는 26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아버지 자녀산재 피해자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이 아니라 법 개정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소송을 제기하면서도 판결보다 법 개정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면 자녀산재 아니다?

행정소송을 제기한 정씨는 2021년 12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직업적 유해물질 노출로 인한 자녀산재(태아산재)를 산업재해로 접수한 재해자다.

2004년부터 삼성 LCD 공장에서 근무했던 정 씨는 TFT 공정의 설비세척 과정에서 생식독성물질인 이소프로필알코올(IPA)에 장기간 노출되었다. 근무하던 당시(2007. 8.)에 임신했던 정씨의 자녀는 눈·심장·발달·생식기·귀 등에 복합적 장애가 나타나는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갖고 태어났다. 아버지 정 씨가 일했던 약 3년간의 업무환경이 자녀의 차지증후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와 반도체/LCD 산업보건지원보상위원회에서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정씨의 사례가 ‘어머니 요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행 산재보험법(제91조의12)이 자녀산재(태아산재)의 범위를 ‘임신 중인 근로자’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씨는 “근로복지공단 이사장도 국회의원도 아버지 자녀산재가 법에 빠져 있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산재는 맞지만 산재보험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아버지 자녀산재 피해자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참세상 박도형 기자.

산재 인정 가로막는 성차별

기자회견 참여자들은 아버지 요인 자녀산재 배제에 대해 ‘성차별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성의 몸은 생산(노동)을, 여성의 몸은 재생산을 한다는 차별적 인식은 오래도록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왔다. 이는 산재보험법과 같은 노동 관련 법률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2012년 개정 이전 산재보험법 제63조가 유족보상연금 수급자의 기본값을 ‘처(妻)’로 규정한, 노동을 남성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낸 조항이었다. 그러나 노동과 생계부양은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재생산건강 또한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의한 요인이 상당하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실제로 2024년 안전보건공단이 발표한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에 따르면, 자녀의 소화기계 선천성 기형의 경우 “A반도체 회사의 전자산업”에 종사하는 남성·여성 노동자 중 “(기형 발생 위험 분석에서)남성 근로자만이 유의한 결과를 보였다”고 보고된 바 있다.

이렇듯 생식독성피해가 아버지의 직업적 유해물질 노출로도 발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음에도, 유해물질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을 “임신 중인 근로자”에게만 한정한 산재보험법은 성차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이날 발언에 나선 고광민 변호사는 “단지 ‘임신 중 여성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요양급여를 불승인하는 것은 산재보험법의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동일하게 업무상 유해요인에 노출되었고, 그 결과 자녀에게 동일한 유형의 건강손상이 발생하였으며, 상당인과관계까지 인정된 경우라면, 보호 여부 또한 동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참여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참세상 박도형 기자.

사각지대 투성이 자녀산재법?

제주 의료원의 집단 자녀산재 사건 이후 10년에 걸친 투쟁 끝에 2021년 자녀산재법이 제정되었지만, ‘사각지대 투성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아버지 요인뿐 아니라, 과거 발생한 자녀산재에 대해서는 2022년 단 1년간의 신청 기간만을 부여했고, 2020년 이전에 태어난 자녀들은 신청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다.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근무했던 유◯◯ 씨의 자녀는 자폐성 장애 2급을 진단받았지만, 출생년도를 이유로 자녀산재가 불승인되었다. 대장암 투병으로 인해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한 유 씨는 “제 아이의 산재는 법적용 시점보다 좀 이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불승인되었다”며, “아이와 제 병을 산재로 의심한 것은 2년 전 선후배 아이들 소식을 알게 된 뒤”였고 “제 딸과 제 병이 산재인 줄 알았다면 빨리 산재신청을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조승규 노무사 또한 “2023년에 진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2022년 안에 산재를 신청할 수 있냐”며, “이것은 보호를 가장한 배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들에게는 신청 기간을 제한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잘못도 없다"며 "일반 산재 노동자와 동일한 기준으로 산재 신청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현재 이용우 의원 대표발의안 등 자녀산재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4개의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어있지만, 모두 계류 중이다. 반올림 등 19개 단체는 기자회견문에서 “기나긴 법정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 앞에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국회와 고용노동부는 이미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자녀산재 피해자들을 10년 넘게 기다리게 한 잘못을 저질렀다”며, “이번에도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자녀산재법 개정 촉구에 나선 이유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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