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가고 눈이 내려왔다. 한 손에는 국화꽃을, 다른 손에는 종이상자로 만든 피켓을 든 사람들이 서울역 안과 밖을 행진했다. 행진 맨 앞에는 거리에서 목숨을 잃어간 동료 홈리스들을 마음에 품은 이들이 서 있었다. "고단한 삶이셨습니다". 흰 천에 적힌 검은 글자들이 무겁고 깊었다. 올해 서울시의 무연고・홈리스 사망자는 485명으로 추정된다.
서울역, 역사 내 시민들과 만나는 행진 참여자들. 참세상
20일 오후 7시, 서울역 광장에서 '2024 홈리스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문화제 참여자들은 추모발언과 공연을 나누고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은 서울역 광장을 출발해 서울역 지하 통로와 1층 역사 등을 가로 지르며 진행됐다. "홈리스의 공존할 권리를 보장하라", "강제퇴거 중단하라" 등 홈리스의 존엄을 요구하는 참여자들의 목소리에 광장 안과 밖의 많은 시민들도 귀를 기울였다. 서울역과 롯데마트를 잇는 통로에서 행진을 바라보던 한 휠체어탄 시민은, 내려오는 눈을 맞으며 멈춰서 행진 참여자들에게 손인사를 보내고 응원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내려오는 눈을 맞으며 행진하는 참여자들. 참세상
문화제에서는 먼저 떠나간 홈리스 동료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추모 발언이 많은 참여자의 마음에 박혔다.
박종만 양동쪽방주민회 위원장은 김춘찬 씨를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도시락을 구해주고 약을 대신 처방해 가져다주면서 항상 모범적인 생활을 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박종만 위원장은 떠난 이에게 "부디 좋은 곳 하늘나라에서 먼저 자리 잡고 계신 강홍렬 님과 소주잔 기울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사랑한다"고 마음을 전했다.
정대철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사업이사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이었고, 자신의 친구였던 박종근 씨를 회고했다.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말은 별로 없이 묵묵하게 일하는 성격"이었던 종근 씨를 기억하는 정대철 이사는, "못다 이룬 꿈 우리가 이룰 때 까지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기를.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 종근아. 미안했고 고마워"라고 말했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올해 7월 고시원 방안에서 숨을 거둔 김인균 씨를 떠올렸다. 정성철 활동가는 "인균님의 삶에서 불안정 노동과 시장 중심의 주택 정책 그리고 장애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면서, "불평등한 세상 그 경로의 끝에 홈리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존엄받지 못한 삶과 죽음이 있다. 인균님을 기억하며 함께 하지 못한 활동을 해 나아가겠다 약속하고, 인균님이 빈곤과 차별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시길 바라겠다"고 전했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의 마미 활동가는 홈리스이자 전세사기 피해자였던 한 청소년을 추모했다. 그는 세상을 먼저 떠난 청소년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여러 후회와 슬픔을 전했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니까, 좀 감사하다. 나도 추모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그를 보내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가 내 마음에 또 떠올라줘서, 떠오른 시간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랫마을홈리스야학 합창교실의 추모공연. 참세상
떠나간 무연고・홈리스 동료들에게 헌화하는 시민들. 참세상
추모 문화제에는 한 해동안 세상을 떠나간 서울지역 무연고・홈리스 사망자 485명의 영정을 담은 커다란 걸개가 자리했다. 걸개에는 목숨을 잃은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마지막 거주지, 사망장소와 장례일이 함께 적혀 있었다. 현재 한국 정부는 무연고·홈리스 사망자에 대한 공식적인 실태조사를 진행하거나 통계를 관리하고 있지 않다. 단체들이 자체 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무연고・홈리스 사망자 규모에 집계되지 못한 죽음이 더 여럿일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역학회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홈리스와 비홈리스의 사망률 격차는 지난 2005년 1.3배에서 2020년 1.8배로 더 벌어져, 홈리스의 사망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자들은 '2024 홈리스 인권선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밤이 가장 길어 홈리스에게 더욱 혹독한 동짓날을 즈음해 거리와 쪽방, 시설 등지에 살다 별이 된 이들을 추모한다. 우리의 추모는 고단했을 당신의 삶을 기억하며, 더는 당신을 이렇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가난과 차별 속에서 살다 간 이들의 명복을 빌며 홈리스의 존엄한 삶을 위해 다음을 선언한다"면서 △홈리스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권리' △홈리스의 '머물 수 있는 권리' △ 홈리스의 '차별 없이 치료받을 권리' △ 홈리스의 '주거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홈리스 추모제는 지난 2001년부터 매년 동짓날을 즈음해, 열악한 거처에서 세상을 떠난 홈리스 당사자를 추모하고, 홈리스의 존엄한 삶을 요구해왔다. 올해에는 46개 단체가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에 참여하여 지난 2일 부터 20일 까지를 '2024 홈리스 추모행동' 기간으로 정하고 공동행동에 함께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