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주지사 선거가 끝난 지 몇 주가 지났지만, 푸에르토리코 당국은 여전히 개표를 진행 중이다. 지연과 비효율이 극심해지면서,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좌절감이 커지고 선거 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결과 하나가 있다. 푸에르토리코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독립운동 지지 후보 후안 달마우(Juan Dalmau)가 선거에서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예비 검토에 따르면, 달마우는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으며, 이는 푸에르토리코 독립당(Puerto Rican Independenc)과 시민 승리 운동(Party and Citizens’ Victory)의 역사적인 연합체인 ‘얼라이언스(Alliance)’를 대표하며 이뤄낸 결과다.
출처: 푸에르토리코 독립당(Puerto Rican Independenc) 홈페이지
선거 몇 달 전, 얼라이언스의 급부상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으며, 달마우를 집권 신진보당(New Progressive Party)의 제니퍼 곤살레스(Jenniffer González)와 접전을 벌이게 했다. 수십 년 동안 곤살레스와 그의 정당은 대기업을 지지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긴축 정책을 추진해왔다. 달마우의 압박에 직면한 곤살레스는 대기업의 막대한 후원에 의존하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비방 캠페인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2023년에 창립된 얼라이언스는 사회 프로그램, 공공 투자, 성평등, 환경 보호를 지지한다. 이 연합체의 성장하는 매력은 푸에르토리코의 양당 체제가 재편될 가능성을 시사하며, 한때 지배적이었던 대중민주당(Popular Democratic Party)을 무색하게 만들고 보수 진영을 긴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달마우의 선거 성과는 식민 체제의 심화되는 정당성 위기를 반영한다. 푸에르토리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이며, 미국의 지배는 정치적 부패, 심각한 부채 위기, 광범위한 빈곤을 더욱 악화시켜왔다. 최근 몇 년 동안 얼라이언스를 구성하는 좌파 정당과 사회운동들은 “탈식민화”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다. 이들의 결집은 126년에 걸친 식민지적 폭력과 착취에 도전하며, 억압적 현 체제와의 과거 대립에서 얻은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비상 상태
1898년 7월, 미국군은 푸에르토리코를 스페인으로부터 점령하며 카리브해 전역에서 작전을 위한 전략적 전진 기지와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침공 후 불과 2주 만에, 상선으로 도착한 “상업적 군대”라 불리는 사업가 집단이 상업적 기회를 찾기 위해 섬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투기 열풍 속에서, 미국이 스페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도 전에 토지를 매입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외국 자본가들은 푸에르토리코 경제를 변모시켜 비옥한 농지를 대규모 설탕 농장으로 통합했다. 1929년까지, 미국의 4개 기업이 설탕수수 경작지의 거의 70%를 장악했으며, 노동자들의 표를 매수하고, 지역 입법자들을 뇌물로 매수하며, 500에이커 이상의 대규모 부지 조성을 금지한 법을 공공연히 위반했다.
192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의 한 기사는 “역사상 어떤 국가도 미국이 푸에르토리코에서 보여준 식민 행정 기록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인구의 대다수는 빈곤 속에서 살아갔으며, 기업들은 농민들을 토지에서 내쫓아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일용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식민 정부를 이끌던 유니오니스트당(Unionist Party)의 루이스 무뇨즈 리베라(Luis Muñoz Rivera)는 사적으로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동료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책임은 노동자를 학대하는 지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자본은 모든 것을 원하고 노동으로부터 빼앗아 간다.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침묵 때문에 그들의 공범이다.”
식민 당국은 푸에르토리코의 부뿐만 아니라 건강도 착취하며 섬을 의료 연구를 위한 포로 실험실로 전락시켰다. 특히 악명 높은 사례로, 록펠러 재단은 영양실조를 연구하기 위해 푸에르토리코 환자들을 “실험용 ‘동물’”로 여긴 코넬리우스 로즈(Cornelius Rhoads)를 고용했다.
1932년,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그의 사적인 편지 중 하나를 공개하며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로즈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게으르고, 타락하고, 도둑질을 일삼는 인종이다. 이 섬에 필요한 것은 공중보건 사업이 아니라, 인구를 완전히 제거할 해일이나 비슷한 것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이미 “8명을 죽여 이 섬의 인구 제거 과정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공분에도, 그는 명성을 잃지 않았고, 이후 의학 연구로 <타임지>에서 호의적인 기사를 받았다.
로즈의 발언을 반영하듯, 대부분의 미국 관료들은 착취가 아니라 “인구 과잉”이 푸에르토리코 빈곤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격적인 산아제한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주민들에게 피임약을 실험하고, 결국 가임 연령 여성의 3분의 1을 불임시켰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정책이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의사들이 산모들에게 불임 수술을 강요하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미성년자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이유에서다.
강압적인 의료 실험, 광범위한 설탕 농장, 관료들의 만연한 인종차별은 푸에르토리코의 식민지적 지위를 반영한다. 미국 당국에게 이 군도는 “미국에 속하지만, 미국의 일부는 아닌” “비편입 영토”였다. 사회학자 호세 아틸레스-오소리아(José Atiles-Osoria)는 푸에르토리코가 주권이 없는 국가로, 외국 군인, 투자자, 과학자들이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영구적인 예외 상태에 놓였다고 지적한다.
민족의 범죄화
1930년대, 페드로 알비수 캄포스(Pedro Albizu Campos)와 민족주의당(Nationalist Party)의 지도 아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스페인어 교육,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미국과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했다. 탁월한 연설가였던 알비수 캄포스는 반식민 세력과의 국제적 연대를 촉진하는 한편, 1934년 설탕 산업을 마비시킨 대규모 파업을 지원했다. 그 전 해에는 실업률이 65%에 달해 미국 통치의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국은 이 운동의 매력을 두려워하며 경찰을 군사화하고, 서브머신건, 소총, 진압 장비로 무장시켰다. 1935년, 보안군은 리오 피에드라스에서 정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독립운동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연방수사국(FBI)과 지역 당국은 수십 개 도시에 걸쳐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히고 감시했으며, 알비수 캄포스를 투옥하고 수천 명의 시민에 대해 불법적인 "카르페타스(carpetas, 파일)"를 작성했다. 반대 의견을 억압하려 했던 주지사 블랜턴 윈쉽은 애매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 앞에서는 언제나 사살하라”고 말했다.
긴장은 1937년 3월 정점에 달했다. 민족주의당이 노예제 폐지를 기념하는 폰세 행진을 계획하면서였다. 행진을 무력으로 막기 위해 펠리페 블랑코 대위는 부하들에게 "정확히 쏠 수 있는" 지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으며, 주지사 윈쉽은 인근 농장에서 사태를 관찰했다.
행진이 시작되자 약 200명의 경찰이 갑작스레 자동화기로 민간인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신문 <엘 파이스>(El País)는 거리에 피가 흘러 도시가 “도살장과 같은 불쾌한 모습”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부상자들을 권총으로 사살하거나 곤봉으로 구타하며 마무리했고, 성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관중들에게 총알을 퍼부었다. 결국 19명이 사망하고 약 200명이 부상당했다.
폰세 학살은 즉각적인 냉각 효과를 불러와 민족주의당으로부터 대규모 탈당을 초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위축시켰으며, 또 다른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푸에르토리코 시민권위원회에 따르면, 그 후 10년 동안 윈쉽과 그의 후임자들은 “독립운동을 저지하거나 고립시키거나 제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무엇보다 알비수 캄포스의 투옥은 식민 정책의 잔혹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FBI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충격”을 가해 “스트레스와 긴장을 유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포로로 잡힌 독립운동 지도자는 방사선 고문을 당했으며, 그의 피부는 점점 번져가는 화상 자국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결국 이 위협 캠페인은 민족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다른 정당들이 독립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노골적인 폭력과 미묘한 압력을 통해,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허용 가능한 정치적 논의의 범위를 좁히고, 반대 의견을 낙인찍으며, 지역 엘리트들이 푸에르토리코 식민 질서의 암묵적 한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모범적인 경찰 국가
1940년대 말, 유엔과 탈식민화를 추진하던 글로벌 사우스의 압력은 미국이 식민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을 다루도록 만들었다.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루이스 무뇨스 마린 주지사는 푸에르토리코를 "자유연합주(Free Associated State, FAS)"로 선언하며, 자치의 환상을 조성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여전히 섬의 안보, 무역, 외교 정책 등 주요 영역을 통제했다.
미국은 영토의 지위를 개정함으로써 식민 질서를 현대화해 이를 유지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지역 관리를 선출할 권리, 미국 의회에 비투표 대표를 유지할 권리, 그리고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하며, 식민주의를 푸에르토리코인의 얼굴과 민주주의적 외형으로 포장했다.
무뇨스 마린(Muñoz Marín) 주지사는 미국의 선호를 받는 협력자로 떠오르며 FAS를 지지하고 정치적 반대 의견을 억압했다. 그는 FBI와 긴장감 있는 공생 관계를 형성했다. 역사가 넬슨 데니스(Nelson Denis)에 따르면, FBI는 그의 아편 중독에 대한 정보를 활용해 무뇨스 마린을 통제했으며, 반대로 그는 FBI의 공산주의 강박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를 침묵시켰다.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사적으로 이렇게 언급했다. “무뇨스 마린 주지사는 미국식 에어컨이 있는 자신만의 바나나 공화국을 원한다.”
FAS 프로젝트를 신뢰하지 않았던 민족주의당은 1950년 10월 봉기를 일으켰다. 조직자들은 극적인 대결을 통해 정치 체제의 식민지적 구조를 폭로하고, 독립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들은 최소 10개의 도시를 점령했고, 심지어 워싱턴 D.C.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암살하려 시도했다.
당국은 무차별적인 분노로 대응했다. 군대는 항공 폭격으로 하유야(Jayuya)와 우투아도(Utuado) 마을을 초토화한 후, 재판 없이 혁명가들을 처형했다. 당시 법무장관 비센테 게이헬 폴랑코는 무뇨스 마린이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모든 민족주의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고 회상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위협하며 침대에서 끌어내, 이틀 만에 약 1,000명을 투옥했다. 사용된 “전복주의자” 목록은 매우 광범위해, 무뇨스 마린의 아내와 푸에르토리코 대법원의 미래 대법관까지 포함되었는데, 이는 20년간 지속된 감시의 결과였다.
냉전 동안, 1950년 봉기를 진압했던 폭력적 정책은 지속되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미국 언론은 푸에르토리코를 “라틴 아메리카의 모델”이자 “번창하는 민주주의의 전시장”으로 묘사했다.
쿠바 혁명이 새로운 세대의 정치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 사회당, 영 로즈 조직, 마체테로스(Macheteros) 및 기타 신좌파 단체들은 독립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대안을 촉진했다. 이에 대해 미국 당국은 다시 강경하게 대응했다. 구직자들을 전수 조사하고, 반대파의 우편물을 열어보며, 감시 작전, 비방 캠페인, 심지어 암살 부대를 동원해 비판 세력을 겨냥했다. 1978년 7월, 경찰은 세로 마라비야(Cerro Maravilla)로 학생 활동가들을 유인해 그들을 냉혈하게 살해하는 악명 높은 사건을 일으켰다.
무뇨스 마린과 자유연합주가 제정한 도덕적 타협, 정치적 조작, 구조적 폭력은 부식성 유산을 남겼다. 냉전이 끝난 후, 대법관 안토니오 네그론 가르시아는 법 집행 관행이 “파시스트 공포정치나 군사 독재와 유사하다”고 인정했다. 경찰은 16,793개의 문서와 151,541개의 참고 카드를 작성해 정보부의 사무실을 초과 점유했으며, 이를 자신의 집에 보관할 정도였다. 푸에르토리코는 지정학적 연옥에 머물렀다. 20세기의 대서사시였던 탈식민화를 놓쳤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로 남았다.
섬의 군벌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의 식민주의는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에게 폭력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남아 있다. 2022년 <미국의학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한 기사에서는 “식민주의가 푸에르토리코인들을 문자 그대로 죽이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는 영토의 재정 재구조화가 의료 시스템과 공공 서비스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부채 위기, 수십 년간의 긴축 정책, 그리고 강하게 군사화된 법 집행 시스템은 일상생활에 억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비에케스(Vieques) 섬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 미 해군은 이 섬을 군사 훈련용으로 점령하며, 전체 지역사회를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군대는 섬의 75%를 점유하며 해변에 폭발물을 심었다. 미국이 비에케스를 “방어”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그 섬에 전쟁을 벌이며 언덕을 폭격으로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후 정부 조사관들은 군사 훈련이 섬을 “사막으로 만들고,” “산을 변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결론지었다.
군대가 지역 경제를 “질식시키는” 것 이상의 피해를 주었다고 조사관들은 강조했다. 군대는 “폭력의 문화를 조장”했으며, 강간이 만연했다. 루시아 멜렌데즈 사네스(Lucía Meléndez Sanes)는 저녁이면 군인들이 “여자를 찾으러” 이웃으로 들어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 시간에 밖에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동물처럼 행동했다.” 부모들은 딸을 숨기며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비에케스 주민인 카르멘 발렌시아(Carmen Valencia)는 “우리는 그들 때문에 테러가 무엇인지 알았다. 우리는 항상 공포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1999년, 전투기 조종사들이 지역 경비원 데이비드 사네스 로드리게스(David Sanes Rodríguez)를 실수로 폭격하면서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이 촉발되었다. 4년 동안 당국은 시민 불복종으로 인해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체포했으며, 주민들은 사격장과 해변에서 야영하며 항의했다. 정부 조사위원회는 군대가 열화 우라늄 포탄을 사용하고, 폭발물로 물을 오염시키며, 지역 수도 이사벨 세군다(Isabel Segunda)를 거의 폭격할 뻔한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해군 훈련이 지속적으로 지진파를 발생시켜 “교육 시설을 흔들고 교육 과정을 방해”했다고 보고되었다.
운동의 압박으로 인해 2003년 기지는 폐쇄되었지만, 비에케스는 여전히 전쟁터로 남아 있다.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땅에 대한 접근을 되찾기 위해 싸우며, 군대가 수십 년간 남겨둔 잔해와 미폭발 탄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국방부는 41,000개 이상의 포탄과 32,000개의 폭탄을 수거했으며, 이 대규모 정화 작업은 2032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추산된다.
출처: 푸에르토리코 독립당(Puerto Rican Independenc) 홈페이지
식민주의로 인한 죽음
미국의 비에케스 정책은 푸에르토리코 전역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폭력의 전형을 보여준다. 연방 당국, 외국 자본, 부패한 지역 엘리트가 경제와 공공 부문을 파괴하는 처벌적 긴축 조치를 강요하면서, 폭탄의 폭발력조차 불필요해진 것이다.
수십 년간 푸에르토리코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 문제로 고통받아 왔으며, 당국은 이에 대응해 의료와 교육 예산을 삭감하고 전력망의 통제권을 민영화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식민지적 지위는 이 위기를 극도로 복잡하게 만든다. 이 영토는 파산을 선언하거나 금융 의무를 재협상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2016년, 대법원은 푸에르토리코 대 산체스 발레(Puerto Rico v. Sanchez Valle) 사건에서 의회가 이 군도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재확인했다. 같은 해, 연방 정부는 외국 금융인들로 구성된 감독위원회를 임명해 푸에르토리코의 예산을 관리하게 하면서 푸에르토리코의 “자치”라는 환상을 무례하게 깨버렸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단 2년 만에 당국은 438개의 학교를 폐쇄했으며, 의료 서비스 삭감은 심혈관 질환, 정신 질환 및 기타 질병의 발병률을 급증시켰다. 2010년에서 2020년 사이, 푸에르토리코는 인구의 10% 이상을 잃었다. 경제 혼란이 주민들을 이주하도록 강요했으며,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가 군도를 황폐화한 이후 이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반긴축 시위에 대해 법 집행 기관들은 반복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며,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던 전술을 재활용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푸에르토리코 경찰국이 “폭력의 문화에 휩싸여 있으며, 수년간 통제 불능 상태였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법무부는 “헌법 위반”이 “만연해 있고 모든 수준에 퍼져 있다”고 인정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2024년 주지사 선거는 식민지 질서와 그 만연한 폭력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선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승리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후보는 제니퍼 곤살레스였다. 그는 긴축 정책과 시위대에 대한 경찰 폭력을 오랫동안 옹호했으며, 학생 시위자들이 “폭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트럼프 캠페인의 한 코미디언이 푸에르토리코를 “떠다니는 쓰레기 섬”이라고 발언하면서 곤살레스는 곤혹을 치렀다. 곤살레스는 공화당 지도자인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해왔다.
반면, 푸에르토리코 독립당의 후안 달마우는 폰세 학살 이후 미국 당국의 박해를 받아온 운동을 대표한다. 변호사인 달마우는 악명 높은 경찰 “카르페타스(carpetas, 비밀 파일)”를 조사하며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비에케스 군사 점령에 항의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그의 선거 캠페인 마지막 집회에서는 여러 예술가들이 참여해 알비수 캄포스와 민족주의당에 경의를 표했다.
달마우의 선거 영향력은 관측통들을 놀라게 했고, 독립 지지 주지사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비록 그는 패배했지만, 이번 선거는 지속되고 있는 저항의 역사에서 단지 한 장에 불과하다. 얼라이언스와 지역 사회 활동가들은 전력망의 민간 부실 관리, 외국 투자자, 정치적 폭력에 맞서 계속 싸우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권부 설립을 요구하고 있다.
식민지 질서는 쇠락했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 연옥에 갇힌 푸에르토리코는 미국 “안에 있지만” 미국의 일부는 아니다.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은 그들을 배제하는 제국의 폭력에 맞서 창의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출처] Resurgent Puerto Rico Independence Movement Challenges 126 Years of Colonialism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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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응(Jonathan Ng)은 다트머스 대학교 존 슬론 디키 국제이해센터(John Sloan Dickey Center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