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융 패권이 왜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와 1980년대에 디플레이션 편향을 보였는가? 정책 입안자들이 경제를 항상 고성장 상태로 운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경제학과 현대 경제 정부의 실천이 우리에게 정책 도구를 제공한다면, 왜 항상 높은 고용, 높은 투자, 높은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가?
하나의 답은 이 질문이 순진한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는 복잡하고 격렬한 충격과 변동에 노출된다. 정책은 어렵다. 경제가 항상 완전 고용의 고성장 체제를 유지하지 않는 이유는,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 기술과 운이 필요하다.
이 헤게모니 노트 시리즈가 시작되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답변의 일부다. 연준은 경험이 부족했다. 1920년은 연준이 처음으로 금리를 인상한 해였다. 아무도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지 못했다.
다른 답변은 "정책 실패"라는 해석 자체가 순진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경제가 항상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비록 높은 성장과 완전 고용이 사회적 관점에서 최적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사회 내 강력한 집단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진함은 사회적 이익에 내재된 조화가 있으며, 그것을 현명한 정책으로 발견하고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있다. 그러나 경제 정책의 중요한 매개변수에 관해서는, 적대감이 불가피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책 실패"는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의 특징이다.
이 해석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1930년대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츠키(Michał Kalecki)가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자본-노동관계에 초점을 맞춰, 진보적 케인스주의 정책이 우발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는 경기 침체 시기에 가장 보수적인 기업 이익조차 수요를 자극하고 이윤을 회복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조치를 매력적으로 여기는 계급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1930년대 미국, 독일, 영국에서 결국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완전 고용이 돌아오면, 경제를 과열시키는 것이 매력을 잃는다. 강한 수요와 타이트한 노동시장은 노동자에게 힘의 균형을 기울게 한다. 이는 임금 협상과 공장 현장에서 모두 느껴졌다. 칼레츠키는 이 시점에서 균형이 기울어지면, "좋은" 케인스 정책이 채택되었던 "개방적인" 시대가 끝나고, 자본의 대변인들이 "신뢰 회복"을 명분으로 긴축을 요구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만약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본 파업"이 투자 취소와 총수요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 계급 이익은 "냉각"과 경기 침체를 촉진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1945년 현대 경제 정책 시대가 시작된 이후, 이러한 논리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
하지만 19세기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보다 직접적인 계급 권력 논리가 작용했다. 긴축과 디플레이션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용주 외에 누가 있을까? 만약 우리가 노동 시장에서 금융 시장으로 초점을 옮긴다면, 그 답은 분명하다. 즉, 정부나 기업이 진 빚의 채권자들인 고정금리 채권 보유자들이다. 이들은 인플레이션 방지에 명확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 호황과 함께 물가가 상승하면 이 자산의 실질 가치는 감소한다. 반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채권을 비롯한 모든 화폐 자산의 가치가 상승한다. 현대 경제사에서, 큰 불황이 발생한 시기의 이면에는 채권 보유자들이 실질 수익을 크게 거둔 시기가 있다.
이 논리는 추상적으로는 명백하다. 그러나 그 규모는 자주 간과된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경제학자 팀이 UBS 투자 수익 연감에서 발표한 장기 금융 수익 데이터를 보면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엘로이 딤슨(Elroy Dimson), 폴 마시(Paul Marsh), 마이크 스턴튼(Mike Staunton)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후와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 시기가 채권 보유자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확인해준다. 하지만, 그 반대편을 보라!
채권 보유자들에게 가장 좋은 시기는 최근 수십 년 동안이었다. 오른쪽을 보면 1979년 볼커(Volcker)의 금리 충격 이후 "대안정기(Great Moderation)" 시대에 채권 보유자들이 거둔 엄청난 수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 미국 패권 시대의 기원인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살펴보면, 1920년대와 1930년대 디플레이션 속에서 채권 보유자들이 무엇을 걸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의 시기를 보라. 이 시기는 경제 정책의 재앙으로 기억될 만한 시기였으며, 대량 실업과 파산, 국가 위기가 지속되었던 시기다. 하지만 채권 보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시기였다. 만약 적절한 종류의 채권을 샀다면-이것은 중요한 조건이다-전 세계 자본주의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는 동안에도 연평균 14.6%의 실질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의 주요 금융 중심지에서 통화 및 재정 정책에 그렇게 강력한 디플레이션 편향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것이 핵심이다. 채권 보유자들의 이익이 우세했다.
만약 채권 보유자들이 소수의 집단이고 그들의 투자가 단지 사적인 문제였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부유한 국가들에서 투자 대중이 보유한 부채의 양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전시 자금에 가장 많이 기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계층이었지만, 전쟁 채권은 또한 전례 없이 광범위한 저축자들에게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채권을 구매하는 것은 단순한 사적 문제가 아니었다. 채권 판매 운동은 애국적 전쟁 노력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전후 시대에 채권 보유자들은 모든 면에서 중요한 지지층이었다.
미국 GDP 대비 미국 국채의 민간 보유 비율을 살펴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Source: Hall 2019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패전국에서는 채권 보유자들이 전면적인 손실에 직면했다. 반면, 승전국의 채권 보유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 열려 있는 질문이었다.
1914년 이후 미국에서도 물가가 두 배로 올랐고, 이로 인해 전쟁 채권의 실질 가치가 크게 감소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질문은, 전후 물가 수준이 사실상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였다. 만약 그렇다면 채권 보유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신 당국이 디플레이션을 강행한다면, 적어도 채권의 실질 가치의 일부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금융 정책의 중요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런던에서도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1918년 이후 미국이 기준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런던의 최우선 과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 파운드화로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미국 정부에 달러로 돈을 빌려준 사람들보다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당국이 내린 답변은 2019년 Hall의 그래프에 깔끔하게 나타나 있다.
1917년 1월에 미국 재무부 채권 포트폴리오에 100달러를 투자한 금액의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
이 글에서 계속 언급된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이 바로 이것이다.
위 그래프는 1917년에 미국 재무부 채권 포트폴리오에 투자된 100달러의 가치를 보여준다. 이때 이자는 포트폴리오에 재투자되었다. 파란색 선은 명목 가치를, 빨간색 선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가치를 나타낸다. 두 선 사이의 차이는 1917년부터 1920년까지의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채권 포트폴리오의 실질 가치가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말까지, 비록 그들이 전후 최강의 금융 대국인 미국에 돈을 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채권에 투자한 사람들은 30%의 손실을 보았다.
디플레이션이 이를 뒤집었다. 1920년 이후 정책의 디플레이션 전환으로 채권 보유자들이 얻게 된 수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준과 재무부가 1920년대 미국 경제를 침체로 몰아가면서 포트폴리오의 실질 가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1923년까지, 이자를 제외하고, 실질 가치는 1917년 수준으로 돌아왔다. 이후 1920년대의 완만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두 선 사이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의 실질 가치가 극적으로 회복된 시기는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였다. 미국이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빠지고 물가가 급락하면서, 전쟁 채권의 실질 가치는 강하게 회복되었다. 1934년까지, 1920-1922년과 1929-1933년의 디플레이션 덕분에 실질 가치와 명목 가치 사이의 격차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시리즈의 이전 글에서 주장했듯이, 미국 당국이 1920년 전후 물가 수준을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디플레이션을 강행한 결정은 세계 경제에 큰 압력을 가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많은 국가들은 전시 채권 보유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히며, 크게 평가절하된 상태에서 안정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프랑화는 결국 전쟁 전 가치의 5분의 1로 금본위제로 돌아갔다. 반면, 영국 당국은 이를 지키기 위해 결연히 나섰다. 케인스가 안정화를 선택하라는 지속적인 권고를 무시하고, 영국은 달러와의 평형 및 달러 투자와의 패리티를 목표로 미국의 정책을 따랐다.
1920년까지, 영국과 미국 간의 격차는 컸다. 미국의 물가가 전쟁 중에 단지 두 배로 상승한 반면, 영국에서는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전쟁 전 영국 채권에 투자한 실질 수익률은 미국 채권에 비해 처참할 정도로 나빴다. 물론 1920년 당시 미국 투자자들도 손실을 보고 있었지만, 영국 투자자들은 훨씬 더 심각했다. 미국이 디플레이션을 시작하자, 영국의 정책 방향은 명확해졌다. 그 격차를 좁혀라!
Source: Elison 2019
지난 글에서 봤듯이, 1920년 이후 영국의 디플레이션은 미국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 결과, 1925년까지 영국은 전쟁 전 미국과의 금본위제 평형 상태로 복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경제에 미친 고통은 엄청났다. 석탄 산업과 같은 수출 부문에 가해진 압력은 1926년 총파업을 촉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 채권에 투자한 사람들, 즉 영국 국가 재정의 기둥이자 대영제국의 지지 기반인 이들은 그들의 실질 수익률이 급속히 미국 채권 투자자들의 수익률과 수렴하는 것을 경험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가 끝날 무렵, 런던은 같은 기간 동안 영국 정부 채권에 투자한 투자자가 미국 채권 투자자와 비교해 전혀 불리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달러 시스템'으로 알고 있는 것의 중심축은 미국 재무부 시장이다. 미국 재무부 시장은 지난 세기 동안 극적으로 변화해왔다. 그러나 이 시장을 향한 1920년대의 통화 및 금융 정책에서 달러 지배의 전면적인 힘이 처음으로 발휘되었으며, 이는 세계 경제 전체에 디플레이션 경로를 강요하는 기준을 세웠다.
[출처] Chartbook 311 Bondholder & the deflation interest (Hegemony Notes 6) (substack.com)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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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