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의 오작동, 1919-1923 미국

헤게모니 노트 04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어두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패권주의의 실패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은가1차 세계대전 직후 워싱턴 DC의 정치를 살펴보라당시 채택된 국내 및 국제 정책들은 비생산적이었으며이는 미국 내부 위기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1918~1919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전후 질서를 조율할 인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순간 분명해진 것은 교향곡의 지휘자와 달리 미국 대통령은 오케스트라를 지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그는 당면한 혼란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1918년 11월 의회 중간 선거에서오늘날 우리가 '양극화'라고 부르는 상황 속에서 윌슨은 의회에서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

미국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물가는 치솟고 있었다. 1919~1920년에는 4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1919년 '붉은 여름'에는 워싱턴 DC와 시카고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 심각한 인종 폭동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1919년 11월 19윌슨 백악관과 상원 공화당 간의 관계가 결렬된 후 몇 달간의 협상 끝에미국 상원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도한 국제연맹 강화 조약을 포함한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베르사유에서 이뤄진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협상의 핵심적인 측면이 사라졌다.

한편 미국은 전후 인플레이션과 공포에 휩싸인 레드 스케어(Red Scare,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관련된 급진적 정치 이념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따른 사회적정치적 탄압)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당시 출범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증가하는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급격한 금리 인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6월까지 연준이 은행에 부과하는 할인율은 4.75%에서 1920년 6월 7%로 인상되었다.

동시에 1919~1920년 겨울 동안 미국의 재정 정책은 큰 변화를 겪었다. 1919년 여름까지만 해도 전쟁의 여파로 재정 지출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부터 지출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20년 여름이 되자 연방정부의 수입이 지출을 초과했다연방 정부는 극적인 재정적 충격을 받았다.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조합은 대공황 때보다 더 가파르고 급격해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촉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 생산이 급감했다.

1920~1921년의 전후 불황은 역사상 가장 과소 평가된 거시경제 사건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이는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의식적인 패권 정책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더라도 미국은 경제 정책을 통해 사실상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전 세계적으로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금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각국의 통화 여건이 긴축되었다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에서도 1920년에 인플레이션이 갑자기 둔화되었다이 시리즈의 다음 편에서 이 충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GDP와 성장률 측면에서 볼 때 반등이 빨랐기 때문에 1920~1921년 위기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시장 지향적인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이 장기적인 경제적 고통을 초래하지 않고 경제 및 사회 질서를 회복한 성공적 사례로 치켜세우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그러나 충격은 심각했고 회복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회복의 조건은 미국과 전 세계 모두 보수적인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스탠리 르버고트(Stanley Lebergott)가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실업률이 급증했다몇 달 사이에 330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것은 지속적인 결과를 초래한 주기적 충격이었다클라라 마테이(Clara Mattei)가 이탈리아와 영국 경제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다룬 저서 자본 질서’(Capital Order)에서 설명했듯이 긴축과 디플레이션은 계급 전쟁의 정치였다실업률이 급증하고 경제가 침체하면서 전후의 파업 물결은 깨졌다데이비드 몽고메리(David Montgomery)가 그의 고전 노동계의 몰락에서 주장했듯이미국의 조직 노동은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다.

동시에 디플레이션이 국내를 강타하고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가 소득은 대공황 때보다 더 급격하게 추락했다.

이것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처럼 우파의 위기를 촉발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파시스트 운동의 이상적인 번식지가 아니었는가정답은 '그렇다'이다미국에서는 인종주의 비밀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출처 : "증오와 이익", 프라이어와 레빗, QJE 2012

1920년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한 후 의회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경제와 농업의 불황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는 동기를 제공했다. 1921년 5월 의회는 언더우드 관세 인하를 취소하는 긴급 관세법을 통과시켰고윌슨 행정부는 1930년대의 더 악명 높은 스무트-할리 법안(Smoot-Hawley legislation)을 준비했다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세계 경제의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했다.

또한 1921년 5월에도 '비상사태'라는 이름으로 의회는 비상 쿼터법을 통과시켜 처음으로 서반구 밖에서 들어오는 이민을 대폭 억제했다각 국가의 연간 상한선은 1910년 인구조사 기준 미국 내 이민자 인구 규모의 3%를 기준으로 정해졌다연간 총 358,000명으로 제한되었다이를 계기로 1924년 이민법(존슨-리드 법)이 제정되어 1890년 인구조사 기준 미국 내 각 국적의 전체 인구의 2%에게 이민 비자를 부여하고 나머지 국가의 연간 이민 쿼터를 1914년 이전 연평균보다 80% 감소한 165,000명으로 제한했다미국의 조치는 다른 대량 이민 국가에서도 비슷한 제한 정책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발표를 통해 미국은 1914년 이전의 비교적 자유로운 글로벌 이민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사회 질서는 안정화되었다하지만 '송출국'은 이제 자국 내 '잉여 인구'를 흡수해야 했다.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러시아가 내전과 혁명을 겪고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미국은

국제연맹에 불참했다.

이민의 문을 닫고

세계 채권국이라는 새로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수입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전히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마지막 주요 국가로서 재정 및 통화 정책을 통해 극심한 디플레이션 충격을 안겨주었다.

1916년 이후 미국 이외에 글로벌 중심국의 지위를 강제로 차지한 국가는 없었다이러한 패권주의에 대한 전례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조합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고 미국 안팎의 동시대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1919년 7월 상원에서 윌슨이 특유의 감상적인 태도로 말했듯이이 정책은 "세계의 심장을 찢어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은 험난했다. 1922년 봄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Lloyd George)가 제노바(Genoa)에서 유럽을 위한 진정한 평화 회의를 조직하기 위해 두 번째 노력을 기울였을 때 미국은 또다시 불참했다결과는 극적이었다영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 문제의 규모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었지만이미 그 당시에도 분명했던 것처럼 혼자서 패권을 잡을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제노바에서 소련과 독일 대표단은 악명 높은 라팔로 조약(Rapallo Treaty)에 서명하기 위해 이탈하여 프랑스와 대립했고, 1923년 루르(Ruhr) 점령과 초인플레이션으로 유럽 위기가 최종적으로 고조되는 길을 열었다.

미국은 자신들만의 조건에 따라 개입할 것이다중요한 재정 및 전쟁 부채 문제에 관한 한그 조건들은 가혹했다.

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의존 관계즉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새로운 패권 문제를 정의한 의존 관계는 연합국 간 전쟁 부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이 부채는 민주주의 정권들 사이에서 정부 대 정부 간에 빚진 것이었다독일이 주도하는 중앙 강대국을 물리친다는 공동의 프로젝트에서 생겨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의무였다납세자 국가가 다른 국가에 빚을 진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그리고 상원의 베르사유 조약 비준 거부 이후에도 미국이 전후 유럽의 안정화를 건설적으로 이끌 수 있는 핵심 수단이 바로 이러한 부채였다는 것은 분명했다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윌슨의 전후 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고립주의자'는 아니었다그들은 달러 외교와 군축을 통해 국제 질서를 유지한다는 나름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월스트리트와 미국 재계의 가까운 동맹국들은 전쟁 부채가 유럽 경제에 미치는 부담금융 및 통화 안정화를 위태롭게 하고 독일과의 배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악화시키는 방식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딩 대통령의 재무장관 앤드류 멜론(Andrew Mellon)은 1921년 6월 의회에 이자율과 만기일 설정이자 지급 연기채무 스왑에 대한 권한을 요청했다유럽과 미국의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멜론도 일종의 포괄적인 채무 조정안을 구상했다그러나 의회의 반응은 결정적이고 극적이었다먼저 의회는 재무부 장관에게 미국 납세자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할 수 있도록 전쟁 부채 위원회를 통해 의회의 감독을 받도록 요구했다그 후 1921년 10월 하원은 프랑스가 미국에 진 채무를 독일이 프랑스에 진 배상금 채무와 교환하는 것과 같은 채무 교환 계획을 금지하고 채무 탕감도 금지하기로 의결했고, 1922년 초 상원은 모든 대출금은 4.25% 이상의 이자율로 25년 이내에 상환하도록 규정했다이 버전이 법이 되었다. (레플러 "공화당 전쟁 부채 정책의 기원, 1921-1923: 개방적 해석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사례 연구", 미국 역사 저널 1972).

테네시주의 민주당 상원의원 케네스 맥켈러(Kenneth McKellar)는 자신의 강경 노선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극명한 용어로 표현했다. "우리는 미국 국민에게 미국 역사상 한 번도 과세된 적이 없는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오늘날 세금의 부담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크다이 대출에 대한 이자만 징수한다면 국민에 대한 세금을 7분의 1로 줄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포인트였다미국의 비대해진 연방 정부가 전쟁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1922년 당시 해외 차관의 액면가는 미국 민간 보유 연방 부채의 절반 이상(52%)을 차지했고 미국 GDP의 16%라는 놀라운 비율을 차지했다따라서 미국의 전시 '동맹국'에 대한 상당한 양보는 미국 납세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상당한 수준으로 반등할 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와 정치가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다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글로벌 지향적인 엘리트들은 '경제'를 위해 부채 감축 정책을 선호할 수 있었지만미국 대중은 대부분 원치 않았던 전쟁의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양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국제적 헌신이라는 개념이나 거시경제의 상위 논리가 아직 사회화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미국 연방정부가 일상 생활에 실질적으로 개입한다는 개념 자체가 아직 낯설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안정시키고 관리하기 위한 '경제'와 '큰 정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패권적 전략의 표현이 모든 요소들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출처Chartbook 304 Hegemonic malfunction USA 1919-1923 (Hegemony note #4)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