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llies in celebration of the Iran-Israel ceasefire ‘victory’ have been held in Iran’s capital, Tehran, as well as in neighbouring Iraq. pic.twitter.com/NmEnynobqL
— Al Jazeera English (@AJEnglish) June 25, 2025
이란인들은 테헤란 도심에서 휴전을 기념했지만, 많은 이들이 이번 사태의 격화를 자국 지도자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2025년 6월에 벌어진 12일간의 이란과 이스라엘 간 충돌은 전면적인 지역 전쟁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란의 국내 정치 지형에서 잠재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형성했다.
이슬람 공화국은 과거에도 외국의 적과 직접 충돌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군사적으로 약화하고 내부적으로 분열했으며 자국민과 점점 더 멀어진 상태에서 전쟁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이란의 주권을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국민 단결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정부가 대중의 의미 있는 지지 없이 싸운 것으로 보인다. 이란 내부의 정확한 여론조사를 구하기는 어렵지만, 정부 지지 집회의 부재, 전쟁 직전 정부의 낮은 지지율, 전쟁 이후 이어진 강경 진압은 그 자체로 상황을 설명해준다.
나는 이란 내 여러 소수 민족 집단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많은 이란인들(특히 역사적으로 소외된 공동체 출신 사람들)이 이번 이스라엘과의 충돌을 국가 방어가 아니라 정부의 이념적 모험주의와 지역 내 대리전 정책이 초래한 무책임한 결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전쟁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수립된 이슬람 공화국 체제에 있어 가장 취약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약화한 경성과 연성 권력
최근 일련의 충격적인 타격 이후 이란 정부가 얼마나 약화했는지, 그 실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혁명 정통성과 시아파 이념, 반서방 선전으로 구축된 이란의 연성 권력은 극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이슬람 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서사를 내세웠다. 자신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정부이며, 전 세계 무슬림의 대의를 수호하고,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국영 미디어, 대리 민병대, 종교적 담론을 통해 확대되었고,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외교적 개입과 핵 개발, 지역 민병대 지원 등 대규모 군사 지출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 내러티브는 과거처럼 먹히지 않는다. 이란 지도부는 더 이상 국내에서 통합을 이끌거나 해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레바논, 이라크, 예멘의 시아파 인구조차 이스라엘과 이란 간 충돌에서 뚜렷한 지지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이란 내부에서는 이스라엘을 존재론적 적으로 묘사하던 정부의 선전이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는 정부의 구호보다는 인권운동에 더 많이 공감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란의 경성 권력 역시 명백히 약화하고 있다. 고위 지휘관들의 사망과 주요 군사 인프라의 파괴는 이란 정부의 정보 및 안보 시스템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을 보여준다.
Protests continue in Iran despite mass arrests and use of deadly force against them.
— Assal Rad (@AssalRad) October 8, 2022
Here are women in Tehran protesting without their veils and shouting: “women, life, freedom,” a central slogan that captures the spirit of these protests. pic.twitter.com/jD95uFdiDF
2022년 ‘여성, 생명, 자유(Woman, Life, Freedom)’ 시위 당시, 이란인들은 테헤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규모 소요를 벌였다.
이스라엘의 공격이 있기 전부터, 여러 보고서들은 이란의 군사력이 수십 년 만에 가장 약화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진정한 충격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란 군부와 정보 기관의 고위층까지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드러낸 데서 발생했다. 이번 충돌은 군사적 실패일 뿐 아니라 보안 실패이기도 했다.
외부에서는 패배하고, 내부에서는 표류하다
이란 정부가 중동 지역 전반에서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국내 통제력 또한 약화하고 있다. 2024년 이란 문화부가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했으며, 응답자의 90% 이상이 현재 국가의 상황에 대해 “불만족”을 표시했다. 2024년 11월에 열린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40%를 밑돌며, 정치 과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란 내부에서 나온 보도에 따르면, 많은 이란 국민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 책임이 정부의 정책에 있다고 보고 있다. 라슈트(Rasht)의 한 주민은 로이터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들의 정책이 전쟁과 파괴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과거에도 반복해온 대응 방식을 다시 꺼내 들었다: 탄압이다. 정부 성향의 언론에 따르면, 충돌 기간과 그 직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700명 이상을 체포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탄압도 소수민족 거주 지역, 특히 쿠르드 지역을 집중적으로 겨냥했다.
이스라엘과의 휴전 다음 날, 정부는 국경을 넘어 생계를 유지하던 쿠르드계 노동자 세 명을 처형했다. 이들은 이란의 낙후된 쿠르드 지방에서 생존을 위해 밀수를 해오던 사람들이었다.
이 처형은 재판이나 변호인 없이 진행되었고,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적 희생양을 이용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패턴을 다시 보여준다. 정부가 위협을 느끼는 순간, 가장 먼저 쿠르드를 공격한다.
탄압의 역사적 패턴
이란 내 쿠르드인은 약 1,000만~1,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2~15%를 차지해 페르시아인, 아제르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이다. 이란에는 그 외에도 많은 발루치족과 아랍계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1979년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될 당시, 많은 소수민족들이 혁명을 지지했다. 이들은 이전의 잔혹한 전제정치, 특히 소수민족을 자주 탄압하던 팔라비 왕정보다 더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이란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빠르게 무너졌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는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시아파 이슬람과 페르시아 정체성에 기반한 통합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비(非)페르시아계 및 비(非)시아파 공동체를 배제했다.
다른 소수민족들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시아파 아제르인들만이 주로 체제 안으로 흡수되었다.
호메이니는 쿠르드 저항 세력에 대해 지하드를 선포하며, 그들을 ‘이교도’, ‘분리주의자’,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리인’으로 낙인찍었다.
정부는 팔라비 왕조에서 물려받은 첨단 무기를 동원해 쿠르디스탄 주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수많은 쿠르드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었고, 1979년부터 1988년 사이 약 5만 명의 이란 쿠르드인이 희생되었다.
이 지역은 군사화된 구역으로 전환되었고, 그 상태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쿠르드를 겨냥한 탄압 캠페인
1988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이란 정부는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군사적으로 약화한 상태에서 국내 봉기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정치 개혁을 수용하는 대신, 정부는 이란 역사상 가장 잔혹한 탄압 중 하나로 대응했다. 호메이니는 파트와(fatwa, 종교 칙령)를 내려 수많은 쿠르드계 반체제 인사를 포함한 정치범들의 처형을 명령했다.
1988년 7월 말부터 9월 사이,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재판이나 어떠한 법적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다.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에 따르면, 최소 5,000명이 살해되어 이름조차 없는 집단 매장지에 묻혔다.
호메이니는 이들을 “모하레브(mohareb)” — 곧 “신에 맞서는 자들” — 로 낙인찍었고, 혁명재판소가 이들을 더 일찍 사형시키지 못한 것을 비난했다. 이 대규모 처형 캠페인은 법적 선례나 인권 기준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모든 반대 의견을 근절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였다.
"1979년,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총살형 집행부대가 약식 재판 후 쿠르드 반군 9명과 전직 팔라비 왕정 경찰관 2명을 처형했다."
A government firing squad executes nine Kurdish rebels and two former police officers of the deposed Shah of Iran after summary trials, Aug. 27, 1979. The next day, another 21 Kurdish rebels and military deserters were executed. pic.twitter.com/dTjfTzv7kd
— ดอกไม้จันทน์ (@VrAll_Gonna_Die) September 19, 2018
그 후 수년 동안, 정부는 이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요 쿠르드 지도자와 다른 야권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암살했다.
이러한 쿠르드 지도부에 대한 표적 암살과 정치범 대량 학살은, 조직화한 반정부 세력이 체제를 위협하기도 전에 미리 제거하겠다는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새로운 위기, 반복되는 전략
이슬람 공화국은 지금, 이 전략을 다시 꺼내 들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취약한 조건 아래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정부 상황에도 불구하고, 특히 소수민족 지역에서 더 많은 시위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답은 바로 '두려움'이다 —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공포 말이다.
쿠르드인들은 과거의 봉기, 특히 2022년의 “여성, 생명, 자유(Women, Life, Freedom)” 운동에서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쿠르드인이 주도적으로 시위에 나서면,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후 이어진 진압에서 살해되거나 탄압당한 이들 중 56% 이상이 쿠르드인이었다.
한편, 전반적인 야권은 여전히 분열해 있으며, 민족별로도, 정치적 목표 측면에서도 명확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주요 야권 세력은 전통적으로 소수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며, 미래의 이란 청사진에 그것을 포함하는 일조차 꺼려 왔다. 이들은 오히려 어떤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영토 보전(territorial integrity)’을 고집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공화국이 반복해온 수사와 흡사하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 공화국이 남긴 주요한 유산 중 하나다. 정부의 선전은 국내 여론뿐 아니라 야권의 사고방식까지도 형성해왔고, 이란 국내외에서 이란인을 분열시켜왔다. 또한 정부는 쿠르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내부의 적으로 묘사하면서, 다수 민족을 동원해 이들에 맞서도록 해왔다.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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슉리야 브라도스트(Shukriya Bradost)는 버지니아텍(Virginia Tech)의 계획, 거버넌스 및 세계화 박사과정(Ph.D. Student of Planning, Governance and Globalization)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