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KPS가 태안화력에서 목숨을 잃은 고 김충현 노동자의 동료 하청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중대재해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겪고 현재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을 받고 있는 중이다. 고인의 동료들은 고용노동부가 한전KPS에 작업중지명령을 내릴 것을 촉구하며 4일 밤 부터 노동부 서산출장소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한전KPS는 지난 3일 고 김충현 노동자가 소속되었던 하청업체 한국파워오엔앰과 삼신에, '1차 트라우마 치료 기간 종료 및 작업재개 시행 알림' 공문을 보내 기습적인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다. 공문에는 이들 협력업체들에게 '태안화력 경상정비 작업 재개'를 지시하면서 "2차 트라우마 치료는 정상 출근하여 업무수행 재개 이후 하도급 계약에 따른 업무의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참여가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4일에는 두 업체 소속 하청 노동자들에게 직접 문자를 발송하여 7월 7일자로 현장에 출근할 것을 지시했다.
한전KPS가 협력업체에 발송한 업무재개 지시 공문. 대책위 제공
한전KPS가 고 김충현의 동료들에게 보낸 업무복귀 지시 문자. 대책위 제공
대책위에 따르면 한전KPS는 고 김충현 노동자의 사망 이후 협의 과정에서 "정부 가이드라인만 있다면 정규직 전환에 협조하고, 트라우나 치료에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도 6월 5일 한전KPS와 협력업체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후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과의 협의를 통해 치료 프로그램이 정리됐고, 지난 6월 말 부터 고 김충현의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집단 및 개별 상담 등 본격적인 트라우마 치료가 시작돼, 이제 한창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상황이다.
트라우마 치료에 참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트라우마 치료 및 예방 프로그램은 5단계 구조로 5주 이상 진행되는 전문 과정"이며 "재해가 일어난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사고 트라우마를 재자극할 수 있어, 당사자들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하고 함께 협의하여 복귀 시점을 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책위는 "이러한 원칙과 과정을 무시한 한전KPS 태안사업처의 지시는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오로지 비용과 효율만을 앞세운 처사"라고 규탄했다.
대책위는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에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보장을 위한 공문을 다시 발송하고, 작업중지명령을 비롯한 행정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으나, 노동부는 "아무런 약속을 할 수 없다"면서 한전KPS의 "일방적 복귀 명령"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책위와 고 김충현 노동자의 동료들인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4일 오후 12시 30분 부터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를 찾아 직접 "노동부가 책임지고 작업중지명령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늦은 밤까지 노동부의 책임있는 답변을 기다렸으나, 노동부는 끝내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4일 낮부터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에 모인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책위 제공
고용노동부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대책위와 고인의 동료들은 4일 밤 11시 경 부터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대책위는 농성에 돌입하며 발표한 입장문에서 "고용노동부는 한전KPS부사장이 전화를 안 받는다며 우리를 밤 9시까지 기다리게 하더니, 아무런 약속을 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입장을 내놓았다"면서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의 하수인인가?" 개탄했다.
또한 "태안화력발전소는 법위반 사항이 무려 1000건이나 발견됐다"며 고용노동부는 "고 김충현 사망사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작업중지를 내려야 한다"고 짚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책임도 강조했다. 대책위는 "이재명 대통령과 김민석 총리는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를 철저히 수사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이재명 정부의 대책이 트라우마 치료도 끝나지 않은 고인의 동료를 출근시키는 것인가?" 분노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의 입장이 나올 때까지 농성에 들어간다"며 "많은 분들의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대책위에 따르면 5일 새벽까지도 고용노동부는 대책위의 작업 중지 명령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책위와 현장 조합원들이 고용노동부에 태안화력발전소 현장의 여러 위법한 사항을 신고한 상황이다. 절차에 따라 신고 사건에 대한 수사에 나서야 하는 고용노동부는 새벽 4시 40분경 근로감독을 위해 태안화력발전소 현장으로 출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책위는 5일 오후 2시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 앞에서 집회를 갖고 정부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할 예정이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아래와 같다.
① 한전KPS, 한국파워오엔앰, 삼신은 기 계획된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을 8.29.(금)까지 진행하는 것을 보장하고, 치유기간 작업중지를 유지한다. 불이행시, 고용노동부는 작업중지를 명령한다.
② 한국파워오엔앰, 삼신은 치유기간 중 임금을 정상근로시 받는 임금과 동일하게 지급한다.
③ 한전KPS는 한국파워오엔앰, 삼신에게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기간 중 발생하는 기성금을 전과 동일하게 지급한다.
④ 한전KPS비정규직지회 조합원 복귀는 중증자에 대한 추가 치유, 고용노동부 사고조사 ‧ 특별근로감독 ‧ 종합안전보건진단명령, 안전보건개선계획서 제출 및 현장개선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8.29.(금) 이후로 故김충현대책위와 협의하여 진행한다.
⑤ 한전KPS, 한국파워오엔앰, 삼신은 기 계획된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운영에 필요한 비용 및 한전KPS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 동의한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장소 대관비 및 비용을 전액 지급한다.
한편 대책위는 이번 업무 복귀 명령이 대책위가 원청사인 한국서부발전과 한전KPS를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고용노동부에 고발한 이후 일어난 "명백한 보복조치"라고도 보고 있다.
대책위는 지난 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발 사실을 밝히고, "한국서부발전과 한전KPS는 도급인이자 사업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면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