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인도 헌법 전문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하라는 청원에 대한 심리에서 인도 대법원장은 두 가지 중요한 견해를 밝혔다. 첫째, 헌법 전문에 사용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교리적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의미한다고 했다. 둘째,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헌법의 기본 구조에 속하며, 단순히 헌법 전문에 추가된 요소가 아니라 인도 공화국의 본질에 깊이 스며 있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장은 '사회주의'를 제도적 측면에서 정의하지는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적어도 주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대법원장은 '사회주의'를 소유 제도가 아니라 결과로 정의하며, 사적 기업이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시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를 생산 수단의 소유를 기준으로 정의하는 제도적 정의는 널리 사용된다. 이는 사회적 소유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구축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장은 이러한 결과가 사회적 소유 없이도 가능하다고 시사했다. 물론 사회주의는 단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사회에 가져오는 원자화된 개인들로의 분열 상태를 넘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라는 특징도 가져야 한다. 문제는 사회적 소유 없이도 이러한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지 여부다.
우리는 기회의 평등이 사적 기업과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적 기업과 기회의 평등 사이의 명백한 모순 사례를 몇 가지 제시하는 것 외에 이 논쟁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대법원이 대법원장의 기회의 평등에 대한 헌신을 고수하고,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검토할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현재 인도 사회가 한편으로는 부의 집중이 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과 영양 결핍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회의 평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의 지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출처: Unsplash, Hennie Stander
기회의 평등은 실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마르크스가 '산업 예비군'이라 부른 실업 상태는 고용자와 실업자 간의 소득 격차를 초래한다. 실업자가 실업수당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들의 소득은 고용된 사람들의 소득보다 훨씬 낮다. 따라서 실업자의 자녀는 여러 가지 박탈을 겪게 되어, 이들과 다른 계층의 자녀들 간에 기회의 평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게 된다.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외에도, 실업이라는 사회적 낙인은 실업자들의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실업자 자녀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외상을 제거해야만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실업 자체를 근절해야 한다.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박탈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실업자가 고용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즉, 실업수당을 임금 수준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적 기업이 존재하는 경제에서는 불가능하다. 실업의 존재는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규율 장치로 작용하며, 이는 자본주의뿐 아니라 중요한 민간 부문이 존재하는 모든 경제에서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업자가 고용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 혹은 실업수당을 임금 수준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규율 장치를 제거하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실제로 완전 고용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기회의 평등과 사적 기업 사이의 첫 번째 모순은 실업 문제에서 발생한다. 대법원장이 이에 동의할지는 불확실하지만, 실업의 존재가 기회의 평등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위한 두 번째 명백한 조건은 부의 상속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거나 최소한 대폭 축소하는 것이다. 억만장자의 아들과 노동자의 아들이 동일한 기회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억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다면, 이는 더욱 명백하다. 심지어 자본가의 이윤, 나아가 부를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자질 덕분으로 설명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조차도 상속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상속은 "특별한 자질로 인한 부"라는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는 높은 상속세를 부과하며, 일본에서는 상속세율이 55%에 달하고, 다른 주요 국가에서도 약 40% 수준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놀랍게도 상속세가 없으며, 이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세 번째 요구 조건은 상속의 금지 여부를 넘어, 부의 격차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부는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포함한 다양한 권력을 가져오며, 권력이 불균등하게 분배된 사회는 결코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부가 자녀들에게 상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 외에도, 부의 영향을 통해 부모의 생애 동안 자녀들이 불공정한 이점을 얻는 상황을 방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부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동일한 논리는 소득 격차에도 적용되며,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려면 소득 격차 역시 최소화해야 한다.
네 번째 요구 조건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녀들의 교육 수준이나 기술 습득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두가 고품질의 교육과 기술 습득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무료이거나 모든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낮은 비용으로 제공되는 공교육 체제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하에서 인도 및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의 민영화는 수많은 학생을 교육의 혜택에서 배제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조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반해 고품질의 완전한 공교육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러한 공교육 체제가 존재하더라도, 값비싼 사립학교가 존재하면 그러한 학교에 대한 잘못된 위신이 형성되어, 그 학교 출신자들에게 채용 시 우선권을 주는 방식으로 기회의 평등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립학교가 존재한다면, 공립학교보다 더 높은 수업료를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사실상 자선기관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 요구 조건은 보건의료와 관련이 있다. 동일한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정부의 관리 하에 있는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를 통해 모두가 접근 가능한 고품질의 보건의료를 완전 무료로, 또는 모든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명목상의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위의 조건들은 분명하면서도 최소한의 것이다. 그러나 전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 정책을 통해 실업률을 최소화(196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약 2%)로 유지했던 사회민주주의가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성과로도 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의 인플레이션 위기로 인해 사회민주주의가 붕괴한 것이며,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복지국가를 소멸시킨 인플레이션 위기는 높은 고용률뿐만 아니라, 이전에 식민주의를 통해 중심부 국가들이 먼 지역의 1차 상품 생산자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상황이 사라지면서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계급 갈등을 심화시켰고, 그 결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생산 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계급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만 진정한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깊이 논의하지는 않겠다. 대법원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제공하려는 약속을 계속 지키기를 기대한다. 사회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조치라도, 기회의 평등을 향한 어떤 진전이라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환영받아야 한다.
[출처] Defining Socialism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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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