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목포조면공장 모습. 출처 :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사진
1924~26년 무안·목포지역 소작인들의 투쟁과 목포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를 시작으로 1925년 도초도, 자은도, 지도 등에서의 소작쟁의 물결은 이들 지역의 중심생활권인 목포를 붉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특히 1925년은 한해 내내 각 섬 소작인들의 투쟁으로 무안·목포지역이 들썩였다.
이 투쟁은 섬과 도시에 갇히지 않고 무안·목포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조직 건설의 성과를 일궜다. 전년도 소작인과의 합의를 전면 거부한 지주들과 싸움이 새롭게 준비되던 1925년 1월 10일 목포 무산청년회 주도로 암태도, 도초도, 지도, 자은도 등지에서 소작쟁의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각 섬의 청년회들을 추동해 지역 청년조직을 건설했다. 무목청년연맹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과, 무산대중해방운동의 선두가 될 것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또 이 청년연맹은 청년지식인들이 주도했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 섬의 노동쟁의를 이끌고 각 섬에서 수백 명의 소작인을 동원해 원정시위, 아사동맹을 할 만큼의 대중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투쟁의 핵심들이 포진해 있었다. 무목청년연맹의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집행위원들을 살펴보면 암태도의 박복영, 서동오, 박종식, 도초도의 김용택, 지도의 김상수, 나만성, 자은도의 송기화, 임자도의 정두현, 목포의 배치문, 조극환, 박승억 등이 있다. 박복영은 암태도 소작인회 대표고, 송기화는 자은도 소작인회 임시의장, 김상수는 지도소작인공조회 대표, 배치문은 목포의 대표적인 사회운동 인사였다.
무안·목포지역 차원의 청년연맹 건설로 지역조직 건설의 물꼬를 튼 이들은 더 속도를 냈다. 청년연맹은 여러 강연회로 선전 활동을 이어갔으며, 목포 시내의 조선인 거주구역의 차별 해소, 정명여학교의 맹휴사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높여나갔다. 이들은 여타지역의 청년회들이 기존 청년회를 ‘혁신’하는 과정을 통해 청년회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높여나가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은 기존의 자산가, 유지들로 주로 구성된 목포청년회와 병존하는 전략을 취한 점이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유연한 전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목포가 가지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목포는 1897년 개항으로 성장한 도시다. 개항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해 806명이었던 인구는 전위동맹이 창립되던 1925년이 되면 25,736명으로 32배가량 급격히 팽창하게 된다. 즉 목포는 기존 향촌을 거점으로 하는 강력한 토호세력이 없는 이주민들의 도시였다. 개항 특수를 노리고 찾아온 상인들과 지역 지주들, 그리고 1910년대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 정책으로 농촌에서 밀려나 생계를 유지하려는 노동자들의 도시로 바뀐 것이다. 1920년대 목포지역 노동자들은 대략 1,000여 명의 공장노동자들과 4,000여 명의 항만하역, 운반 등 직업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가 노동자들의 도시로 성장한 배경에는 바로 일제가 전남을 식민지 면화 재배 수출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목포는 영산강이 바다로 다다르는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영산강을 통해 전남의 내륙인 나주, 광주에까지 그 상업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고, 전남지역의 쌀뿐만 아니라 면화의 수출거점으로 성장한다. 목포가 면화의 수출거점으로 자리잡으며 목포지역에는 면화 가공과 관련한 직포, 조면, 면실유 제조 등을 하는 각종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이렇듯 이주민들로 구성된 노동자들이 다수를 점하는 도시라는 특징과 기존 향촌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토호세력이 없다는 조건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과 ‘무산대중해방’을 내건 사회주의 세력에게는 유리한 성장의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 목포 앞바다의 섬들에서는 소작쟁의마저 치열하게 전개됐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조직하다
목포는 항구이기에 기본적으로 부두하역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의 처지는 열악했기에 자연 발생적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미 1898년부터 1903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점심을 물로 채워야 했던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벌였다. 일본인 자본가들의 임금삭감에 맞서 지역주민의 지지 속에 파업투쟁에 나섰고 중간착취를 일삼던 십장들에 맞서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5년 사이 수차례 파업투쟁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은 완강한 투쟁으로 맞섰지만 군함과 군대까지 동원한 일본의 탄압 앞에 좌절하고 말았다.
부두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는 여러 차례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노동자들의 단결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될 객주들의 조직적인 방해 속에 여러 차례 좌절됐다. 하지만 마침내 1924년 조합원 1,900명에 달하는 하역노동자들의 조직인 해륙노조를 건설하게 됐다. 해륙노조는 당시 식민지 조선을 배회하던 사회주의의 영향이 없는 조직이었지만,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선진적 노동운동가와 지역의 진보적 청년단체의 노동야학 활동이 결합해 성과를 낸 것이다.
1925년 해륙노조와 같은 자생적 노조와는 다른 노동자 조직 건설이 추진됐다. 그들은 바로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의식적 조직화였다. 이들은 배치문, 조극환, 김영식, 서병인 등이었다. 목포무산청년회, 무목청년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지역에서 선전 활동과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던 이들은 1925년 8월 30일 전위동맹을 결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전위동맹은 단 4개 조의 규약 이외에 모든 것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한 것은 아마 일제 관헌의 불필요한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전위동맹은 그 규약에 “대중의 생활향상과 역군훈련을 목적으로 함”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실은 그 구성원들은 이미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 그룹뿐만 아니라 경성지역의 사회주의자 그룹과 조직적인 연관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예로는 전위동맹의 주요활동가인 배치문, 조극환 등은 1925년 1월 광주에서 창립한 전남해방운동자동맹에 가입해 그 활동 범위를 전남지역으로 넓히고 있었고,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수준의 활동가 그룹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들 해방운동자동맹은 창립 이후 첫 번째 대중사업으로 2월에 목포에서 사상강연회를 열어 성황리에 마쳤다고 한다.
이렇듯 지역에서 뿌리내린 전위동맹은 목포지역의 사회운동을 주도해나가고 있었다. 전위동맹은 창립 이후 기민하게 조직 사업을 전개해 나간다. 9월 13일 무목노농연맹을 창립해 지역 노동자·농민을 대표하는 조직을 건설함과 동시에 목포지역 노동자 실태조사를 전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9월 24일 목포청년회관에서 노동자간담회를 개최해 노동조합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업별 노조 건설을 목표로 위원을 선정했다.
사업의 성과는 눈부셨다. 노동자간담회를 마친지 3일 후인 9월 27일 목포의 대표적 기업이었던 목포제유공장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1월 12일까지 자유노조, 면업노조, 정미노조, 방직노조, 하차노조, 인쇄직공노조, 토공노조 등 10여 개의 직업별 노조를 건설한다. 노조조직 사업이 한창이던 10월 13일, 그때까지 조직된 8개 노조 1,770명의 조합원이 목포청년회관에 모여 목포노총을 창립했다.
목포노총의 공세, 자유노조의 파업
목포노총은 창립 이전 실시한 지역노동자 실태조사 결과, 지역의 자유노동자들인 지게꾼, 날품팔이, 하역운송 노동자들의 임금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현저히 낮다는 것을 파악했다. 목포노총은 해당 노동자들의 특성인 개별적 임금을 표준임금으로 제정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꾀했다.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가기 전 목포노총은 노조가 발표한 표준임금을 준수하고 표준임금을 거부하는 고용주에게는 노동력을 제공하지 말 것을 규율로 정했다. 노동자들은 목포 시내를 행진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선전했고 자유노조와 유사한 노동조건에 있는 산하노조인 하차노조, 목공노조, 선하노조가 동정파업에 돌입키로 했다. 12월 7일에 파업에 돌입한 자유노조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파업규율 준수를 스스로 결의하며 완강한 파업투쟁을 벌였다. 파업과정에서 자유노조는 표준임금표를 배포했고, 약속한 하차, 선하, 목공 등이 동정파업에 들어가면서 파업이 확대됐다. 일제 경찰까지 동원됐지만 결국 협상을 통해 투쟁은 자유노조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표준임금 실시 이후 이 지방의 임금은 종전보다 5할이라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한다. 이는 목포노총이 창립하면서 거둔 첫 번째 성공적 파업이었으며 지역노동자들의 단결이 일궈낸 소중한 승리였다.
인간 대우 요구, 목포제유공장의 파업
자유노조의 파업투쟁 승리 이후 목포노총은 지역의 가장 큰 사업장인 목포제유공장을 상대로 한 파업투쟁을 준비한다. 목포제유공장은 일본 면화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키타 마타조우(喜多又藏)가 1918년에 목포에 설립한 공장이다. 이 공장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면실유를 생산하는 회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면화회사, 조선방적회사, 조일정미소 등은 동일한 자본이었기에 지역에서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목포제유공장 파업은 지역의 총자본과 총노동이 대결하는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조선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는 회사였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열악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매일 12~13시간씩 일했고 심하면 하루 18시간까지 일할 정도로 처참한 착취상태에 놓여 있었다. 임금 또한 동일 성별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으며, 일본인 관리자의 폭언과 구타까지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이었기에 전체 노동자 170명 가운데 130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1926년 1월 15일 목포제유공장 노동조합은 임시총회를 열어 △임금 일급 1원 미만 노동자는 5할, 1원 이상 노동자는 4할 인상 △1일 10시간 노동 △악질 관리자 추방 △노동자를 동물 취급 말고 인간 대우해줄 것 등 4개 요구를 걸고 1월 18일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조합은 노조의 승인 없이 현장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규율로 삼고 규찰 활동을 강화했다.
하지만 제유공장 자본은 1월 20일 전체 노동자 170명 중 파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노동자인 126명에 대한 일방적 해고를 단행하면서 시내 다른 자본가들에게 해고자를 취업시키지 말도록 했다. 쌍방이 팽팽한 대치를 보이며 장기전 양상으로 들어갔다. 파업노동자들과 목포노총은 행상대 등을 조직해 생계대책을 강구하고 파업투쟁을 지속적으로 선전하는 장기전을 준비했다. 목포지역 사회단체들도 100명이 넘는 보복성 해고에 대책회의를 열며 투쟁기금을 모금하고 지지여론을 확산시켰다.
2월 설날이 지나며 파업이 한 달 이상 지속되자 목포제유 노동자 파업은 전 조선여론이 집중됐다. 회사는 일제 경찰을 동원해 파업 대오에 대한 탄압과 신규 노동자 채용 등으로 교란하려 했다. 자본측이 이처럼 강경하게 대처했던 이유는 목포지역 노동자들 전체로 파업요구가 확산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노조측에서는 이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파업 대오를 강경하게 유지했다. 파업 대오가 흔들리지 않으니 회사는 광주와 나주에서 데려온 신규직공을 파업 대오 몰래 야밤에 공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렇게 들어온 노동자들은 뒤늦게 파업 사실을 알고는 같은 노동자로서 양심의 가책으로 이른 아침 공장 밖으로 탈출했다. 이에 파업노동자들은 노동가를 부르며 목포역까지 그들을 환송해주었다.
한편 파업이 장기화되자 조선노농총동맹과 사회단체들은 파업후원회를 조직하며 지지방문과 지지여론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투쟁기금만으로는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파업 대오는 행상대를 인근 지역으로 보내 파업투쟁을 선전하고 생계대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이 행상대를 체포·구금했다.
한편 회사측은 주문물량이 밀리면서 손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측에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회사측이 선택한 전략은 일제 경찰을 끌어들이기 위한 폭력 행위 유발이었다. 파업이 2달이 넘어가자 회사는 이번에도 인근 농촌에서 감언이설로 노동자 150여 명을 모집해 밤을 틈타 몰래 공장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감금상태에서 공장을 재가동했다. 공장가동은 파업 대오를 동요시켰다. 2달이 넘는 파업투쟁으로 생계에 몰려있던 노동자 중 일부가 조업에 복귀하는 일이 벌어졌다.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3월 17일 공장조업을 막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해 공장 안으로 들어가 기계를 부수고 복귀한 노동자들과 신규 노동자들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했다. 파업투쟁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즉시 결사대 전원과 목포노총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했다. 3월 20일에는 파업을 지지하던 목포지역 사회단체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동자 파업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파업에 복귀한 노동자들의 집에 불을 놓는 등 투쟁은 격렬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지도부가 검거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파업 대오를 굳건히 유지했으며 전국적인 지지도 계속됐다. 하지만 일제와 자본측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업돌입 3개월이 된 4월 17일, 파업단은 공장을 다시 습격해 유리창을 깨고 기계를 부수었다. 최후의 저항이었다. 이 투쟁을 끝으로 파업 대오는 약화됐고 3년 후 벌어지는 원산총파업보다 더 장기간 투쟁했던 목포제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패배로 끝이 났다. 파업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단기 40일 장기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복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목포역에서는 3,000여 명의 군중이 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자본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파업 이후 조선제유주식회사 목포공장은 일화제유주식회사에 합병됐다. 파업기간 손실로 재정이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비록 파업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파업 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놀라운 조직력과 드높은 의식성은 이 시기 노동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수준으로 한 단계 상승시켰으며 이후 노동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위 사업장을 넘어 함경남도 영흥과 원산에서와 같이 지역 차원의 동맹파업으로 발전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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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http://www.mokpo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918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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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