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권 반대’ 하려고 집권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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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의결했다. 총지출 677조 원 규모인데 올해 본예산보다 3.2% 늘어난 수치다. 정부는 내년도 경상성장률을 4.5%로 예상하고 있으므로 긴축재정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재량지출 증가율은 0.8%에 그쳤는데,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분을 빼면 사실상 동결에 가까운 수준이다. 돈을 거의 한 푼도 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예산인 셈인데, 이 시국에 이래야 할까? 당혹스럽다.

과거의 정권을 보면 방점은 ‘전 정권 반대’에 찍히더라도 경제 정책의 틀로서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바가 있었다. 이명박 정권의 747과 녹색성장,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 혹은 포용성장 등이 그렇다. 그게 잘 되든 안 되든, 정권 초기 정책은 대충 이런 식의 큰 줄기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그런 게 없고, 그저 우왕좌왕 하다 자원을 다 소모하고 말았다.

최근까지 윤석열 정권의 정책 행보를 보면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많다. 가령 부동산 가격을 떠받치기 위해 아등바등 해온 게 그렇다. 동아일보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집값도 못 잡은 정부는 처음’이란 제목의 칼럼이 나올 정도였다. “올라가는 집값을 못 잡은 정부는 많이 봤지만 저절로 떨어지는 집값도 못 잡은 정부는 처음 본다”는 거다.

전세계적 인플레 국면에서 부동산 불씨 살리기가 대출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자 이 정부는 은행을 압박하며 금리 인상 자제를 요구했다. 지난해 말에는 대통령이 직접 “죽도록 일해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고 한 일도 있었다.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은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와 대환대출 서비스 확대, 사회환원 사업 추진 등 금융권의 선물 보따리로 돌아왔다. 이게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 동력의 연료가 돼왔음은 물론이다.

총선 이후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이 본격적 문제로 대두되자 대통령은 직접 ‘투기 수요’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전 정권이 투기를 막겠다는 취지로 편 정책이 부작용을 낳았다’는 식의 서사로 일관했는데,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대통령의 측근이 원장인 금융감독원이 이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금융권에 대출 수요 관리를 위해 금리를 인상하라는 취지의 ‘창구지도’에 나섰다는 얘기도 있다. 동아일보는 25일 사설에 “지난달 초 금감원은 은행 부행장들을 불러 모아 대출을 무리하게 확대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이후 은행들은 주담대 금리를 앞다퉈 올리기 시작했다. 5대 시중은행의 주담대 금리는 지난달 이후 20차례나 올랐다. 제2금융권의 주담대 금리가 은행보다 낮은 역전현상도 나타났다”고 썼다.

자기들이 땐 군불이 산불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정부도 팔을 걷어 붙였다. 보수의 부동산 ABC는 ‘공급만능론’이다. 공급을 늘려 가격을 잡는다는 논리로 이런 저런 개발 대책을 쏟아내는 것이다. 지난 8일 정부가 그린벨트 해제와 재개발 재건축 규제 완화를 묶어 내놓은 소위 8.8 대책도 그런 취지였다. 그린벨트를 해제해 주택용지를 확보하고 고밀도의 재개발 재건축을 활성화 해 공급을 확대하면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집값이 잡힐 거라는, 그런 얘기였다.

그러나 ‘공급만능론’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보수 언론조차도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첫째,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주택 공급은 최소 10년 후에나 이뤄질 일이므로 지금 부동산 가격에는 영향을 미칠 일이 아니다. 둘째, 재개발 재건축 역시 사업성 제고라는 변수가 우선인 상황이라 규제 완화는 당장 효력이 없다. 오히려 이 대책은 경기가 개선될 때 돈이 부동산으로 더 급격하게 쏠리게 만드는 ‘부스터’가 될 우려가 있는 것들 아닌가? 이러다보니 조선일보조차 8.8 대책은 집값을 잡기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려우며, 대출을 조이는 대책조차 없다는 점에서 정부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평가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게 부동산 경기에 한정된 얘기가 더 이상 아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렇게 늘어난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격이 통화정책의 부담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 22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3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행은 미 연준이 금리 인하를 시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부동산 및 가계부채 상황 때문에 금리를 함부로 내릴 수 없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내수 진작’을 언급하며 한국은행 금통위 결정에 대해 “아쉽다”고 했다. 최근의 지표가 가리키는 것은 반도체 등의 특수한 품목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내수부진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정권 입장에선 금리 인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결단을 바랐다면 최소한 보수언론조차 지적하듯 부동산 연착륙을 유도하면서 대출을 조였어야 했다. 이제와서 호떡집에 불난 듯 하며 중앙은행이 알아서 코드를 맞추길 기대할 순 없는 거다.

당장 원하는 타이밍에 금리 인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재정을 써서 내수 진작을 도모할 수 있는 카드를 써야 한다. 그러나 ‘건전 재정’을 외쳐온 탓인지, 그런 건 없었다. 이 정권은 감세로 일관해왔으므로 더욱 재정을 쓰기 어렵다. 결국 ‘추석 민생’ 어쩌고 하면서 단기 대책을 늘어 놓으며, 부동산과 가계부채에 대해 뭔가 하는 양 하면서 한국은행에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주고, 이제나 저제나 금리 인하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년 예산에라도 재정을 쓰겠다는 의지가 반영이 돼있어야 한다. 그런데 글의 서두에서 봤듯, 그런 건 역시 없다. 왜 이러는 것인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우리가 통치를 잘못했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남는 건 ‘전 정권 탓’ 하는 거다. 대통령의 “지난 정부가 5년간 국가채무를 400조원 이상 늘리면서 정부가 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27일 국무회의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앞뒤가 없는 정책 행보는 어떤 철학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시사했던 낙수효과에 대한 속류적 믿음이 참사의 수준으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이 활동을 잘할 수 있게 세금을 깎아주고 고소득층이 자산을 불릴 수 있도록 부동산 경기를 떠받치면, 그 성과가 저절로(즉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민간 전체에 고루 배분될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이다.

이런 단순한 도식은 과거 보수정부의 그것보다도 후퇴한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과거 보수정부는 그게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관은 치(治)하기 위해 있다”는 소리를 해가며 “환율주권”(그들이 직접 한 표현이었다)이라도 휘둘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더군다나 지금은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득세하던 2008년 조차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경우 전반부는 ‘낙수효과’ 타령으로 보내다가 생각처럼 되지 않자 케인지언으로 알려진 정운찬 교수를 국무총리로 불러와 동반성장 등의 정책 이슈를 주도하게 했다. 동반성장이란 여러 말이 많았지만 한 마디로 ‘낙수효과’가 저절로는 일어나지 않으니 반강제로라도 일으켜 보겠다는 식의 접근이었다.

이러한 중첩된 시행착오는 윤석열 정권이 그렇게도 좋아해마지 않는 일본 역시 이미 겪은 일이다. 과거 아베 신조 정권도 2차 집권 초기 비전통적 통화정책(양적완화)을 통한 경기부양과 고환율, 대규모의 세제 혜택으로 기업에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나 ‘낙수효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총리가 직접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기시다 정권에서도 총리가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이들이 좌파라거나 친노조 세력이라서 이러한 일을 했겠는가? 일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26개월 연속 하락했다. 그나마 정치권 압력 등에 힘입어 대기업 평균 임금 인상률이 5%를 넘는 등 30년 만의 최대 임금 인상이 이뤄지고 있다는데도 그렇다.

한국의 경우 연평균 실질임금은 2022년에 이어 2년 연속 감소세이다. 월별로 보면 소폭의 상승과 하락이 교차하고 있으나 연간 실질임금의 2년 연속 감소는 2011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일본과 같은 인플레 유발 통화정책 같은 게 없었는데도 이렇다. 이런 상황에도 정권은 기업에 임금을 올리라고 말하기는 커녕 ‘건폭’이니 뭐니 하면서 노조를 폭력배 취급하고 ‘반국가세력’을 말한다.

이런 사실로 보면 윤석열 정권의 경제정책은 보수의 눈으로 봐도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러한 무능력 무계획 무맥락의 정책 비전을 가진 세력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건 오늘날 이러한 체제의 대의정치에선 ‘반대’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수권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집권하고 싶다면 거대 양당에 소속된 상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일만 계속하면 된다. 상대방을 ‘비정상’으로 몰고, 그 ‘비정상’을 제거하기만 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식의 캠페인이면 족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진보가 가야하는 길은 그게 아닌 길이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길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에 대해 생각하다 진보정치의 오늘과 앞으로의 갈 길을 새삼 깨닫게 되다니, 고맙다고 해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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