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차면 기우나니: 세계질서의 변화와 한국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지난 80년 동안 지구 행성에서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군림해온 세계질서가 최근 들어 변한 기색이 역력하다변화의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제국과 그 속국들 또는 집단서방이 전면적인 하락세를 드러낸다면과거에 그들에게 침략당한 비서방 나라들은 약진세를 나타내는 것이다오랜 기간 세계질서를 장악해온 제국과 그 속국들의 세력과 영향력이 약화한다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쇠퇴와 국내 정치의 불안정국제관계에서 (도덕적지도력 및 신망의 추락군사력의 약화테러리즘에의 의존 등의 면모를 갈수록 크게 드러내는 데서 뚜렷이 확인된다반면에 과거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이었던 나라들전에는 식민지나 신식민지제3세계개발도상국 등으로 분류되었고 최근에는 주로 남반구로 일컬어지는 비서방 나라들은 상당수가 경제적 발전과 주권의 회복군사적 약진상호 호혜주의의 추진 등을 통해 굴기하고 약진하는 모습이다각국의 사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화할 수 없는 측면들문제들이 물론 많겠지만그래도 국제사회의 풍향계는 서쪽보다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을 더 크게 받기 시작했음이 분명해 보인다이것은 대략 15세기 말 16세기 초 무렵에 서양의 제국주의적 세계제패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생긴 역사적 변동이다.

세계질서의 변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경제 분야라 여겨진다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구성된 G20 소속 국가들 가운데 G7 국가들과 브릭스 국가들 사이 경제 규모 차이가 2024년을 거치며 더 크게 벌어졌다아래 도표를 보면 제국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G7의 구매력평가지수 기준 GDP는 미국 29.2일본 6.6독일 6.0프랑스 4.4영국 4.3이탈리아 3.6캐나다 2.6조 달러로 총 56.7조 달러이고브릭스는 중국 37.1인도 16.0러시아 6.9브라질 4.7남아공 0.9조 달러로 총 65.6조 달러로 나온다. G20 19개 국가들 가운데 G7에도 브릭스에도 포함되지 않는 나머지 7개국의 경제 규모는 인도네시아 4.7튀르키예 3.5한국 3.3멕시코 3.3사우디아라비아 2.1오스트레일리아 1.9아르헨티나 1.4조로 보고되고 있다. G7과 브릭스에 대한 이들 나라의 관계를 놓고 보면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아르헨티나는 친 G7이고인도네시아와 튀르키예사우디아라비아는 모두 브릭스 회원국 아니면 협력국이다미국의 인접국인 멕시코의 경우는 브릭스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비서방 국가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이런 분류에 따라 제국주의 서방 국가들과 비서방 비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규모를 다시 비교해보면서방 국가들은 63.3조 달러비서방 국가들은 79.2조 달러로후자의 규모가 월등히 크다.

근대적 세계체계가 지난 수백 년 작동해오는 동안 세계질서를 주도한 것은 자본주의적 성장을 먼저 이룬 서방의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수많은 비서방 국가들이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지배를 자행한 결과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피식민 사회 다수가 독립을 이루기는 했지만대부분 옛 식민종주국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식민지 상태로 있었다고 봐야 한다그런 상태는 과거 냉전 구도에서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이 1991년에 붕괴하고 미국 주도의 일극적 세계질서가 펼쳐진 뒤로는 더욱 강화한 셈이다하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를 맞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국과 그 속국들의 경제적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났고아울러 제국 중심의 세계 경제질서에 변동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그런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09년에 브릭스가 결성된 뒤로 중국과 인도러시아 등 비서방 주요 국가들이 이룬 경제적 굴기 현상이다이제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국가가 되었고인도는 과거 자국을 식민 지배한 영국의 경제 규모를 훨씬 앞질렀으며러시아는 독일을 추월하고 유럽의 최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화무십일홍이요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한국의 민요 가락이 있다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으며세상만사는 변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서양에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운위된다이 바퀴의 특징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계속 돈다는 것이다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운명은 변한다고 믿었다는 것인데지금 제국은 자신이 그동안 속한 수레바퀴 최정상에서 막 떨어지려는 모양새로 보인다제국 미국은 이제 지정학적인 최적 위치를 막 지난 상태에 접어든 셈이다미국은 물론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요그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그러나 최적 위치란 민요 가락의 표현대로라면 가득 찬 달 즉 만월에 해당한다꽉 차서 만월이 된 달은 기울 수밖에는 없다그것의 변화 방향은 오직 사그라지는 쪽일 뿐이다게다가 미국은 최적 위치를 막 벗어난 듯하다.

집단서방을 이끄는 제국의 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PPP 기준 GDP로는 중국에 밀리고군사적으로는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는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에 밀린다는 점외교적으로는 세계의 15%밖에 되지 않는 인구를 지닌 집단서방 국가들 외에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점특히 최근에 와서 갈수록 국제문제를 테러리즘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는 점 등으로 확인된다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는 국가에서는 예외 없이 색깔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전복하려 들고-카에다나 ISIS 등의 테러 집단을 지원해 중앙아시아서아시아북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재산과 인명을 파괴하고 살상하도록 하고 있다지금 가자지역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종족학살을 당하고 있는 것도 미국이 이스라엘에 계속 무기를 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테러에 의존해서까지 자국 이해를 관철하려 하지만기우는 달임이 분명한 제국의 지배를 세계인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비서방 주요 국가들이 브릭스를 결성한 것은 걸핏하면 경제 제재를 남발하는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에 맞서는 국제 경제기구를 마련한 것이고서아시아에서 팔레스타인 침탈에 맞서서 이란과 예멘의 안사르 알라가자의 하마스 등이 저항의 축을 결성한 것은 비서방이 군사적으로 제국에 맞선 사례에 속한다우크라이나전쟁이 발발한 것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동진을 자국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여긴 러시아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세력권인 북아프리카 사헬 지역에서 최근에 말리와 부르키나파소니제르차드세네갈아이보리코스트 등이 프랑스와의 군사적 유대관계를 단절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로 여겨진다프랑스는 제국의 속국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와의 군사적 관계 단절은 사헬 국가들이 서방 제국주의를 관장하는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한 셈이다.

제국과 그 속국이 그냥 물러날 리는 없다제국의 반격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제국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나라들에서 색깔 혁명이나 쿠데타 기획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작년 7월 말의 대선에서 3선에 승리해서 1월 10일에 새 임기를 시작하게 되는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미국이 타도하려 획책하는 것이 한 예에 속한다미국은 21세기 사회주의의 실천에 나선 고 우고 차베스가 정권을 잡은 2000년대 이후 베네수엘라에서 좌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숱하게 기도했다미국의 타국 정권 전복 기도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한 가지 예만 더 들자면 최근에 흑해 동안의 조지아에서 벌이는 작태를 언급할 수 있다미국과 그 하수인인 EU는 자국의 주권과 이해관계를 위해 러시아와 EU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벌이며 최근에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10월 말에 거둔 총선 승리를 무효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

제국과 속국의 반격이 성공하는 일도 적지 않다최근에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미국과 튀르키예이스라엘이 지원한 반군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게 된 것은 제국의 반격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붕괴한 아사드 정권이 독재정권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고그런 주장에 약간의 진실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그러나 아사드 정권의 문제는 시리아 내부의 문제로서 시리아인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지 외부 세력이 직접 간섭할 일은 아니다하지만 이번의 시리아 사태는 물론 내부 문제가 작용한 점도 있지만더 크게는 외부 세력의 침탈로 합법 정부가 무너진 사례에 속한다다마스쿠스 정권을 접수한 반군 가운데는 중국 신장성의 위구르 무장단체를 위시해서 시리아 외부에서 온 테러 집단이 많았고대부분 미국튀르키예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았다지난 12월에 아사드 정권이 붕괴한 뒤 시리아에서는 극단적 이슬람주의 테러 집단에 의한 학살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성공적인 반격을 하기도 하나 제국의 달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셈이다세계 최강임을 내세우면서 알카에다, ISIS 등 자국민에게는 테러 집단이라 말하는 세력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이용해 중앙아시아서아시아북아프리카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들에서 자원 약탈과 수탈을 위해 지역 안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제국이 쇠퇴한 징후다미국과 영국 등 제국과 그 속국들은 유엔 안보리에서도 세계 평화와 관련해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반대되는 태도를 고집한다세계의 헤게모니 국가임을 자처하면서 그런 비정상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더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고그동안 괄목할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을 이룬 것을 기반으로 이제는 제국주의 국가군 또는 집단서방의 일원이 되었다한국이 제국의 속국임은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미국과 EU의 무기가 동났을 때 예컨대 155밀리 포탄 50만 발을 우크라이나에 보낸 것으로도 나타났다미국은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의 상황을 활용하기도 한다지난해 11월 그동안 금지했던 러시아 영토내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우크라이나에 허용하는 명분으로 미국은 조선군이 우크라이나전쟁에 참전한다는 점을 거론했다조선군이 우크라이나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다는 소문은 서방과 한국의 언론이 무성하게 퍼뜨리기는 했지만아직 한 번도 객관적인 증거로 입증된 적은 없다그런데도 우크라이나는 조선군의 참전을 구실로 한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우크라이나가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한국은최후의 1인까지 자기들을 지원할 미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에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미국의 적이 되는 것은 위험하고우방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한마디는 키신저가 혐오스러운 전쟁범죄자이지만 국제관계를 관념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론적으로 파악했던 인물임을 말해준다키신저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전력을 다해 도와준 우크라이나가 국가로서 존폐에 위기 몰리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최근의 집단서방의 한 주축인 EU 국가들특히 독일이 경제적 붕괴 위기에 빠진 것도 미국의 최대 우방이 된 덕택이라 할 수 있다독일은 우크라이나전쟁이 발발한 2022년 9월에 러시아에서 자국으로 이어지는 북해 송유관 노르트스트림을 미국이 폭파해 그동안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 공급으로 성장해온 자국 산업이 붕괴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도 미국의 우방으로 있는 한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최근에 콜럼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도 국내 언론 헤럴드경제와 1월 3일에 가진 인터뷰에서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그는 현재의 국제상황에서 미국은 안정의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의 원천이라며,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자신의 안보를 지구 반대편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니 지역 내에서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할 것을 권하고 있다한국의 정치계급지배 블록이 과연 그런 권유를 수용할는지는 물론 의문이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다미국의 달은 이미 너무 차서 기울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두려운 것은 헤게모니의 위기를 맞은 제국일수록 더 폭력적이고 위험하게 된다는 것이다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을 한국의 최대 우방으로 삼고 있는 한 한국은 그런 위협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제국 미국은 이때 미국의 인민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집단특히 자본 세력을 가리킨다자본은 그 축적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발전하고미국의 경우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최강의 지위를 통해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제국의 속국으로서 한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이때 자본 세력지배 블록이 대표하는 나라로서 한국 인민과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한국과 제국의 관계가 긴밀할수록두 나라의 동맹이 굳건할수록 한국 인민의 운명이 치명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윤석열의 내란과 불법적 비상계엄 선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한국의 인민은 지금 기로에 선 셈이다윤석열을 탄핵하고 처벌하는 것만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그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겨진다핵심은 윤의 탄핵과 처벌 이후 한국을 어떤 나라로 만드느냐는 데 있다제국은 한국을 계속 우방이자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하지만 한국의 인민에게 그런 선택은 계속 두 나라 자본에 착취당하고 살아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한국의 인민은 어떤 선택을 할까답변은 아무래도 지금도 그들이 나서고 있는 거리와 광장에서 찾아질 것 같다

덧붙이는 말

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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