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이 된 농촌: 1, 2차 세계대전 속 농촌과 농업의 위기

일요일 밤 중국에서 TV를 시청하다 보면 적어도 세 개의 채널에서 2차 세계대전 시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그러나 디데이(D-Day)의 세계는 멀게만 느껴졌다여기서 계속 나오는 전쟁은 교활함과 끈질긴 회복력에 의존하는 저기술 게릴라전이다.

서구에서 기억하는 전쟁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면서 10년 전 마이클 가이어(Michael Geyer)와 공동 편집한 책 케임브리지 세계 2차 대전사에 기고한 글이 떠올랐다이 글은 북미중국인도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농업 시스템 공유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한 세계적인 개요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전문은 너무 길어서 아래 텍스트는 발췌한 것이다.

1950년 유엔의 첫 세계 인구 추정치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71%가 농촌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율은 83~85%, 유럽은 49%, 북미에서는 36%였다. 2차 세계대전은 농촌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주요 참전국 중 완전히 도시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 한 곳뿐이었다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1940년 당시 인구의 43%가 2,500명 미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에 살았다히틀러의 독일에서도 그 비율은 비슷했다.

2차 세계대전에는 이 시골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분쟁의 장이 있었다영국과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벌인 전략적 공중전은 여러 측면에서 전형적인 도시와 산업 간의 전쟁이었다폭격기 조종사들은 합법적인 도시 목표물을 식별할 수 없는 경우 시골 상공에서 탑재물을 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1940년대 전략 폭격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공중전조차도 완전히 도시화된 것은 아니었다공군 기지는 가능한 한 시골 지역에 위치했다건물과 나무는 이착륙 시 조종사들에게 위험한 요소였다비행장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대부분의 활주로가 포장된 것은 1939년 이후부터였다.

공중전은 엄청난 양의 땅을 필요로 했다. 1945년까지 미 공군은 30억 달러를 들여 뉴햄프셔(New Hampshire) 주 크기인 1,970만 에이커의 미국 영토를 비행장폭격장 및 기타 시설로 전환했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영국 시골에서 불도저로 밀어낸 활주로를 끝에서 끝까지 연결하면 폭 10미터길이 16,000킬로미터의 도로가 만들어질 것이다공중전으로 인한 땅의 굶주림은 전후 고속도로 시스템보다 몇 배나 더 컸는데현재 영국의 고속도로는 3,50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대전은 단순히 풍경 속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었다전쟁은 외부에서 농업 세계로 폭발적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파괴적인 우박처럼 우발적으로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다분쟁의 당사자 중 상당수는 농촌 출신이었다그들은 농촌의 문제에서 동기를 부여받았다그리고 전쟁의 모든 영역에서 그들의 투쟁은 시골의 자원사람동물에 직접적으로 의존했다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동원의 결과로 전쟁은 사회의 다른 어떤 영역보다 농촌 세계의 사회 질서에 더 심오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출처 : Unsplash, Austrian National Library

I

물론 전 세계 인류를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농업 시스템은 지역기후작물의 종류에 따라 세밀하게 차별화된다농촌 사회는 사회적 분열로 가득 차 있었다지주중산층 농민불안정하고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는 엄청났다그러나 20세기 초반의 국가 간 격차는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서야 북미와 오스트랄라시아(Australasia)의 농업만이 본격적으로 기계화되기 시작했다. 1940년 미국에서 농장마다 말노새소가 2마리씩 있었던 반면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농장 4곳당 트랙터 1, 6곳당 트럭 1대씩이 있었다농업의 기본 장비는 여전히 전 세계 농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사진에 담긴 미국의 농촌 생활 이미지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농업과 농가의 소득은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일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었고이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전쟁에 참전한 대부분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과 영국군 군대에 말이 없었다는 점이 예외적일 뿐이었다. 1940년 5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큰 승리를 거두며 현대 전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하지만 모터가 달린 전차 부대인 판저 사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사 장비와 물자 운반은 여전히 50만 마리의 말에 의존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농업 역사의 무대를 설정하기 위해 1920년대와 1930년대 세계 농업의 공통 분모를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근대화의 위기일 것이다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급증하는 인구점점 더 실망스러운 생산성 향상생산에 투입할 수 있는 새로운 토지의 감소라는 불균형이었다이러한 긴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방식은 전 세계 사회가 공통적으로 노출된 위험기근이었다서유럽은 1840년대에 마지막으로 극심한 기아를 겪었다그러나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기근 또는 기근에 가까운 상황의 기억은 동유럽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절대 빈곤과 만성 영양실조는 아시아 전역의 농촌 인구와 마찬가지로 남유럽과 동유럽의 수백만 명의 농촌 거주민들에게 일상적인 현실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부유한 사회가 기근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구 증가에 비해 훨씬 앞섰던 농업 시스템의 생산성보다는 국제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었다1차 세계대전의 봉쇄는 중부 유럽 도시에 다시 기근을 가져왔다.

한편시골은 극적인 문화적 변화에 휩싸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에 대부분의 유럽 농촌 지역에서 문맹 퇴치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1914년까지만 해도 제정 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 군대에 징집된 많은 농민 징집병들은 자신이 어떤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모든 전투원에게 민족화 메커니즘으로 작용했지만, 1930년대 유럽과 북미 이외 지역에서는 이 과정이 완전하지 않았다수억 명의 농민이 중국인인도인파키스탄인베트남인말레이시아인으로 변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농촌이 극심한 인구 압박을 받던 시절유라시아 전역에서 토지 부족은 흔한 문제였다. 19세기 내내 운송비가 하락하면서 이주와 새로운 식민지 개척이 탈출구를 제공했다. 1920년대 미국이 이주를 막으면서 중부남부동유럽 전역에 '인구 과잉'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만주의 '빈 공간'에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 이주민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이주를 통해 인구 압력을 해소할 수 없다면다소 폭력적인 토지 재분배를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토지 기근이 너무 심각하여 처음에는 아일랜드에서, 1905년에는 러시아에서, 1907년에는 루마니아의 라티펀디아 전역에서 '토지 전쟁'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1917년 이후 차르 제국의 영토가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의 시골은 1차 세계대전 후 혼란에 빠졌다. 1921년 봄레닌이 시장 기반의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환한 것은 러시아 내전의 결과를 확인시켜 주었다러시아는 농민을 상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1917년 농민들의 대토지 쟁취를 지지하고소비에트 집단화를 위한 성급한 추진을 중단했다. 1920년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안정화는 대규모 토지 재분배와 함께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는 스페인에서 토지 문제가 다시 한 번 부각되었는데안달루시아(Andalusia)와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에서 브라세로(계절 노동자)의 토지 기근이 민중의 폭동을 촉발시켰다.

농업 이외의 경제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면 압박이 이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산업 성장은 둔화되었다.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가 1920~1921년 사이에 폭락했고, 1928년 상품 시장을 강타한 공황으로 다시 폭락하기 시작했다예견가들은 오랫동안 세계 시장과 소규모 가족 농장의 생존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우울한 진단을 내놓았다. 1930년대에는 그 모순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중반부터 보호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농업 경제는 세계화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정부가 농촌을 통제한다는 개념이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1916년까지 가장 취약한 전투원들에게도 효과적인 중앙집중식 구매와 배급을 시행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전쟁이 끝난 후 많은 전투원들이 굶주리면서 정부 정책의 대상인 식량이 농민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그러나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들은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농업 시장에 대한 실험을 중단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모든 국가들은 농업 부문을 세계 시장으로부터 격리된 국가 농업 경제로 재편하는 데 주력했다. 나치 독일은 식량 시장을 완전히 폐쇄하고 식량비료동물 사료의 수입을 최소화한 가장 포괄적인 국가 보호주의의 사례다독일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기적속에서 육류와 우유 등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식료품에 대한 은밀한 배급이 이미 1935년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동구권에서 소련은 다른 모델을 시도했다. 1928년 스탈린은 1921년 레닌 때 중단되었던 농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재개했다. 1928년부터 1933년 사이에 '일국사회주의'를 주창하고 강제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러시아의 2,500만 개인 소유 토지 중 3분의 2와 농지의 83%를 집단화했다소련 정권은 단숨에 토지가축수확에 대한 통제를 중앙집권화했다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농민이 굶어 죽었다수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쿨락(kulak, 부유한 농민)'으로 분류되어 처형 및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 초 소련의 농촌 인구는 약 1억 2천만 명에 달했다서유럽 전역에는 1억 4천만 명이 더 살았다일본의 농가 인구는 3,200만 명에 달했고더 많은 인구가 농촌 마을에 거주했다이러한 농장 인구는 많았지만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아시아 인구특히 중국과 인도 인구에 가려져 있었다이곳의 토지는 서유럽과 동유럽보다 훨씬 더 부족했다정치적 동원의 기회도 훨씬 적었다그러나 벵골의 황마 농부나 동아시아의 논농부들은 이미 국제 시장의 변덕스러움에 노출되어 있었다오랫동안 잠자고 있는 대중으로 취급받던 농민 대중공산주의 선전에서는 '동방의 노동자들'이라고 부르는 농민 대중이 일어날 수 있을지가 20세기 초의 큰 의문 중 하나였다.

농민들이 봉기한다면 스스로 진로를 정할 것인가아니면 지도자를 따를 것인가그들이 싸운 대의는 무엇이었을까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해국가를 위해또는 더 많은 지역의 이익을 위해 싸울까아니면 착취강제 노동토지 개간인종 청소 등 제국주의의 마지막 토지 쟁탈전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될까?

다양하지만 서로 연결된 2차 세계대전의 농업 역사를 포괄하는 틀을 구성하기 위해 네 가지 차원을 제시한다첫째농업은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모든 참전국과 그 인구의 식량원자재인간 및 동물 노동력의 원천이었다둘째토지는 생산적 자원이자 농촌 생활의 기반으로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정복의 핵심 목표였다셋째시골은 대부분의 전쟁이 벌어지는 무대였다우리는 때때로 전장의 개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넷째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주요 전장에서 농민은 수동적인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고단순히 방관자나 부수적인 피해의 희생자가 아니었으며농민은 전쟁의 전략적 행위자였기 때문에 많은 전장에서 농민은 전장의 주체가 되었다.

출처 :  Unsplash, Deepak kumar

II

2차 세계대전 당시 농업 경험의 한 극단에는 미국과 대영제국의 백인 지배 지역인 캐나다호주뉴질랜드가 있었다직접 전쟁의 최전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이들의 고생산성 농업 시스템에 미친 영향은 극적이었다. 1930년대의 위기 이후전쟁은 국가 농업 정책의 영향력을 더욱 집중시키고 강화했다농업 기업주의 네트워크는 20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대에는 불황에 시달리던 북미의 농촌 경제에 불완전 고용과 잉여 노동력 문제가 있었지만전시 동원은 노동자들을 땅에서 쫓아냈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 농촌 경제에서 총 600만 명의 인구가 빠져나갔다전쟁은 특히 남부의 인종화된 소작 제도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흑인 노동력이 한꺼번에 목화밭을 떠나 신식 농기계로 대체되었다. 1930년대에 주춤했던 트랙터의 도입은 1950년대 초에 이르러 포화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가속화되었다미국의 밀과 옥수수 농업은 오랫동안 노동력 절감 기술의 선구자였다그러나 면화의 경우 1940년대 정부가 대규모 농장에 전례 없는 규모의 기계화를 도입하도록 장려하면서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기존의 노동 집약적인 방식을 고수하던 농부들을 위해 1942년 8월에 시작된 긴급 농장 노동력 공급 프로그램이 있었다. 브라세로 프로그램(Bracero Program)이라고도 알려진 이 프로그램은 결국 수십만 명의 멕시코인을 미국으로 들어오게 했다이 프로그램은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멕시코인들과 함께 1943년부터는 주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소속 이탈리아 및 독일군 포로 수천 명이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아칸소주의 들판에서 목화 괭이질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도 농업 경제는 낮은 노동 생산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히틀러의 독일이 완전 고용에 도달하자 저렴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다수확철이 되면 히틀러 유겐트(청소년단)를 대거 동원해야 했다기계화에 대한 논의가 많았지만 현대식 트랙터에 필요한 휘발유나 대형 타이어를 구입할 수 있는 외환이 충분하지 않았다그 결과 전략적 차원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농업 경제는 산업이나 독일군에 고용된 것보다 더 많은 1,100만 명 이상의 성인 노동자를 묶어 두었다3제국의 악명 높은 강제 노동 프로그램은 농업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44년까지 포로와 외국인 노동력은 독일 농업 노동력의 41%를 차지했는데이는 모든 부문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물론 독일이 정복한 것은 노동력만이 아니었다. 1939년부터 1942년 사이의 놀라운 승리 이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달리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이 아니라 유럽의 나머지 지역이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점이다독일군(베르마흐트)이 진격하면서 많은 가축과 곡물 저장고가 약탈되었다동유럽에서 독일군(베르마흐트)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점령 첫해에 후방에서는 혼란과 기아가 발생했다독일군이 통제권을 확립한 후그들은 대규모 구매 작업에 의존하는 보다 정교한 착취 시스템으로 전환했다이는 서유럽 농부들에게는 호황을 누리는 시장을 만들었다고도로 효율적인 네덜란드와 덴마크 생산자들은 제3제국이 버터에 대해 프리미엄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농장 수입이 급증했다. 독일군이 선호하는 농장 공급자들은 돈을 받았지만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인플레이션의 대가를 치렀다독일이 점령한 유럽의 도시 인구는 굶주림과 치솟는 암시장 가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평화가 찾아오자 덴마크와 네덜란드 당국은 화폐 개혁과 특별세를 통해 분배 균형을 회복하고 농부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에서도 유럽 농장 경제의 기본적인 제약은 봉쇄였다이로 인해 석유 및 산업 원자재와 함께 유럽 농부들이 열대 공급업체로부터 조달하던 고에너지 및 고단백 사료의 공급이 차단되었다그 결과 유럽 전역의 수확량이 감소했다영국은 추축국(Axis Powers,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이 맺은 군사동맹)의 식량 공급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공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1942년 처칠은 제국 화학 산업(Imperial Chemical Industries)에서 개발한 차세대 제초제를 독일의 들판에 뿌리기로 계획했다당시 영국 공군은 밀밭은 물론 독일의 도시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폭격기 편대를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는 거부되었다그러나 영미 양국의 연구 노력은 전속력으로 계속되었고 제초제는 1946년 일본을 최종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미국의 공중전 계획인 '다운폴 작전'의 주요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결과적으로 시골에 대한 대규모 제초제 공격의 선구자가 된 것은 영국이었다. 1952년부터 1960년 사이에 말라야에서 대대적인 농촌 반란군 소탕 작전을 벌이는 동안 영국군은 보안 경계를 허물고 '도적 작물'을 파괴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로 악명 높은 화학 물질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시골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이자 아이들을 위한 대피소였으며전체주의 박해를 피해 숨거나 '내부 이주'로 도망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1943년 이탈리아에서그리고 1944년 6월부터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에서 농촌 주민들은 유럽의 고전적인 전장의 들판울타리제방 위에서 벌어지는 현대 전쟁의 장관을 다시 한 번 목격하게 되었다전쟁의 마지막에는 화력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 결과 몬테 카시노 주변이나 노르망디에서와 같이 몇 주 동안 전투가 수렁에 빠지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는 최후의 방어 수단인 침수였다. 1943년 독일군은 로마 남쪽에 방어 벨트를 형성하기 위해 폰티네 습지에 홍수를 일으켜 말라리아의 재유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러한 절박한 조치가 없더라도 시골의 지형은 현대의 전쟁에서 빠르게 이동하는데 심각한 걸림돌이었다전차전에서는 기복이 심하고 텅 빈 사막이나 대초원이 이상적인 지형이었다반면유명한 보카주(Bocage, 울창하고 빽빽한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지형)로 알려진 노르망디의 울창한 울타리는 방어군에게 정적 방어를 위한 요새를 제공했다결국 수천 대의 탱크에 즉석에서 만든 울타리 절단 장비를 장착하여 프랑스 전선을 돌파해야 했다.

강철 보카주 커터를 장착한 미국제 셔먼 탱크가 수백 년 동안 프랑스 농민 노동의 유산을 부수는 모습은 2차 세계대전 양쪽의 서유럽 농업 경험을 특징짓는 데 적합한 이미지다기술 '따라잡기'는 전후 경제 성장을 정의하는 개념 중 하나였다전쟁 전 3만 대에 불과했던 서독의 트랙터는 1955년에는 46만 2,000대로 늘어났다.

출처 : Unsplash, Sean Stratton

III

물론 레벤스라움(Lebensraum, 독일어로 생존공간거주지)에 대한 유럽의 탐색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국주의 경쟁의 주요 축이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면그것은 농지가 아니라 이해관계 영역이나 산업 원자재 및 시장 통제와 같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국가가 조직한 대규모 정복토지 점령농업 식민지화 프로그램이 부활한 것은 1930년대의 눈에 띄는 시대착오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일본 제국주의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 등 가장 공격적이었던 세 강대국은 전쟁과 제국주의 정복을 국내 사회 질서 문제 해결과 연계하는 방식에 대해 전례 없이 노골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를 보였다.

아비시니아(Abyssinia, 현 에티오피아점령은 무솔리니의 가장 폭력적인 행위로, 생활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명백히 정당화되었다그러나 가장 지속적인 파시스트 식민지화 프로그램은 리비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1938년 10월 이탈로 발보(Italo Balbo) 주지사는 2만 명의 이탈리아 농민을 태우고 트리폴리로 향하는 16척의 함대를 직접 지휘하여 새로운 정착민 세대의 전위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 1940년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전할 무렵이 농민의 수는 두 배로 늘어 식민지 이탈리아 인구의 40%를 차지했다. 리비아에서 발보의 프로젝트와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정착 프로그램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다. 1931년 이후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대공황의 동시 발생은 외부 침략과 농업 개선 계획 사이에 새로운 융합을 만들어 냈다.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잉여 농업 인구를 수출하는 것이 목표였다이는 1936년 농민 100만 가구를 만주로 이주시키자는 '만주로 백만 명 이주계획에서 절정에 달했다일본에 좋은 땅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문가들은 기존 가족 농장의 31%는 생존할 수 없는 농장이라고 계산했다. 1940년대 초까지 거의 3분의 1에 달하는 일본인이 넉넉한 토지 할당 약속에 현혹되어 만주로 이주했다이는 추축국 중 가장 큰 규모의 정착 프로젝트였다.

이탈리아의 리비아 식민 지배와 일본의 만주 식민 지배는 모두 극도로 폭력적이고 '전쟁과 같은과정이었다발보의 식민지 개척은 리비아 베두인족에 대한 폭력적인 유화 캠페인으로 시작되었으며수만 명의 남성과 여성어린이를 사막 강제 수용소로 몰아넣어 가축과 함께 죽이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만주에서는 일본인 정착민들이 게릴라 전쟁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점령하게 되었다이주민들에게 할당된 땅은 중국 주민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빼앗은 것이었다.

북쪽의 일본인 농가들은 홍군의 위협을 받았다. 1939년 국경 전투에서 관동군이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후일본인 정착민들은 북쪽 측면을 강화하는 '인간 알약 상자(human pillboxes, 일종의 인간 방패)'로 지정되었다두 경우 모두 폭력과 정착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이탈리아와 일본의 프로젝트는 1930년대 초의 위기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1939년 이후 히틀러의 침략으로 촉발된 새로운 폭력의 벡터와 비스듬한 관계를 공유했다무솔리니는 아프리카 야망에 따른 막대한 비용을 만들기 위해 유럽의 주요 군비 경쟁에서 고군분투했다파시스트 폭력가로서 이탈로 발보의 실적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리비아 식민지화에 대한 그의 헌신은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전쟁에 동참하기로 한 결정에 반대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마찬가지로 일본의 만주 진출의 전략적 방향은 소련을 향해 북상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곧 분명해진 것은 이러한 진격의 축에서 일본은 수입 석유에 대한 의존이라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반면 1940년 이후 영국프랑스네덜란드가 독일군에게 굴욕을 당하면서 남쪽은 더욱 희망적인 전망을 갖게 되었다. 1941년 여름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확보하기로 한 일본의 운명적인 결정은 독일군의 소련 공격에 동참하지 않고 대신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기로 한 결정과 함께 일본의 만주 정착 프로젝트를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패권을 다투는 지역적 사이드 쇼로 축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히틀러 정권이 늦게 시작한 공개적인 침략이 이러한 기본적인 전략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이탈리아와 일본처럼 제3제국도 유라시아 정복과 정착에 대한 야망과 서구 열강에 대한 전 세계적인 해상 전쟁의 요구를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그러나 나치 독일을 차별화시킨 것은 식민지 정착 캠페인의 주요 추진력이 전쟁의 가장 치열한 군사적 격전지로 부상한 동부 전선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다이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1940-1941년 독일군이 동구 식민지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을 때그들은 이 거대한 인종청소 프로그램이 적군이 멸망한 후에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소련 게릴라 부대의 지속적인 저항은 미래 세대의 독일 개척자들을 위한 쇄신과 강화의 원천으로 환영받았다. 1941년 가을이 되자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졌다그러나 만주와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제국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의 흐름이 식민지 정착의 원래 축에서 멀어지게 만든 반면동부 전선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전쟁 중 가장 잔혹한 전투식민지 정복 프로그램유대인 학살잔혹한 수탈 정권과 폭력 반란이 모두 악몽 같은 소용돌이 속에 뒤섞여 있었다.

이 투쟁에서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농경지는 특히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독일 제국의 곡창지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홀로코스트의 가장 끔찍한 킬링필드 중 하나였다여기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과 1920년대 초 내전과 기근의 주요 전장이었던 곳이기도 하다또한 같은 이유로 스탈린이 농민들과 투쟁하는 가장 큰 무대가 되기도 했다우크라이나의 경험이 1928년부터 1945년까지 동유럽의 '피의 땅'을 휩쓸었던 거대한 인종 청소 및 농업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으로 여겨지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이러한 기록의 특징 중 하나는 희생자 집단이 수동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우크라이나의 주요 농경지였던 평평하고 숲이 없는 지역은 특히 어떤 종류의 저항도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소련군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잔(partisans)들은 공중 정찰기와 기동성이 뛰어난 기갑 부대에 쫓겨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벨라루스의 늪과 숲에서 독일군은 남은 '쿨락주민들 사이에서 반 스탈린주의 구호를 외쳤지만 끈질긴 저항에 부딪혔다파르티잔의 첫 간부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징집된 징집병 출신인 적군의 흩어진 요소에서 모집되었다후방 지역을 배회하던 그들은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외부인으로서 마을에 연고가 없는 이들이 독일군 전선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무엇보다도 그들은 농부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과 섞이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그러나 러시아 시골에서는 전쟁을 '거부'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바르바로사 공세에서 포로로 잡았던 러시아 포로 대부분이 굶어 죽은 후, 1942년 봄 독일군은 수백만 명의 동구권 남성과 여성을 공장 노동에 징집하기 시작했다적군은 전투 연령의 모든 남성 마을 주민에게 지역 저항 센터에 입대하라는 강제 명령을 내렸다그 결과 육군 중부 전선과 북부 전선 대부분에서 3년 동안 살인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독일군에 협력하는 사람은 누구든 파르티잔의 끔찍한 보복에 직면했다독일군이 철수할 때마다 숲에서 나타난 소련군 위원들은 스탈린 정권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독일군은 대량 처형과 수천 개의 마을 파괴로 저항 세력을 응징했다. 1943년 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파르티잔은 103,000명에서 181,000명으로 급증했다. 1944년 여름육군 그룹 센터의 최종 붕괴를 이끈 것은 파르티잔이었다독일군의 공격 3주년을 맞아 파르티잔들은 전쟁 중 최대 규모의 게릴라 작전을 벌였다. 1944년 6월 22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에 맞선 최초의 독일군 부대인 제3기갑군에게 공급되는 철로를 14,000발의 폭탄으로 단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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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부 전선에서의 파르티잔 운동이 상당했을지라도 그것은 적군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이는 동원된 농민군이 군사 작전의 보조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전쟁뿐만 아니라 전후 질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두 개의 전쟁 무대즉 유고슬라비아와 중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21세기 관객에게는 지금은 사라진 발칸 국가와 동아시아의 거인 중국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이 둘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하지만 20세기 초 반란의 역사에서는 의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5년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와 마오쩌둥(Mao Zedong)을 한꺼번에 언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공통점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사회 혁명의 발판으로 삼은 자율적인 농민 저항 운동의 지도자라는 점이다또한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 냉전 시대에 스탈린의 어색한 동맹이 되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중국과 유고슬라비아 사례를 비교하여 농민 민족주의를 정의하는 연구를 수행했는데이는 정치적이론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9년 이후 매카시 시대의 정신에 따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많은 분석은 마오의 승리를 "미국의 정치 및 군사적 실패소련의 제국 건설엘리트 음모"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반면찰머스 존슨의 말처럼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의 운동은 공산주의자가 주도하고 농민을 기반으로 한 애국적 저항 운동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더 쉽게 인식되었다.

유고슬라비아나 중국에서도 공산당은 농민의 동맹군이 아니었다중국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모두 스탈린주의 공산주의의 격언에 대한 노예적 준수를 요구하는 큰 목소리가 있었다공산주의자와 농민 사이의 새로운 동맹을 형성한 것은 전쟁의 저항 투쟁이었다. 더 보수적인 저항 세력은 점령군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하려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신뢰를 잃었다그 결과공산 게릴라들은 자신들이 국가 저항의 확실한 주도자라고 주장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모두 성공적인 게릴라전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협력했던 부유한 농민들을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토지 재분배와 집단화라는 급진적인 정책을 포기하는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중국에서는 비공산주의 민족주의 저항의 중요성이 재평가되고 있다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동원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의 부상은 훨씬 더 큰 결과를 가져왔지만티토와 유고슬라비아 당파가 달성한 동원 수준은 정말 대단했다. 1945년 마오쩌둥과 티토는 80만 명의 군대를 지휘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인구는 중국의 1/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 측에 기회를 준 것은 점령의 잔인함이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독일군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초토화 프로그램에 직면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처음에 세르비아 농민들은 자신들만의 농민 민족주의를 공식화한 체트니크(Chetnik, 세르비아 민족주의 저항군)로 뭉쳤다그러나 체트니크가 민족 간 갈등에 휘말리면서 지지가 약해졌다반면 공산주의자들은 국제주의를 내세워 이런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1942년 봄에 중요한 정책 변화가 없었다면 공산주의자들도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보스니아 동부 포카에서 열린 회의에서 당원들은 마지못해 즉각적인 혁명을 포기하기로 동의했다티토는 "농민은 가장 강한 자를 따른다"고 선언하며 농민들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43년 2월 공산당은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과 산업무역농업에 대한 자기 주도권의 완전한 가능성"을 존중한다고 발표했다토지 몰수는 1944년 협력자와 독일 민족으로 몰수를 제한하는 법에 따라 성문화되었다. 1945년 5월까지 1566천 헥타르를 처분했다.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확 지원과 수확물 보호에 초점을 맞춘 생산주의 의제를 채택했다. "점령군에게 곡식 한 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농민 당파의 승리는 25만 가구에 161만 헥타르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으로 절정에 달했다이를 통해 티토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과도한 권력에 맞서 자신을 주장하는 데 필요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8년 티토는 쿨락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코민테른에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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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중국 공산당 창시자들은 처음부터 농민을 동원할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1920년대 중반관동 남부에서 국민당 본거지에서 활동하면서 코민테른의 명령과 현장 상황에 따라 농민 혁명을 조직하게 되었다. 1927년 장개석의 공격, 1930년대 초 민족주의자들의 공격그리고 대장정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중국 북부의 외딴 곳에 새로운 기지를 세울 수 있었다지역 군벌과의 적대감민족주의 세력과의 불화일본의 반란 작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1945년까지 중국 북부와 중부에 19개의 기지를 세웠다이 중 가장 큰 기지는 인구 2,900만 명과 700만 헥타르의 땅을 가진 진지루위(晉冀魯豫, 산시-허베이-산둥-허난의 약칭)유럽 국가만큼 큰 규모였다.

전간기에 중국 경제가 개선되었는지에 대해 경제사학자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그러나 중국 농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인구는 너무 많았고 투자는 부족해서 중국의 뛰어난 농사 기술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군벌들의 약탈과 1930년대 초의 불황주기적인 가뭄과 홍수는 수백만 명을 극심한 빈곤과 빚으로 몰아넣었다게다가 공산당이 북부의 본거지로 삼은 옌안(延安) 지역은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

둘째중국의 농촌 빈곤은 정치적 문제로 이해되었다. 민족주의는 19세기 후반까지 도시와 시골 모두에서 존재했다그러나 1937년 일본의 본격적인 영토 침략 이후 민족주의 정서와 행동주의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특히 지금까지 현대 정치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중국 북부 농민들은 실존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중국의 모든 정치 세력공산당국민당협력주의 정부일본을 대신해 활동하는 위성 정권은 빈곤내부 무질서외부 위협이라는 중국의 삼중고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협력주의 정권은 나름의 안정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억압적인 폭력과 손을 떼는 행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자 일본과 그 동맹국들은 소위 '상호 보장 제도또는 파오차이아(마을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및 기타 저항 요소를 배제하는 집단적 책임을 지는 제도)에 기반한 효과적인 평화 지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44년 장쑤안후이산둥 사이의 부유한 농업 지역은 신중국 모델 지역으로 지정되었다그러나 이러한 모범 지역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강압과 협력유도의 균형은 매우 미묘했다중국 북부에서 일본인들은 '모두 죽이고모두 빼앗고모두 태운다'는 '삼광작전'에 너무 자주 의지했다.

민족주의 세력은 투쟁 없이 땅을 비우지 않았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현대식 군사 저항으로 일본에 맞선 대가를 치른 것은 국민당이었다그러나 그들은 현대식 전쟁에 필요한 정당성과 국내 지원이라는 인프라가 없었다그 결과 중국 농촌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1937년 명목상으로는 지대 감면과 토지 개혁을 약속했지만민족주의 전쟁 노력은 군벌주의의 폐해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징집대가 시골을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했고세금은 올라가고 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없었으며전쟁은 내륙으로 퍼져 더 많은 파괴를 불러왔다. 1938년 6월 8허난성에서는 후퇴하던 국민당이 황하의 제방을 폭파하여 최소 50만 명의 농민이 익사하고 500만 명이 집을 잃는 큰 인공 홍수를 일으켰다.

후퇴하는 민족주의자들과 날뛰는 일본인들이 남긴 황무지는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공간이었다훗날 그들은 스스로를 저항의 영웅으로 내세웠지만그들의 주요 전략은 실제로는 전쟁이 아니라 거점 지역평화 지역국가 건설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변혁에 대한 급진적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1930년대 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집단화 노선을 너무 빨리 밀어붙이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배웠다.

1935년 이후 공산당은 옌안 외 지역에서의 지배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소련식 집단농장은 물론이고 급진적인 토지 개혁을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마오쩌둥이 선호한 토지 개혁 방식은 부농을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을 내 재산을 재분배하고 평준화하는 것이었다그 결과 토지가 없는 농민을 통합하고 중농의 기반을 넓히는 효과가 있었다공산주의자들은 1937년 민족주의자들과 합의한 연합전선 노선을 따랐다그들은 임대료와 부채를 줄이고누진세와 최저임금을 우선시했다계급 갈등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더 급진적인 조치는 공산당이 확실히 통제하는 거점 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

소수의 안전한 거점에 기반을 둔 이 유연한 정책 시스템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의 거듭된 소탕 작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44년 일제는 버마로 통하는 육로를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중국 중부를 공격했지만그 결과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공산주의 확장의 문을 열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무렵 공산당은 중국 영토의 4분의 1과 인구의 3분의 1로 구성된 '해방구'를 장악했다이제 중국 농촌의 변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1919년 5월 4일 5·4 운동을 기념하여, 1946년 5월 4일에 공산당은 "토지를 경작자에게(land to the tiller)"라는 새로운 표어를 내걸었다.

1948년 9월에는 마오쩌둥조차도 지역 간부들의 열정을 억제하기 위해 개입해야 했다이데올로기 교정토지 재분배군사 동원이 함께 융합되었다. 2년 만에 160만 명의 농민이 홍군으로 유입되어 병력이 120만 명에서 280만 명으로 늘어났다서유럽에서는 연합군의 기계화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 농촌 때문에 좌절했지만중국에서는 농촌 자체가 국민당에 대항해 움직였다페어뱅크(Fairbank)와 골드먼(Goldman)은 이렇게 묘사한다: 1949년 난징 북쪽 화이하이 지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국민당 기갑 부대는 덩샤오핑 같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동원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파놓은 탱크 함정에 갇히게 되었다그러나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난 후에야 지주와 민족주의에 동정심이 깊었던 남부를 포함한 중국 전역에 공산주의 정책이 완전히 시행될 수 있었다. 1957년에는 한때 독립과 중앙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유명했던 세계 최대의 농민 국가인 1억 9천만 농가가 집단화된 공산주의 체제에 통합되었다.

VI

마오 정권은 집단화가 중국의 투자율을 3배로 끌어올리고 수십 년간의 경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그러나 1945년 이후 공산당은 토지 개혁 정책을 독점하지 못했다전간기의 발전 정체에 대한 해답으로 새로운 토지 정착은 전후 아시아의 자본주의 성공 사례인 일본에 의해 더 강력하게 추진되었다일본 농무성은 전쟁 중에 이미 200만 헥타르의 토지를 재분배할 계획을 준비했다. 1945년 미 점령 당국과 개혁적인 일본 사회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토지 개혁이 다시 의제로 떠올랐다. 1950년까지 정부는 일본 농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74만 2천 헥타르를 취득하여 양도했다. 일본과 대만에서도 토지 개혁은 투자를 촉진하고 성장률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일본의 놀라운 성장과 중국의 혁명적 변화는 아시아의 또 다른 위대한 농민 인구인 인도의 경험에 의문을 던졌다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사실은 간단해 보였다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수백만 명의 인도 농민이 민족주의 인도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에 가입하는 대규모 대중 운동에 동원되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8월 독립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서 토지 개혁이 국가적 우선 과제로 발표되었다인도에서는 주 정부 차원에서 분권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책임이 이양되었다그 결과 역사상 가장 야심찬 토지법 프로그램이라고 묘사한사실상 눈사태와도 같은 법령이 쏟아져 나왔다그리고 인도의 60만 개 마을의 환경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었다특히 자민다르(zamindar, 대지주) 소작농의 중간 계층이 폐지되면서 2천만 명의 농민 가구가 보다 안정적인 임차권을 확보하고 새로운 인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의 열기가 식어감에 따라 보다 냉정한 평가가 시작되었다수많은 토지 개혁 법안에도 불구하고 1970년 말까지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된 농지는 120만 에이커를 넘지 못했는데이는 인도 농경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독립을 가져왔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남아시아에서 사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문화였다미국의 사회과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는 인도의 보수적 안정이 카스트 제도와 힌두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그리고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혁명을 위한 문화적 조건이 중국과 매우 달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게다가 계급적 차이는 종종 종교적 노선을 따라 진행되었기 때문에 1930년대 시골의 이민국가의 효과는 공동체 간 긴장을 악화시키고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 인구의 대다수가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1919년, 1922, 1930년대 초그리고 1937년과 1942년 사이에 많은 인구가 영국 식민지 정책에 저항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신마르크스주의 낙살라이트(Naxalite) 운동이 서벵골에서 수십 개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식민지 이후 인도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이 재개되었다.

이렇게 부활한 급진주의에서 성장한 1980년대 이후 이른바 서발턴(Subaltern) 학파(하위계층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학술 운동)에 속한 역사가들은 인도의 독립 궤적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제시했다이들은 혁명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종교나 카스트가 아니라 민족주의 정치의 협소한 계급적 한계라고 주장했다. 의회의 민족주의 지도부나 무슬림 연맹은 농민 혁명의 완전한 힘을 발휘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문화주의적 해석과 하위 대안적 해석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두 해석 모두 전쟁의 영향을 무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이는 이 글에서 가장 우려하는 역사적 결합이다인도와 유고슬라비아중국을 비교해 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도에서 전쟁이 농민 사이의 동맹을 분열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전쟁이 인도에서 정치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과 달리 인도에서 대중적인 반제국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반전 운동이었다. 1936년 이후 몇 년 동안 소위 키산(Kisan) 운동에서 전례 없는 인도 농민들의 동원이 있었다. 1939년 그들은 전쟁에 강력하게 반대했다펀잡과 북부 지방에서 영국은 250만 명의 강력한 인도군을 위해 계속해서 병사를 모집했다농민 생산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그러나 인도 대다수는 처칠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 분명했다.

전쟁이 반영 세력을 결집하고 통합했다면전쟁은 그들을 분열시킬 수도 있었다. 1941년 6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인도의 정세가 바뀌었다. 1941년 말인도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로부터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힘을 보태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0년대부터 농민 동원을 옹호했던 좌파 운동가들은 민족주의 정서의 주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런던이 독립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영제국의 패배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자 1942년 8월 8일 간디는 "행동하거나 죽거나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인도철수운동(Quit India Movement,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촉발된 항의의 폭풍이 시골로 확산되면서 영국은 1857년 반란 이후 가장 극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942년 8월과 9월의 경찰 보고서는 마치 소련의 독일군 후방이나 중국 북부의 일본군에서 나온 것처럼 보도되었다. 208개의 경찰서, 332개의 기차역, 954개의 우체국이 공격을 받았다수천 개의 전신선이 끊겼다. 수만 자루의 소총이 의회 무장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영국군은 몇 주 동안 통제력을 잃었다벵골의 미드나푸르 지역과 마하르슈트라의 사타라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 중국 북부의 공산당 기지와 유사한 병행 행정부가 등장했다비하르 주에서는 자의식적으로 반나치 당파 운동을 모델로 삼은 아자드 다스타스(Azad Dastas)로 알려진 인도 게릴라 밴드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란을 지속했다.

영국은 대규모 무력으로 대응했다. 57개 대대가 동원되어 운동을 진압했다최소 1285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3125명이 부상을 입었다그러나 이것도 폭력을 진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8월 중순이 되자 총독은 공군에게 시위대 군중을 공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총 91,836명이 체포되었고 18,000명이 구금되었다인도는 계엄령의 숨막히는 탄압 속에서 '인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942년 12월 총독은 평소처럼 캘커타로 행차할 때 모든 철도 건널목에 경비병이 배치된 장갑 호송대를 타고 적진 지역을 통과하는 것처럼 행렬을 이끌었다벵골과 비하르 주에는 300만 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그들은 1943년 벵골 기근으로 인한 2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대부분 조용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숨막히는 언론 검열로도 영국의 정치적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전쟁이 끝나면 독립이 올 것이라는 데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분열은 1941년 여름까지 민족주의 운동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왼쪽으로 기울게 할 것으로 보였던 광범위한 급진적 동원을 방해했다유고슬라비아나 중국과는 달리인도에서는 전쟁을 통해 국민회의의 우파가 더 강력해졌다무슬림 연맹은 전술적으로 관망하는 전략을 선택했다전쟁의 결과로영국령 인도는 사회 혁명 대신 공산주의적인 분할을 준비하게 되었다.

출처 : Unsplash, shark ovski

VII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위기에서 등장한 농업 세계는 처음에는 대공황으로 국가 체제로그다음에는 냉전으로 이데올로기 진영으로 나뉘었다한쪽 세계에는 부유한 선진국들의 폐쇄적이고 안정된 농업 시스템이 있었다. 이 시스템들은 정치적으로 통합되고 기계화되어 모든 잉여 노동력이 도시로 빠져나갔고뚫을 수 없는 보호주의의 벽으로 세계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격리되었다두 번째 세계는 집단화된 사회주의 농업으로 유럽에서는 소련 국가의 강압적인 힘에아시아에서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그를 모방한 북한과 북베트남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마지막으로 전후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농민은 빈곤한 제3세계의 새로운 상징이자 혁명 및 반란 전쟁의 새로운 무대에서 전략적 행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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