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국가 간 자본 이동의 시대에 적용 가능성을 상실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착취, 불안정, 불평등의 글로벌 패턴과 여전히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점점 더 열악한 노동과 생존 조건에 직면해 있고, 세계 주요 경제 강대국들 간의 대립과 세계경제질서 재편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제적 대립과 투쟁의 본질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 또는 반제국주의를 넘어 친러시아, 친중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필요한 문제다.
지난 7월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Science and Society”를 통해 열렸고 논문집이 최근 발표됐다. 참세상은 이 논문집의 주요 글과 관련 주장을 모아 연재한다.
(1) '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윌리엄 로빈슨)
(2) 제국주의, 반제국주의, 초국적 계급 착취 (윌리엄 로빈슨)
(3) 누군가 사회주의를 언급했는가? (톰 브라스)
(4) 제국주의 체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로빈슨의 '마니교도' 라벨이 초래한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과 (스티브 엘너)
(6) 제국주의: 숲을 보려는 것을, 나무가 막지 못하게 하라 (훌리오 후아토)
(7) 초국적 자본가 계급 이론: 하나의 평가 (데이비드 라이브만)
(8) 21세기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준 쑤)
(9) 제국주의에 관하여: S&S 심포지엄에 대한 답변 (윌리엄 로빈슨)
(10) 민주주의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풀어내기 (이녜스 발데즈)
(11) 오늘날 제국주의적 충돌은 경제적 경쟁에 의해 주도된다 (코스타스 라파비차스)
(12) 양극화된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반식민주의, 새로운 아(亞)제국주의 그리고 국제주의(페데리코 푸엔테스, 케빈 앤더슨)
출처: Unsplash+ Ave Calva
서구 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의 부상은 제국주의적 타협이 무너지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다. 이는 그 타협을 복원하려는 은밀한 요구다. 부유한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를 통해 달성된 번영을 바탕으로, 자본과 노동의 동맹에 의해 가능해졌다. 탈식민지 질서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중독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지배, 착취, 수탈을 낳았다. 오늘날 인종차별적 포퓰리즘의 부상은 탈식민지 질서의 붕괴와 세계화된 자본주의를 통해 서구 대중들이 얻었던 분배적 협정에 대한 불만이다. 신자유주의의 몰락으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적 세계가 출현하려면, 서구 사회는 뿌리 깊은 제국주의적 관습을 정화하고 국내적인, 그리고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2021년 1월 6일, 폭도들이 조 바이든의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 확정 절차를 중단시키기 위해 미국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24년 3월 26일,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가 4,700개의 컨테이너와 21명의 인도와 스리랑카 출신 승무원을 태운 달리 화물선과 충돌해 붕괴했다. 다리에서 도로를 수리하던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출신의 도로 공사 노동자 5명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여러 승무원은 사고 이후 거의 3개월 동안 배에 갇혀 있었다. 이 사건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함께 생각해보면 현대의 불만과, 부유한 세계 시민들에게 극우 정치가 호소력을 갖는 현상의 핵심인 정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힐 수 있다.
2021년 1월 6일, 폭도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럼프가 그날 백악관에서 한 연설의 인종화된 수사에 격분했다. 이 연설은 여전히 강력한 “도둑질을 멈춰라(Stop the Steal)”라는 구호의 시작이었고, 애리조나와 조지아를 선거 부정이 의심되는 지역으로 지목하며, 이 지역들을 바이든에게 안겨준 라틴계와 흑인들의 적극적인 조직 활동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적대감은 이들 집단이 모든 미국인들의 삶을 매우 물질적인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공존한다. 이는 3월 26일 키 브리지 붕괴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났는데, 착취적인 환경에서 일하던 취약한 라틴계와 남아시아 노동자들이 비극적으로 엮이게 된 것이다. 초점이 항만 노동자들과 다리 복구의 시급성에 맞춰졌지만, 대안적 해석은 초과 착취당하는1 인종화된 노동이 우리의 집 앞에 배달물을 가져다주고 아침 출근길을 원활하게 만드는 인프라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1월 6일과 3월 26일의 사건들은 인종화된 집단들이 정치적 배제와 과도한 착취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는 우리를 지탱하기 위해 징집된 바로 그 주체를 폄하하는 '때리고 거두는(bash and reap)' 전략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글로벌 북반구(이주민으로서)와 글로벌 남반구(노동자로서)에서의 이들의 노동 및 생활 조건은 두 가지 요소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의 권리 박탈은 착취와 얽혀 있고,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이러한 결합된 특성들이 글로벌 북반구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불안정성이 부유한 세계에 도달하고 분쟁과 빈곤이 탈식민지 세계로부터 사람들을 밀어내는 가운데 극우파의 반이민 히스테리가 번성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20세기 동안 식민주의와 함께 공식적으로는 종식되었지만, 탈식민 질서는 글로벌 북반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핵심'이 글로벌 남반구의 신생 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주변'을 착취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했다. 인종화된 정치적 예속, 자원 수탈, 노동 착취의 이러한 역학 관계는 식민지 시대와 탈식민지 세계 질서 하에서 서구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부유한 세계의 노동자들이 누렸던 상대적 번영이 무너지면서 서구 민주주의의 사회적 불안은 부를 증식한 사람들이 아니라 탈식민지 거래에 따라 계속 종속되어야 했던 집단들을 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종말 이후 덜 불공정한 세상이 도래하려면, 민주 국가들은 정의를 위한 투쟁을 식민지 시대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체제에서처럼 타인의 예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종화된 타인들에 대한 착취와 비인간화에 맞서 싸우는 투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세기 서구 민주주의의 이면
서구 민주주의는 20세기 초중반 제국의 맥락 속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점진적인 참정권 확대를 통해 형성되었다. 내가 최근 출간한 책 ⟪민주주의와 제국(Democracy and Empire)⟫에서 주장했듯이, 백인 노동계급은 급진적인 반자본주의 요구를 포기하고 자본가들과 함께 제국의 전리품을 나누는 합의에 순응한 후에 참정권을 얻었다. 이 과정은 전후 황금기를 맞이한 복지 체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압력을 받은 국가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조직된 노동의 정치는 제국주의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정착민 식민지는 빈곤층과 실업자에게 탈출구를 제공했고, 대도시에서의 노동 불안을 방지했으며, 산업화되는 영국에서 극심한 빈곤을 벗어나려는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상향 이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 식민지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정착민이 되어 스스로 참정권을 요구했으며, 동시에 같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비백인 외국인들에게는 토지와 일자리 기회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시기 노동, 이동성, 이주에 관한 문제들은 영국 제국 관료제 차원에서 활발히 논의되었고, 궁극적으로 국가 기반의 이주 제도는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노동 통제 시스템을 흡수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주 시스템은 표면적으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외국인을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등급화된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주 통제는 백인 외국인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정치체에 통합하고, 그들의 자치권 요구를 실행하여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캐나다로의 비백인 중국인과 남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이 실패할 경우, 대중 운동은 이들을 법적으로 가장 고된 일자리로 할당하려 싸웠으며, 이는 편리하게도 그들을 착취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2 미국 내 논의도 유사한 경로를 따랐다. 중국인 제한은 멕시코 노동력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들의 "장점"은 주로 고된 농장 일에 대한 신체적 저항력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쉽게 멕시코로 돌아가거나 추방될 수 있다는 점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종적 등급화된 이주 체제는 노동을 통제하기 위해 작동했으며, 저렴하고 착취 가능한 노동력을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인종화된 이주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정착민 식민지에서 백인 이주민과 비백인 이주민 간의 노동 분업은 세계적 노동 분업에서도 그 대응 관계를 찾을 수 있는데, 인종화된 해외 노동자들은 산업화된 세계의 시민들과 기계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과 원자재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3 20세기 동안 이러한 이주 및 세계적 인종화된 노동 분업 체제는 발전했지만, 인종적 타인으로 지목된 집단들에게는 (남유럽과 동유럽 사람들이 더 유연하게 백인성(whiteness)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본질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서구에서 나타나는 인종화된 이주민들의 돌봄, 기계, 농업, 건설 노동에서의 과잉 대표성, 그리고 의류나 첨단 기술 공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수고에 기반한 현대의 착취적 수탈 경제 및 수출 지향적 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글로벌 남반구 국가들은 반식민 전쟁을 벌이며 반민주적 개발 모델의 강요에 저항했다. 이러한 모델은 결국 서구의 지원을 받은 권위주의 정권들에 의해 강요되었고, 평화와 안정화 프로그램에 열성적인 지역 엘리트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러한 억압의 역학은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정책 의제 하에서 구조 조정 정책에 의해 강화되었고, 신자유주의 또는 신개발주의적 민주 정권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제국이 이 '번영의 섬'을 위해 세계를 형성한 역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국내 노동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은 강압과 억압을 통해 획득한 자원의 약탈과 재분배를 수반했으며,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피지배 지역의 공동체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에서 민주주의 시민들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속되었다. 첫째는 자원을 추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소유욕적인 감정, 둘째는 자신들 간의 상호적 정치 관계였다. 이 두 가지 요인은 글로벌 남반구를 착취해 얻은 자본주의적 이익의 재분배를 의무화했으며, 이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글로벌 남반구와의 상호작용에서 규칙을 정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나는 이를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결정권(self-and-other-determination, 자결권(self-determination)과 구분되는)"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제국주의적 민주 정치 방식은 해외에서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베트남 전쟁과 같은 식민 전쟁, 우호적인 군대에 대한 무장 지원, 그리고 아르벤스나 아옌데와 같은 사회주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정권에 대한 쿠데타 지원 및 방해 행위 등을 통해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개입 방식은 사회적 갈등을 군사화함으로써 불안정을 초래했는데, 이는 대체로 사회적 항의와 진보적 요구를 억압해 국가를 투자에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억압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마약 소비와 거래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안보 문제로 다루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구 민주주의의 붕괴로서 제국주의적 거래의 붕괴
현재로 빠르게 넘어와서, 복지국가 해체와 알베나 아즈마노바가 ‘불안정성의 전염병’이라고 묘사한 현상을 고려해보자. 이는 "삶에 대한 사회적 위협에서 비롯된 취약성의 상태, 책임과 권력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경험"으로 이해된다. 제국주의적 거래가 무너지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그리고 마르크스가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에 대해 쓴 글에서 예견한 바와 같이-백인 노동계급이 제국과 자본주의에 종속된 것은 자본주의를 더 강화시켰고 역효과를 낳았다. 자본주의는 국내에서 이루어진 '민주적' 협약을 파기함으로써 반격했다. 동시에, 우리는 극우 세력에 의해 이주가 '위협'으로서 선정적으로 다루어지고 , 많은 국가들에서는 이 문제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점점 더 안보 문제로 전환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영유럽 세계로 도달한 이주민들은 빈곤, 폭력적 분쟁, 기후 변화로부터 실제 탈출하는 이들 중 극히 일부분이며, 유럽이나 미국의 국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들이 통과해야 하는 군사화된 경로에서 이미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본주의의 참화로부터 탈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참화는 자본주의와 백인 노동계급 간에 맺어진 거래의 또 다른 면이다. 글로벌 남반구에서 안정적으로 자원과 착취된 노동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과 천연자원의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인구를 통제하는 데 기꺼이 나서는 현지 군사 및 민간 엘리트들의 상당한 강압과 협력이 필요하다. 분쟁, 기후 변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개발 모델들은 사람들을 이주로 내몰았으며, 정보의 확산과 이동의 용이성으로 이주가 더 쉬워졌다. 대다수의 난민이 자국 내 또는 이웃 국가에 머무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영유럽 세계로 향하는 이들은 도착 후 존엄한 노동 조건에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주 통제의 군사화는 서류 미비 이주자나 망명 신청자들이 군사화된 장벽을 넘는 데 성공한 이후에도 취약성과 착취에 이상적인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취약한 지위와 착취의 연관성은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남서부 국경을 넘어온 미성년자들 중 동반자가 없는 아이들에서 발생한 미성년 노동 증가로 분명히 드러났다.
따라서 서구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두 기둥(자본과 노동이 제국주의 전리품을 나누며, 착취된 노동을 위해 징집된 인구를 통제하고 "평정"하여 안정적인 자본주의적 수탈을 보장하는 것)의 위기는 제국주의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당연히 불안과 아마도 위협감을 유발하며, 알베나 아즈마노바의 ⟪위태로운 자본주의(Capitalism on Edge)⟫가 이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이 불안이 제국주의적 거래의 붕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 거래를 복원하라는 요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서구의 소란스럽고 짜증내는 대중들은 불안정성에 대해 자본주의를 재고하라는 요구나 타인의 착취에 기반하지 않는 삶의 형태로 그들의 애착을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과 난민에게 그들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돌리며 반응했다는 것이다. 이주에 대한 가시성과 선정적 보도 방식은 이주민들이 '그들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인종화된 주체들은 명백히 승인된 이주노동자 프로그램이나 해외에서 착취된 노동과 같은 제국주의가 규정한 노동 이동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반역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규칙한 지위를 가진 감시된 인구에 대한 현대적 모델은 단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 계약 프로그램이나 전후 이주 노동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데이트는 다른 수단을 통해 착취 가능한 인구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대도시와 정착민 노동계급이 요구한 형태와 일치한다(예: 키 브리지에서 적절한 통신 수단이나 안전 보트 없이 일하던 도로 수리 노동자들처럼).
민주주의의 제국주의적 중독을 벗어던지기
이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서구 정치와 해방 모델이 여전히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중독되고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주를 주권 국가의 국경 통제 권한 문제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또한 도전한다. 대신, 현대의 이주 통제 기관들을 인종화된 노동 통제의 글로벌 체제와 기능적으로 동등한 것로 제시하며, 이제는 민주적 국민국가들이 이를 관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안된 민주주의와 이주 통제의 틀은 이주를 사회에 "발생하는" 문제로 간주하는 비역사적인 현대 해설에 의존하는 대신, 현대 극우 정치와 좌파의 대응을 역사적 관점에서 더 잘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유럽의 포퓰리스트 우파로의 전환을 반영한 글에서 "[미국을 포함해] 어떤 나라도 대규모 이주,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으로 인해 촉발된 공포, 그 공포가 아무리 근거가 없더라도, 이에 기쁘게 대처한 적이 없으며, 유럽인들도 더 잘하고 있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주가 시장 주도 세계화와 함께 발생하는 또 다른 "흐름"으로 제시되며, 이는 권위주의적 또는 우파 포퓰리즘적 반발을 촉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왜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현재와 같은 권위주의적, 극우적인 색채를 띠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며, 이는 이글에서 제안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설명만이 적절히 다룬다. 간단히 말하면, 이주는 이 위기의 핵심이다. 그 성장은 글로벌 남반구에서의 분쟁과 위기의 확산을 상징하는 징후이기 때문이다.4 이러한 위기들은 과도한 공동체와 자연의 착취로 인해 불안정해진 자본주의적 수탈 체제를 나타내는 지표들이다. 여기에 자국민조차 배제하는 자본가 엘리트들의 성장하는 이기심이 더해지며, 서구 민주주의 내 자본과 노동 간의 제국주의적 거래의 붕괴를 알리고, "질서 있는" 인종화된 복지를 그리워하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비백인 이주에 대한 인종차별적 반응이 점점 더 폭력적인 이주 제한 및 감시 체제를 부추기며, 인종화된 적대감과 폭력을 노동 통제와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반이민 제한은 인종적 적대감을 이용해 자본 축적의 기회를 만드는 제국주의적 인종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돌아온 것이며, 이번에는 (대부분) 서구 노동계급에게 복지적 의제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제안된 진단은 좌파 정당들이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적 사회주의로 돌아가는 것의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서류 미비 배우자에게 임시 체류 허가(parole)를 부여하는 조치를 통과시키기 전, 트럼프가 승인한 조치와 유사한 행정 명령을 시행했는데, 이는 특정 조건에 따라 국경에서 망명을 중단하는 조치였다.5 한편, 영국의 새 노동당 총리 키어 스타머는 "불법 이민"을 그의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영국 해협을 통해 이주를 돕는 갱단을 "테러 대책과 유사한 전략"으로 "분쇄하겠다"며 "더 이상 이민은 없다"는 공약을 내걸었다.6 이에 비해 프랑스의 신인민전선(New Popular Front)은 유럽과 프랑스의 망명 정책을 개정하고, 구조 기관을 설립하며, 망명 신청자들에게 일할 권리와 시민권을 확대하는 입법 계약을 제안하면서 환영할 만한 대조를 이룬다. 일할 권리를 허가하는 것 외에도, (환영할 만한) 인도주의적 조치들은 만약 그것이 단지 국내 대중들을 가장 가혹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그치고, 전 세계적인 자본 축적 과정을 해결하기 위한 더 결정적인 반자본주의 프로그램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불충분하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서구 좌파가 직면한 도전은 자국 내에서 점점 줄어드는 공적 자금을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폭력적인 글로벌 질서와 자본주의의 파괴성을 묵인하는 대신, 반자본주의 프로젝트로 돌아가 이를 세계화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서구 국가들의 좌파 정부는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을 동원해 기업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며, 이는 자본주의적 기업 주체들만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대안적인 좌파 정치란 서구 시민들의 이익을 이주민과 글로벌 남반구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부유한 엘리트들의 권력을 직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얻는 보편적 노동 정의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일자리 보장, 17달러 최저임금, 4일 근무제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보장하려는 훌륭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은 2% 부유세라는 상대적으로 소박한 제안처럼 글로벌해야 한다. 분쟁과 기회 부족으로 인한 이주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글로벌 남반구의 기회 부족이 (자본주의적) 설계에 의한 것임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의존 이론가들(dependency theorists)이 주장한 바이며, 수출 주도형 성장, 즉 저임금과 보호받지 못한 노동에 기반한 성장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바다. 의존 이론가들과 다른 비평가들이 제시하는 또 다른 교훈은 자본주의가 글로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7 만약 그렇다면, 글로벌 노동 분업에 도전하지 않는 좌파의 반자본주의 프로젝트는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에 미치지 못한다. 국내에 초점을 맞춘 좌파 프로젝트는 (국제 기구와 외교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글로벌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거나) 자본주의의 글로벌 영향력을 그대로 놔두어 자국에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이는 국내 중심의 반자본주의가 두 가지 의미에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그것은 해외에서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적 축적을 허용하고 자본가 엘리트들을 국내 행위자로서 강화시키며, 둘째, 인종화된 타인들의 지속적인 과도한 착취로 얻은 혜택을 누림으로써 자국민/노동자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파 정당들이 반이민 조치를 수용하는 것의 진정한 위험은 단지 그들이 이민 제한주의와 군사화라는 극우의 길로 접어들게 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진정으로 도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 국경을 군사화하고, 이주를 억압하기 위해 경유국을 매수하는 것이 더 저렴할 수 있지만, 송출국과 수용국의 조건이 모두 크게 개선되지 않는 한, 이주는 계속될 것이고 자본주의는 글로벌 및 국내 프로젝트로서 더 강력해질 것이다. 최근 논평가들은 이러한 현실에 직면했지만, 전 세계적인 임금 격차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역사적 부의 이전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이를 "지구상에서 가장 큰 차익 거래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으며, 이는 "안전한 디지털 신분"을 통해 관리되는 임시 이주 노동자 프로그램과 이 법적 틀 밖으로 임시 노동자를 이동시키는 기업들에 대한 처벌적 제재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폭력적으로 집행된 글로벌 노동 분업은 군사화된 국경과 인종적 적대감과 결합되어 차익 거래 기회를 만들어낸다! 서구의 인구학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제한적 노동 이동성"을 통해 저임금 노동 기회를 제공하면서 제국주의적 이익이 보호받도록 디지털 기술과 처벌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게다가, 이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불규칙하고 과도하게 감시된 이주 노동 시스템의 구조 그 자체를 구성한다.
요약하자면,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 운동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시민들이 비백인 주체들을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거나, 그들을 더욱더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부유한 국가의 민주주의 국민들이 자본주의가 인종화된 노동자들을 강하게 착취하는 데 눈을 감고, 제국주의적 전리품 중 더 큰 부분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충동은 좌파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좌파의 해방적 지향은 종종 국내 노동자들에만 국한되어, 이들의 불만이 자본주의가 해외에서 만들어내는 글로벌 문제들과는 별개라는 가정 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좌파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글로벌 문제로 재구성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의 확산을 목격하고 있는 지금,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 폭동과 3년 후 키 브리지 붕괴를 서구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제국주의적 지향의 증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라틴계 도로 노동자들과 남아시아 선원들이 볼티모어에서 폭력적으로 충돌하게 만든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역학을 직시해야 한다. 이 충돌은 인종화된 착취 노동이 서구 민주주의를 어떻게 암암리에 유지하는지를 드러냈다. 1월 6일 폭동에서 나타난 인종화된 집단에 대한 인종차별적 증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체에 대해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이는 인종화된 정치적 진보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백인 시민들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백인 시민들이 자본주의 프로젝트에 소규모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국내외의 인종화된 노동자들을 착취를 위한 취약한 대상으로 남겨두는 전통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이 증오의 현대적 재부상을 직면하면서 우리의 도전 과제는 이 전체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 이를 다시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주석]
[1] ⟪의존의 변증법(Dialectics of Dependency)⟫에서 루이 마우로 마리니는 초과 착취(super-exploitation)를 종속국에서의 전형적인 노동 방식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노동 방식은 노동 강도의 증가, 더 긴 노동 시간, 그리고 생계 수준 이하의 보상을 포함한다.
[2] 미국과 앵글로-정착민 식민지들은 비백인 이주민과 거주민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고 재산 소유를 금지하는 것 외에도,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멕시코인들을 최상위 직업에서 배제하는 앵글로 정착과 같은 비공식적인 방식이나, 캐나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처럼 명시적인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비백인들이 특정 직업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했다.
[3] 글로벌 남반구의 노동자들은 자국민과 외국인 모두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철도를 건설하고, 페루에서 질산염을 채굴하며, 카리브해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대체하기 위해 고용된 수백만 명의 계약 노동자들인 중국인과 남아시아인들이 그 예시다.
[4] 이주는 역사적으로 빈곤, 불안정, 그리고 사회적 불안의 잠재력을 해소하는 안전 밸브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그렇게 기능해 왔다. 이는 영국의 정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가 ⟪시드니로부터의 편지(A Letter from Sidney)⟫ (1829)에서 이민/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한 내용과도 같다.
[5] 구체적으로, 국경에서의 체포가 특정 주간에 하루 평균 2,500건에 도달하면 망명은 국경에서 중단된다. 이 중단은 체포 건수가 1,500건 이하로 떨어지고 2주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해제된다. 이 조치는 하원에서 기각된 상원의 실패한 법안보다 더 가혹했다.
[6] 그의 계획의 세부 사항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7] 로자 룩셈부르크, 올리버 콕스,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을 참고하라.
[출처] Undoing Empire’s Hold on Democracy: An Anti-Imperialist Path out of the Crisis
[번역] 류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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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녜스 발데즈(Inés Valdez)는 정치 이론가이자 존스홉킨스 대학교 정치학 부교수이다. 발데스의 최신 저서 ⟪민주주의와 제국: 노동, 자연, 그리고 자본주의의 재생산(Democracy and Empire: Labor, Nature, and the Reproduction of Capitalism)⟫(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는 서구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과 그 제국주의와의 얽힘을 이론화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