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철학자 이스트반 메자로스(István Mészáros)를 알게 된 것은 근년의 일이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헌책방에서 샀음이 분명한 그의 1970년 저작 『맑스의 소외 이론(Marx’s Theory of Alienation』이 서가에 아직도 꽂혀 있지만 내가 그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4〜5년밖에 되지 않는다. 메자로스는 헝가리 출신으로, 한국의 지식계에 널리 알려진 게오르크 루카치의 수제자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루카치의 후임 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소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 정국에서 신상의 위험을 느껴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겨우 책 몇 권만 챙긴 채 망명길로 올라 이후 이탈리아, 캐나다, 영국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영국의 에식스대학에서 20여 년 봉직한 뒤 퇴임했다.
메자로스는 교단에서 물러난 뒤에도 연구 활동을 왕성하게 벌인 것이 돋보인다. 아이작 도이처 상을 탄 『맑스의 소외 이론』도 중요하지만, 정년을 한 해에 펴낸 『자본을 넘어(Beyond Capital)』로 그의 이론적 업적은 더욱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론 작업은 계속되어 2017년 사망 시에 남긴 유고의 일부가 2022년에 『리바이어던을 넘어(Beyond Leviathan)』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말년의 메자로스가 진행한 작업을 출간해온 먼슬리 리뷰의 존 벨라미 포스터에 따르면 『리바이어던을 넘어(Beyond Leviathan)』 이후에도 후속 단행본으로 펴낼 원고 분량이 더 남아있다고 한다. 메자로스의 ‘넘어’ 연작은 내가 볼 때 인류를 절멸로 이끌고 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극복하고, 인류의 지구상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나 지금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 자연적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재생산을 새롭게 구축하려면 어떤 문제의식과 과제설정이 필요한지 알고자 하는 사람, 진정한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이다. 아직 완독하지는 않았으나 시간 날 때마다 읽으며 느낀 감상으로는 그렇다.
메자로스는 생전에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지도자 우고 차베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메자로스는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에서 추진한 사회주의 혁명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궁구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의 현실태를 발견했고, 차베스는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 체계도 넘고 국가 체계도 넘어야만 달성될 수 있다는 메자로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알려진다. 차베스는 2013년 59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고, 메자로스는 87세인 2017년에 뇌출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들이 추구하던 볼리바르 혁명 또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전통은 베네수엘라에서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추진되거나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나는 메자로스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와 어떤 식으로 넘어서야 할지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차베스가 사망한 뒤 베네수엘라는 미 제국주의의 교사를 받는 우파 세력의 끈질긴 훼방에도 불구하고 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아 21세기 사회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버스 기사에서 노조 지도자로, 또 정치인으로 성장해 차베스의 후계자가 된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가 2013년 4월에 치러진 대선에 당선해 지금까지 대통령을 지내고 있지만, 그동안 베네수엘라에서는 선거를 둘러싸고 우파의 방해 공작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7월 28일 마두로가 3선에 성공한 대선을 놓고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베네수엘라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선거 과정을 참관한 1,000명 남짓한 국제 선거감시단에 의해 별 탈 없이 공평하게 치러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선거 직후 우파 야당의 흑색선전이 시작되었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이 일제히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나서 베네수엘라 정국은 지금 매우 뒤숭숭하다.
사실 이런 일은 차베스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이길 때마다 계속 벌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98년 차베스의 대선 승리 이후 베네수엘라는 특히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는 우파 세력의 쿠데타 기도를 계속 겪어왔고, 차베스 사망 이후 마두로가 정권을 잡게 되는 2013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런 흐름은 중단되지 않는다. 특히 2018년에 마두로가 재선에 성공한 뒤 미국은 경제제재, 더 정확히는 일방적 강제 조치로 베네수엘라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내몰아, 베네수엘라가 이후에 사회적 안정을 되찾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가 베네수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2012〜18년 사이 유엔의 국제질서 독립전문가로 근무한 바 있는 알프레드 데 자야스 교수는 8월 30일 카운터펀치(CounterPunch)에 올린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베네수엘라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나라로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지니고 있고, 금과 다른 주요 광물이 풍부하다. 마두로 정부가 전복되면 미국 기업들에 경제적 기회가 열리게 된다. 베네수엘라의 사회 개혁은 모두 바로 폐지되고 차베스와 마두로의 역사는 지워질 것이다. 쿠데타는 사회적 권리의 후퇴를 낳고 미국에 의한 베네수엘라의 재-식민화로 이어질 것이다.” 데 자야스 교수는 베네수엘라의 선거 관리 상황을 현지에서 점검한 뒤 당시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보고서를 2018년에 낸 것 때문에 온갖 협박과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올해 선거 결과에 대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꼬투리를 잡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하는 것을 그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7월 28일의 대선 이후 국제사회의 여론은 대체로 미국과 그 영향권 아래 있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갈리고 있다. 비서방의 경우 아메리카에서는 쿠바, 볼리비아, 온두라스, 니카라과 등이 바로 마두로의 승리를 축하했고, 아메리카 외부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세르비아, 시리아 등이 베네수엘라의 선거관리위원회(CNE)의 마두로 승리 발표를 인정했다. 반면에 미국과 그에 종속된 다수의 나라는 마두로의 승리가 조작되었다는 우파 야당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세다. 최근에는 그동안 비서방 행보를 해온 콜롬비아와 브라질까지 미국 편을 들며 마두로에게 재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하고 나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실망하게 했다. 두 나라의 이상한 행보에 대해 베네수엘라 정부가 그냥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마두로는 베네수엘라는 독립 국가로서 독자적인 선거 관리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며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올해 대선 결과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쉬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은 8월 28일에 EU가 마두로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선 것으로도 확인된다.
우고 차베스가 집권한 뒤로 가동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또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은 계속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차베스와 마두로의 선거 승리를 놓고 우파 세력의 불인정과 저항, 그리고 미국의 우파 지원, 나아가서 베네수엘라 경제에 대한 일방적 강압 조치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를 구출해낸 것은 민중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4월 차베스를 축출하려던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을 몰아낸 것도 그들이었고, 2018년 연 13만%의 인플레 속에서도 마두로 정권을 지지한 것도 그들이었으며, 7월 28일의 선거 직후 우파 세력이 기도한 쿠데타를 막은 것도 그들이었다. 차베스의 집권 이후 차베스주의에 대한 인민대중의 지지는 그만큼 확고했던 셈이다.
차베스주의에 대한 지지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차베스주의가 실현하고자 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전형인,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이 실천한 국가사회주의, 오늘날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는 달리 사회 전반의 재생산과 관련한 주요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하려 한다. 메자로스에 따르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의 명령구조를 장악해온 국가를 소멸시키려는 보기 드문 현실적 시도다. 그동안 어떤 현실사회주의도 국가 소멸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면, 베네수엘라에서 시도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국가의 소멸’을 주장한 맑스 이래 레닌 등을 통해 이어져온 자본주의 생산양식 극복의 진정한 변혁 전통을 계승하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출처: 니콜라스 마두로 공식 X
8월 28일 피플스 디스패치(Peoples Dispatch)에 눈길 끄는 글이 하나 실렸었다. 대선이 있은 7월 28일부터 4주 뒤인 8월 25일에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언론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국내적으로는 대선 못지않게 중요한 선거가 치러졌다고 한다. 이날 선거에서 “4,500개 코뮌이 제2차 전국인민평의회(Second National Popular Consultation)를 통해 도로, 전기, 스포츠, 식수, 가스, 주거, 건강, 교육, 환경, 생산 단위, 공공 운수, 그 밖의 많은 다른 사회 개발 계획과 관련한 24,000개 프로젝트 가운데”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을 대상을 “뽑는 투표장에 나갔다.” 이 투표 과정에서 선정되는 프로젝트는 각 코뮌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결정한 것으로 그들 자신이 모든 의사 결정 과정의 주체인 셈이다. 이런 자치권을 발동하는 코뮌 단위가 베네수엘라에는 4,500개 이상 조직되어 있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 코뮌 체계가 존재함에 따라 베네수엘라에서는 수천여 사회 생산 단위가 전국에 걸쳐 지역별로 어떤 유형의 사회 프로젝트를 협력 속에 수행할 것인지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을 좌절시키기 위해 쿠데타와 선거 마타도어 등 엄청난 외압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차베스주의가 그에 맞서 버티고 있는 것은 베네수엘라 인민이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주요 사안에 대해 자율적으로 민주적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쌓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 미국 등 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은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를 근절하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실현하려는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은 그래서 필시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부터의 혁명을 직접 경험해온 인민대중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으로 믿고 싶다. 험난한 볼리바르 혁명의 길을 걷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여, 승리하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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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