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해법이 아니다

AI는 그 혜택만 공정하게 재분배하면 되는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다. AI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는 계급투쟁의 무기다. 따라서 AI를 국유화한다고 해서 이러한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와 관리자들은 AI를 숙련 노동을 탈숙련화하고 컴퓨터에 종속시키는 도구로 바라본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값싸고 빠른 결과물이다. 출처: 트럼프 페이스북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AI를 국유화하자고 주장한다. 더스틴 과스텔라(Dustin Guastella) 인공지능을 국유화해야 하는 이유’(The Case for Nationalizing 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샌더스의 제안을 옹호하며, 주요 AI 연구소의 지분 50%를 공공기금으로 이전하는 '절반의 국유화'를 제안한다. 이 글에 실린 사진에는 "AI는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AI must benefit workers)"라는 팻말 뒤에 선 버니 샌더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 구호는 모호한 만큼이나 AI의 정치경제를 위험할 정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샌더스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AI에 맞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왜 필요한지를 주장하려 한다.

인공지능은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위한 무기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은 소득과 권력을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전하는 기계다. 자본가와 투자자들이 컴퓨터가 '지식을 갖도록' 만드는 데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는 이유는 사람들이 지닌 지식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임금을 절감한 뒤, 그 절감분을 이윤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시장에서 가치 있는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임금을 받는다. 지식은 노동자에게 협상력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자본이 같은 지식을 더 저렴한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경영자와 관리자가 AI를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AI가 그 더 저렴한 대안이 되기를 기대한다. AI를 숙련 노동을 탈숙련 노동으로 바꾸고, 그 일을 컴퓨터에 종속시키는 장치로 보는 것이다.

자본이 꿈꾸는 것은 '대체 가능성'이다. 구겨진 지폐든 새 지폐든, 실물 화폐든 은행 장부의 숫자든, 돈은 서로 자유롭게 대체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자도 돈처럼 되었으면 한다. 누구든 서로 대체할 수 있고, 개인적 특성도 없으며, 마찰도 없는 존재 말이다. 기계의 소모품처럼 닳거나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부품 말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 지식에 대한 대가까지 요구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런 점을 주장해 왔고, 최근 <자코뱅>에 글을 쓴 케이티 하브르(Katy Habr)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AI는 좋은 일자리를 불안정한 일자리로 바꾸는 기계다. 안정적인 고용을 긱 노동(gig work)으로 전환하는 장치인 것이다. 디자이너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AI가 만들어낸 조잡한 결과물을 다듬는 일이 일상의 업무가 되고 있다. AI는 패스트패션의 논리를 모든 종류의 지식노동에 적용한다. 값싸고 빠른 결과물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대언어모델(LLM)을 하나의 생산수단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현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AI는 언어 생산을 산업화하려는 시도다. AI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대량 실업이 닥칠 것이라는 AI 업계의 홍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테일러주의를 떠올려야 한다. 자본은 지식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노동자를 측정하고, 업무를 잘게 분할함으로써 통제력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해 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협상력과 소득을 최대한 낮추려는 것이다.

테일러주의와 그 뒤를 이은 다양한 관리기법의 핵심은 노동과정에 관한 지식을 노동자에게서 관리자에게로 이전하는 데 있다. AI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본은 더 이상 인간 관리자의 머릿속에만 지식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이 가능해졌다고 판단하자, 자본은 자신의 논리를 더욱 밀어붙인다. 지식을 곧바로 고정자본, 즉 사적 소유의 자산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목적은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누구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의 협상력과 개인적·집단적으로 작업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AI는 위로부터 수행되는 계급투쟁의 무기다. 그 무기를 국가가 쥐든 기업이 쥐든,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AI 조합주의

더 큰 문제는 지금 논의되는 것이 사회화조차 아니라는 점이다. 샌더스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 국유화다. 지금 우리가 논쟁하는 질문은 "노동자가 AI를 통제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정부가 AI를 통제해야 하는가?"이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 정부가 사회주의적 이해관계에 특별히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더스틴 과스텔라는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가 모두 "AI 기업의 국유화를 요구했다"는 점을 초당적 공감대의 긍정적인 사례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심각한 전략적 오류라고 본다.

사회주의 정부 아래에서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게 하려면 AI를 노동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환하기 위한 명확한 비전과 계획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AI의 실제 기술적 특성을 고려하면, 그런 비전이 과연 실현 가능한지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판단으로는, 사회주의 정부가 아닌 어떤 정부 아래에서든 AI 국유화를 요구하는 것은, 잘해 봐야 AI를 칼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계급 공동의 이해를 관리하는 위원회"의 통제 아래 두자는 주장에 불과하다.

임금을 낮추는 장치가 국가가 (부분적으로) 소유한 기업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장치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임금을 억제하는 장치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생산하든, 의도와 무관하게 이미 임금 억제를 원하는 세력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한 이해관계가 시장에서 사기업을 통해 관철되든, 아니면 기업과 거액 정치자금의 영향력(시티즌 유나이티드 판결과 슈퍼 PAC 체제로 상징되는)을 받는 국가를 통해 관철되든, 본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샌더스의 제안은 미국의 대형 AI 기업 지분 50%를 편입한 미국 AI 국부펀드를 설립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이 펀드를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위원들로 구성된 '독립위원회'가 운영하도록 구상한다. 이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나 연방대법원과 대체로 비슷한 구조다. 연방준비제도법은 대통령이 위원을 임명할 때 "금융, 농업, 산업, 상업의 이해관계가 공정하게 대표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목록에서 빠져 있다. 마르크스가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 공동의 이해를 관리하는 위원회"라고 부른 이유를 떠올리게 한다.

설령 현 정부가 연방대법원이나 연방준비제도를 장악하려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기구의 통제권을 확보하려 들 것이라는 명백한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문제가 남는다.

샌더스와 과스텔라는 모두 노르웨이와 미국 알래스카의 국부펀드를 모델로 제시한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막대한 화석연료 개발 수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적어도 이윤 극대화보다 사회적 필요를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노르웨이와 알래스카 모델은 기후변화를 가속하고 지구 곳곳의 거주 가능성을 위협하는 바로 그 화석연료 산업을 기반으로 한다. 이런 사실은 국부펀드가 과연 사회주의적 목표를 실현하는 제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화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하여

우리가 주장했듯이 AI를 국유화한다고 해서 AI가 초래하는 노동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AI는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위한 무기다. 그렇다고 해서 과스텔라의 모든 주장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AI가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노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 블로그 글, 강화학습 데이터, 온라인 대화에 이르기까지, AI 모델은 우리 모두에게서 추출한 데이터를 학습해 만들어졌다. 과스텔라는 바로 이 사실이 AI에 대한 집단적 소유권을 주장할 도덕적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주장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과스텔라가 제안한 국유화 방안, AI를 미국 정부가 절반 소유하도록 하자는 계획은 그 자신의 도덕적 논리와 곧바로 충돌한다. 그의 논리를 따른다면 세계 각국에서 AI 학습 데이터를 분류하고 가공한 수많은 데이터 라벨러 역시 충분히 강한 도덕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국제주의적 정치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과스텔라가 AI에 대해 말한 것, AI가 노동자들의 노동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단적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자본 일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장에서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유형·무형의 부는 세계 노동계급의 노동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과스텔라의 도덕적 주장 자체가 아니다. 첫째, 그는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는다. 둘째, 그는 도덕적 정당성을 정치적 전략과 혼동한다. 자본과 이윤을 나누는 방식의 타협은 AI가 여전히 노동자를 겨누는 무기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비유적으로는 우리의 머리를 겨누고 있고, 어쩌면 문자 그대로 우리의 정신까지 겨누고 있는 무기 말이다.

국부펀드는 결국 AI 기업이 계속 이윤을 추구하도록 운영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전략적 의사결정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둔 채 허울뿐인 타협을 모색하기보다, 우리는 자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전략적 틈새를 찾아내고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

AI는 오히려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AI는 관리자와 노동자,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단순히 임금 수준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노동 자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AI를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뚜렷한 답이 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답이다. 자본주의는 비용 절감과 임금 억제를 위해, 노동자의 숙련을 해체하기 위해 AI를 요구한다. 노동과 노동자의 존엄이 훼손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번째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사회의 답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AI의 활용 여부도 노동자가 결정하며, 노동과 노동자의 존엄이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 된다.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한다면 이윤을 넘어 노동의 사회적 가치 자체를 논의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AI를 앞세워 모든 것을 패스트 패션처럼 값싸고, 질 낮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가 지금처럼 쉬웠던 때도 드물다. 우리는 이 기회를 활용해야지, 자본주의 AI라는 열차에 올라타서는 안 된다.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AI가 지금까지 비교적 보호받아 온 가장 특권적인 노동자들마저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대량생산의 논리를 이제까지 그 영향권 밖에 있던 전문직 노동에까지 확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리치료사를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적 AI가 만들어 낼 대량생산식 심리치료의 미래는 흔히 그려지는 장밋빛 완전자동화의 모습, 즉 챗봇이 대중에게 양질의 상담을 제공하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수십 개의 AI '에이전트'가 일해 줄 것이라는(혹은 그때그때 유행하는 다른 홍보 문구가 무엇이든) 미래는 훨씬 더 암울할 가능성이 크다. 한 명의 치료사가 수십 개의 AI 상담 창을 동시에 관리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내담자들은 언어모델과 대화하고, 전문가인 치료사는 여러 대화창을 훑어보며 위험 신호나 법적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이 없는지만 감시한다. 그렇게 제공되는 상담의 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비용은 매우 저렴할 것이다.

이러한 가상의 심리치료사와 같은 전문직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사회, 다시 말해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회주의적 생산이야말로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계급구성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도 열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노동과 삶, 그리고 지구를 황폐화하는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AI 기업들은 인프라와 기술 개발뿐 아니라 마케팅에도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오픈AI만 해도 2025년에 영업과 마케팅에 약 60억 달러를 지출했다. 이들은 AIAI 광고를 어디에나 밀어 넣고 있으며(안타깝게도 버니 샌더스조차 이러한 홍보를 현실로 착각하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저항과 반발도 확산되고 있다.

학교에서 AI를 배제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러다이트(Luddites)는 다시 주목받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AI가 성적 폭력과 성희롱을 자동화하는 현상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특히 일론 머스크의 그록이 대표적이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공연예술 종사자부터 AI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노동조합도 AI 활용 방식을 둘러싸고 투쟁을 벌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 역시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수많은 사회운동이 하나의 쟁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한 경우는 드물다. AI는 노동 문제다. AI는 여성주의의 문제다. AI는 환경 문제다. AI는 기후위기의 문제다. 그록이 스스로를 '메카 히틀러'라고 칭하며 백인우월주의 음모론을 퍼뜨리는 일에서부터, AI 데이터센터가 흑인 거주지역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AI는 인종차별에 맞서는 문제이자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문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이 모든 전선에서 함께 싸워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이러한 각각의 투쟁을 서로 연결하고,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저항을 하나의 연대로 묶어 거대 기술기업과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출처The Socialist Case Against Nationalizing AI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하겐 블릭스(Hagen Blix)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지과학자다. 잉게보르 글리머(Ingeborg Glimmer)는 독일에서 머신러닝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 노동자이자 산업 연구자다. 이들은 함께 『우리는 왜 AI를 두려워하는가(Why We Fear AI)』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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