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주] 미국의 민권 운동가이자 정치인 제시 잭슨이 2026년 2월 17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잭슨은 1984년과 1988년 대선 경선에서 흑인 후보로 돌풍을 일으키며 미국 정치 지형에 변화를 촉발했다. 그는 이른바 ‘무지개 연합’을 내세워 흑인과 히스패닉, 성소수자 등 소수자 정치 참여 확대에 기여했다.

제시 잭슨(Jesse Jackson)이 미국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는 흑인뿐 아니라 히스패닉, 성소수자 공동체까지 미국 정치의 문을 넓혔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나 같은 기성세대조차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잭슨이 1984년과 1988년에 대선에 출마했을 때 미국에는 흑인 주지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재건 시대 이후 흑인 주지사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흑인 상원의원도 없었다.
재건 시대 이후 상원에서 활동한 흑인은 매사추세츠에서 선출된 공화당 소속 에드워드 브룩(Edward Brooke) 한 명뿐이었다. 1992년 일리노이에서 캐럴 모슬리 브라운(Carol Mosley Braun)이 상원의원에 당선되자, 언론은 그가 상원에 진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그는 상원에 진출한 최초의 흑인 민주당원이기도 했다.
문제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흑인들은 거의 모든 분야의 상층부에서 배제되었다. 나는 1980년대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 다녔다. 그때 학교 전체에서 종신 재직권을 가진 흑인 교수는 단 두 명뿐이었다. 기업 사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잭슨의 선거운동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변화를 향한 흐름에 분명한 추진력을 보탰다. 그 시절 사람들은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잭슨은 그 질문을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버락 오바마는 20년 뒤 그 질문에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그는 상원에 진출한 두 번째 흑인 민주당원이었고, 결국 대통령에 올랐다. 오바마가 뛰어난 정치인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잭슨의 도전이 없었다면 오바마가 유력한 대선 주자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잭슨은 ‘무지개 연합’을 실제 정치 전략으로 추진했다. 그는 히스패닉, 아랍계와 무슬림 미국인, 성소수자 공동체에게도 정치의 문을 열었다. 공개적으로 성소수자임을 밝힌 연방의회 의원이 한 명도 없던 시절,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조차 공개적 성소수자와 거리를 두던 시절에, 잭슨은 분명히 환영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강력한 경제 메시지도 제시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부유층 감세와 사회복지 축소를 밀어붙이고, 무역 구조 변화가 산업 중서부를 황폐화하던 시기에, 잭슨은 빈곤층과 노동계급을 강화하자는 포퓰리즘 의제를 내세웠다. 그의 메시지는 민주당 주류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 많은 백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80년대 초중반 고평가된 달러로 큰 타격을 입은 농민들 역시 그의 주장에 공감했다.
일부 자칭 지식인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베이비붐 세대의 황금기로 묘사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실업률은 평균 7%를 넘었다. 중위임금은 1973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실제로 하락했다. 이 시기에는 부가 위로 집중되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손해를 보았다. 잭슨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1988년 미시간에서 잭슨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나는 그 경험을 지금도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가운데 하나로 기억한다. 잭슨은 초기 경선에서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미시간 경선에서는 여전히 진지한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선두 주자 마이클 두카키스(Michael Dukakis)와 노조 지지를 받은 딕 게파트(Dick Gephardt)의 대결로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잭슨은 두 사람을 여유 있게 이겼고, 주 전체에서 과반 득표를 기록했다.
내가 속한 앤아버 중심의 선거구에서는 당 지도부가 모두 두카키스를 지지했다. 잭슨 캠프는 판매원, 관리인, 그리고 나 같은 대학원생 등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실제로 다인종 연합을 이루었다.
우리는 조직력으로 당 관료들을 압도했다. 미시간은 예비선거가 아니라 코커스(미국 일부 주에서 실시하는 정당별 대의원 선출 방식)를 실시했다. 유권자들은 평소 투표하던 장소가 아니라 지정된 다른 장소로 가야 했다. 우리는 지지자들에게 자신들의 투표 장소를 표시한 지도를 제공했다.
또한 코커스에서는 선거 30일 전까지 등록해야 한다는 일반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각 투표 장소에 부등록 담당자를 배치해 현장에서 미등록 유권자를 등록시켰다.
우리는 선거 당일 활동가들을 조직해 집집마다 방문했다. 우리는 이동 수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투표소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반면 두카키스 측은 투표소 주변에 서서 배지를 달고 전단을 나눠주었다. 그러나 투표소에 온 사람들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날 밤 잭슨의 압승이 확실해지자 나는 한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까지 언론은 “제시 잭슨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식의 기사를 반복했다. 많은 이들이 흑인이 대통령에 도전한다는 사실 자체를 비현실적으로 여겼다.
나는 미시간 승리로 잭슨이 득표수와 대의원 수 모두에서 앞섰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이클 두카키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당은 두카키스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그는 후보 지명을 받았지만, 본선에서 조지 부시에게 크게 패했다. 그 패배 폭은 이후 선거들과 비교해도 매우 컸다.
지금 우리는 지난 40년간 쌓아 올린 성과가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다. 도널드 트럼프와 백인 우월주의 세력은 역사를 되돌리려 한다. 우리는 중대한 싸움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시 잭슨은 오늘의 미국을 만든 중요한 주역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부정하려는 변화의 흐름을 그는 앞에서 이끌었다. 그는 결점도 지닌 인물이었지만, 우리는 그가 미국을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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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베이커(Dean Baker)는 1999년에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를 공동 설립했다. 주택 및 거시경제, 지적 재산권, 사회보장, 메디케어, 유럽 노동 시장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화와 현대 경제의 규칙은 어떻게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가'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