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유도제 도입 및 접근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 현장. 참세상
‘모두의 안전한 임시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이하 ‘모임넷’)’가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약속한 유산유도제 도입과 접근권 보장,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 권리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촉구했다.
모임넷은 “2019년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아직도 제대로된 임신중지 관련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유산유도제조차 편견과 차별로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들은 최근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임신중지 법・제도 개선을 통한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만큼, 더는 지체없이 모두가 접근가능한 유산유도제 도입과 함께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 권리 실현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보건의료 체계를 마련하라고 마음을 모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서 활동하는 서은솔 약사. 참세상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서 활동하는 서은솔 약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임신중지 의약품의 안전성은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다”면서 “FDA(미국 식품의약)가 미페프리스톤의 시판 후 안전성을 검토한 결과, 누적 사용 약 750만 건 중 보고된 사망은 36건에 불과했다”고 소개하고, “이는 출산보다 훨씬 안전한 수치”라고 짚었다.
미페프리스톤은 ‘미프진’이라는 상표명으로 널리 알려진 경구용 임신중지약의 주된 성분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를 필수의약품 중 ‘핵심목록’으로 지정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해당 약품에 대한 접근권 보장을 권고하고 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약 90여개국에서 해당 성분의 임신중지약을 약국 등에서 구입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 현대약품이 지난 2021년 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에 임신중지약품 '미프지미소(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의 품목허가를 신청했으나, ‘식약처’는 “법률상 근거가 먼저 마련되어야”한다는 이유로 심사를 잠정 중단한 상태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에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법 제도 개선은 벌써 6년째 답보 상태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에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과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위한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도 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서은솔 약사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여성이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실질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결국 임신중지 의약품의 도입을 지연시키는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건강과 삶에 대한 기본적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유산유도제의 신속한 도입과 함께, “실질적 접근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신중지약품 도입이 실제 안전한 신중지의 권리로 이어지려면 “약물이 충분히 저렴해야 하며, 필요 이상의 의료기관 방문으로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낙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현실을 환기하며, “2021년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중지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는 한정적”이며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권리 보장을 위한’ 입법이 부재한 상황이기에 의료 지원 체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고 지적했다.
낙타 활동가는 “낙태죄 폐지 이후 정부의 불분명한 입장은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기존 관행을 유지”하도록 했고, 이에 “의료지원을 동행한 활동가는 ‘낙태죄 폐지로 의료진은 처벌받지 않는다’라며 의료기관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며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에 대한 가이드와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의료기관들은 여전히 ‘성폭력으로 신고하지 않아서’, ‘보호자나 파트너의 동의서가 없어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게 된다”고 짚고는, 정부가 유산유도제 도입을 비롯한 임신중지권 보장을 위한 의료 체계 마련에 하루빨리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정주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정주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돌봄이 필요한 장애여성의 몸은 성과 재생산권리를 박탈당하고, 장애여성이 시설과 주변인에 의해 불임시술을 강요받는 일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임신중지 비범죄화가 된 지 6년이 지났지만 이 뼈아픈 역사에 대한 성찰 없이, 지금까지도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임신중지 시술과 처방이 불가한 제도에 머물러”있어, 장애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적 접근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주희 활동가는 “장애여성들은 의료적 지원을 소통할 수 있는 의료진을 만나기 어렵거나, 의료기기가 몸에 맞지 않거나, 보호자의 의사 외에 당사자의 의사는 듣지 않는 등 차별에 놓이는 상황을 매순간 마주한다”면서 “모자보건법 제14조의 완전한 삭제”와 함께 “모든 사람이 성과 재생산권리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체계를 반드시 구축하라”고 소리 높였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임신중지수술의 합법적 ‘허용한계’를 규정해, 이미 폐지된 ‘낙태죄’의 사회적 효력을 연장하는 동시에,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를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조건 중 하나로 명시하는 한편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고도 정해, 장애인들이 성과 재생산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 7월에는 남인순 의원 외 11명의 국회의원이 모자보건법 제14조의 삭제와 함께 임신중지 약품 도입과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모자보건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다.
공혜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활동가(가운데). 참세상
공혜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활동가는 청소년과 이주민・난민들의 임신중지를 지원한 경험을 환기하면서 “임신중지 경험이 많은 여의사, 당일 수술, 당일 퇴원, 비밀상담이라고 광고하는 산부인과에 전화해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주수, 보호자 또는 파트너 동의와 동행 여부, 모자보건법 14조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비보험 금액을 안내한다”면서 “청소년의 경우, 법으로 정해지지도 않은 법정대리인의 신분증, 가족관계증명서 제출과 동행을 요구해 부모님에게 임신과 임신중지를 알릴 수 없는 청소년은 법정대리인의 동의와 동행 없이 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또 찾아나선다”고 이야기했다.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의 경우, 통역이 제공되지 않아 정보 안내가 어렵고, 전체 의료비를 비보험 금액으로 납부해야해서 비용 마련의 어려움을 겪는다”라며 “이들의 임신, 임신중지, 피임, 임신중지 후 건강 회복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거, 노동, 폭력 등의 개인적인 상황과 조건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공혜원 활동가는 그러면서 “임신 초기에 가장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수 있는 방법은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라는 것”이라며 도입이 이루어지더라도 “주수 제한, 산부인과에서만 처방, 비싼 약값, 건강보험 제외라는 조건”이라면 “또 다른 장벽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하고, “하루 빨리 유산유도제가 도입되고 임신중지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수 있도록 국가의 책임 있는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촉구한다”고 힘 주어 말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참세상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임신 중지 과정에서 “안전하지 않고 비싼 수술로 인해 건강도 잃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여성노동자들이 많다”면서 “임신중지는 다양한 이유로 결정되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경제사회적 이유로 임신중지를 하기 때문”이고 “2019년 낙태죄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보장체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명숙 활동가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1년 발표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임신중절수술비로 80만 원 이상 지출한 사람은 54.1%”에 이르고, “여성 노동자의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으로 대부분 최저임금만 받고 일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마디로 임신중지 수술을 받으려면 자기 월급의 절반 이상을 지출”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의 조건을 고려해서 보호하는 것이 국가와 기업의 책임이기에, (법적으로) 임신휴가 등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며 “출산만이 아니라 임신중지의 경우도 (유급)휴가를 보장해야 여성의 건강권이 보장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또한 여성이 아니어도 트랜스젠더, 간성 등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를 본인이 결정할 수 있도록 권리보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며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때까지 함께 실천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임신 중지 권리를 가로막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유산유도제 도입을 표현하는 퍼포먼스. 참세상
이날 참여자들은 이날 안전한 임신 중지 권리 실현을 가막아왔던 여러 장벽들을 유산유도제 도입으로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로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면서 “국정과제로 약속한 유산유도제, 하루 빨리 모두에게!”, “안전하고 제대로 된 임신 중지 지금 당장 보장하라”고 함께 외쳤다.
이날 사회를 맡은 플랫폼C 류민희 활동가는 기자회견을 맺으며 국정과제로 임신 중지 권리 보장을 명시한 이재명 정부가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부의 약속보다는 우리의 힘을 믿겠다”면서 “2019년 낙태죄를 폐지했던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싸워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한편, 오는 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이다. 이날은 1990년 9월 28일,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지역 여성들이 임신중지금지법에 폐지와 함께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안전하고 저렴한 의료 서비스 보장을 요구하며 행동에 나섰던 것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