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과잉(excesses)”을 교정함으로써 “안정화(stabilised)”될 수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자체의 존재에 대한 어떤 사회적 도전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비전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항상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어 왔다. 이 비전은 자본주의의 이른바 “과잉”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 자체를 초월하는 것뿐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교정된, 따라서 “안정화된” 자본주의라는 비전은 물론 여러 차례 허상(chimera)으로 드러났지만, 그 사실은 이런 비전이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이러한 “과잉”을, 불황기에 그 규모가 극도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시기에도 항상 자본주의 체제에 붙어 다니는 대규모 비자발적 실업으로 보았다. 케인스가 제시한 교정 방식은 국가가 개입해 시스템에 수요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스식 국가 개입을 통해 겉보기에 ‘교정되었다고 여겨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기는커녕, 다시 상당한 규모의 실업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고, 새로운 상황에서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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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맥락에서, 제3세계 사회들에서는 자본주의의 작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각한 대규모 빈곤을 야기하는 가운데, 이 상황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즉,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원으로부터 배제되는 현상을 체제 자체를 초월하지 않고도 막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 있으며, 그 방법은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 소액대출)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세계은행은 이러한 아이디어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세계은행의 관점에 따르면, 개별적으로 소외된 가구는 착취적이지 않은 조건에서 신용을 얻지 못해 스스로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할 수 있지만, 예컨대 자영업을 위한 소규모 사업체를 설립하기 위해 자조조직을 만들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집단을 통해서라면 기관 대출을 더 유리한 조건에서 받을 수 있었고, 소규모 지역 비즈니스를 운영함으로써 생활을 개선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세계은행의 비전에서 주목할 점은 국가가 자본주의의 자발적 경향을 억제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동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도의 경우, 은행 국유화를 통해 제도권 신용의 일부를 대기업 집단에서 농업 및 소규모 차입자들로 돌렸는데,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경향인 자본 집중 과정을 일부 되돌리는 개입이었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제시한 마이크로크레딧 비전은 어떤 국유화도, 어떤 형태의 국가 개입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이 비전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소액대출만 제공하면 빈곤과 실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상정했다. (물론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자발적 경향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은행의 논리는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케이크를 보존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즉, 자본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빈곤을 극복할 수 있고, 그것도 실업자나 불완전 고용 상태의 대중을 대규모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흡수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마이크로크레딧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경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기업 설립이 빈곤층을 돕는 데 성공한 사례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작동이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 케랄라(Kerala) 주의 쿠둠바스리(Kudumbashree) 실험이다. 케랄라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여성 협동조합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여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세계은행과 세계은행의 비전에 동조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험적 사실에도 무제한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마이크로크레딧에 기반한 소규모 기업들이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는 허상을 계속 믿고 전파했다.
그런데 최근 인도민주여성협회(AIDWA, All India Democratic Women’s Association)가 진행한 대규모 연구는 전혀 다른 현실을 드러냈다. 이 연구는 9,000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마이크로크레딧 경험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는 8월 23~24일 델리에서 열린 공개 청문회에서 다수의 증언과 함께 발표되었다.
첫째, 인도국가은행 같은 공공 부문 은행을 포함한 상업은행들이 담보 없이, 그리고 대출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문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여성 차입자들에게 직접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문서들을 확보하는 것은 잠재적 차입자들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소외된 가정의 여성들은 제도권 금융에서 사실상 완전히 배제되었다.
둘째, 상업은행들은 대신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비은행금융회사(NBFC)와 마이크로금융기관(MFI)에 대출을 해주고, 이들이 중개자로 기능했다. 이들 NBFC와 MFI는 은행에서 10% 미만의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최종 차입자에게 21~26%라는 고리로 빌려주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은행이 사실상 현대판 마을 고리대금업자인 이 기관들에 제공하는 대출이 우선부문대출(priority sector lending)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NBFC와 MFI들은 차입자들에게 요구되는 문서가 거의 없는 “대출 밀어내기” 방식을 사용했다. 주로 아드하르(Aadhaar, 인도의 신분증) 카드 같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문서만 요구했다. 하지만 대출이 실행된 이후에는, 이 기관들은 여성들에게 상환을 강요하며 끊임없는 괴롭힘을 가했고, 심지어 언어적 폭력과 신체적 학대까지 자행했다.
넷째, 여성들이 대출을 받는 주요 목적은 자녀 교육비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인한 의료비 충당이었는데, 이는 단기간에 소득을 증가시키지 않는 지출이었다. 따라서 상환이 갈수록 어려워졌고, 여기에 과도한 이자율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 결과, 차입자들은 기존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더 불리한 조건의 새로운 대출을 여러 출처에서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끝없는 채무의 악순환에 빠졌다. 결국, 원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대규모 빈곤의 해독제 역할을 할 것이라던 마이크로크레딧이, 오히려 여성들을 포함한 빈곤층을 더 깊은 빈곤으로 몰아넣는 도구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빈곤 완화 수단에서 빈곤 심화 수단으로의 전환은 바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 자체 때문에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작동은 빈곤 완화를 목적으로 설계된 도구를 빈곤 심화의 도구로 전도시키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작동한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거시경제적 결과다. 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교육, 의료 같은 서비스의 민영화와 그로 인한 상업화로 비용이 증가해 가계가 상환하기 어려운 차입을 하게 되는 경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실물 생산 부문 침체의 위기다. 생산 부문 침체는 고용 기회를 줄이고, 가계소득을 감소시키며, 결국 가계를 더 깊은 부채로 내몬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내재적 특성으로서의 빈곤화 경향을 상쇄하는 해독제 역할을 기대했던 마이크로크레딧 체계가, 거시적 수준에서 이러한 경향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 경향 속으로 포획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도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작동이 마이크로크레딧 체계를 전도시키는 두 번째 경로는 자본주의가 이 체계에 직접 침투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마이크로크레딧 체계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이윤을 낼 수 있는 여지가 보이면 어느 영역이든 진입한다. 그 결과, 원래는 소외된 가정의 여성 자조조직이 저렴한 조건에서 제도권 신용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체계가, 오히려 자본가들이 통제하는 NBFC와 MFI가 싼 제도권 자금을 대규모로 흡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취약 계층에 고리로 대출해 폭리를 취하는 구조로 변질된 것이다.
자본은 이윤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영역이라면 어디든 침투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것이 금융 고도화 영역이든, 군수산업이든, 소매유통업이든 상관없다. 따라서 자본이 원래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설계된 마이크로크레딧 영역에까지 침투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한쪽에서는 부를, 다른 한쪽에서는 빈곤을 창출하는 내재적 경향을 중단시킬 수 있고, 그런 방식으로 체제를 안정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또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마이크로크레딧 같은 장치를 고안해 이러한 내재적 경향의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허상이다. 이러한 모든 믿음을 허상으로 만드는 주체는 다름 아닌 자본 자체다.
[출처] The Chimera of a Stabilised Capitalism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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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