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살인자를 용서한 나라
결국 이리될 일이었다. 2025년 한국 사회에서 ‘수성전’이라니 어이없지만, 애당초 한국 사회는 그런 추태가 가능하도록 굴러왔던 거다. 남는 건 온 국민이 초긴장 상태에서 더 예민한 종자들이 돼 가는 길뿐인가.
이런 변고가 가능하게 했던 날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1997년 12월 20일 되겠다. 15대 대선(12월 18일) 당선자 김대중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함께 “이제는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라며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했다.
전두환이 1995년 12월 2일 검찰소환을 거부한 채 그 유명한 ‘골목길 성명’을 남기고 고향인 합천으로 도주했다가 이튿날 구속된 지 고작 2년 만이다. 1996년 8월 26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개월 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때로부터 기껏 8개월 만에 ‘용서’받았다.
사면은 ‘지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이고,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이다. 내란의 ‘우두머리’를 너그럽게 보아넘겨 준 순간, 작금의 이런 상황은 예고된 건지도 모른다.
5.17 계엄 확대 및 5.18 광주민중항쟁 유혈진압에 대한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의 엄중함은 겸연쩍어졌다. 범죄는 있었으나 처벌은 경미했고 종국에는 용서받았기에 이후 내란범들과 그 동조자들은 숫제 죄지은 적 없다는 식이다. 그 틈을 비집고 5.18 민중항쟁에 대한 왜곡과 조롱이 기승을 부렸다. 최근까지도 요사스러운 말을 퍼트리는 자들이 있으니 윤석열 정부 시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김광동,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황상무 등이 그들이다. 5.18은 폭도들에 의한 선전 선동이라며 희생자를 모욕하는 글에 ‘좋아요’를 누른 이진숙까지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등장했다.
한국전쟁 이후 정권은 약자들이 행동에 나설 때마다 “발본색원 일소척결” 운운하며 국민을 겁박했다. 가장 중한 죄인 내란죄조차 “엄단처리”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지배자들에게만 ‘용서’를 반복해 온 결과 내란도 사회적 참사도 반복되고 있다. 전두환 사면의 대가를 후세대가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재판장에 선 노태우와 전두환. 출처: 한내
법 위에 있는 ‘정치적 필요’
법치 파괴에 앞장선 검사 출신 대통령 덕분에 온 국민이 율사가 돼 가고 있다. 헌법부터 계엄법, 내란법, 헌법재판소법, 공수처법까지. 이걸로도 부족해 더 디테일한 법 지식이 필요하다. 체포영장, 구속영장, 적부심, 이의신청, 재항고, 권한쟁의심판 등등….
발보다 입이 빠른 자들이 공중파, 종편, 케이블방송, 유튜브까지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법조문을 읊조리고 해석한다. 그들은 어떤 주장을 하든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라고 말한다. 언제부터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했던가. 그 엄격한 ‘법’, 법을 집행하기 위한 ‘공권력’이 과연 만인에게 평등했던가.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원칙이 깨지는 광경을 지금, 이 순간에 온 국민이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 지배 세력이 몸소 시전 중이다. 지배 세력이 뱉은 말들은 법보다 무겁게 약자에게 닿아 서슬 퍼런 칼날이 됐고, 지금은 그들의 말이 법보다 단단한 방패가 되어 요새를 지킨다.
전두환은 1997년 12월 2일 골목길에서 “검찰의 태도는 더이상의 진상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짐짓 단호하게 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2년 만에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면됐다. 국민은 그의 사면을 절대 ‘필요’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2025년 윤석열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애국시민 여러분”에게 “국민 한 분 한 분이 주인인 자유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 더 힘을 냅시다”라고 편지를 띄웠다. ‘자신을 지지하는’ 애국시민에게 결집을 선동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에게 신변을 의탁했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돼 온 역사를 그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버티다 보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살아날 구멍도 있지 않겠나 희망도 품었을 게다. ‘전두환 사면’이라는 과거가 윤석열에게 용기를 주었을 게다.
지금 그는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는 눈앞의 적에만 몰두한 채 일신의 안위와 처벌 회피에만 급급하다. 그의 눈에는 광장을 지키는, 그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세력은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그들끼리의 다툼이든 타협이든 거기까지
율사들이 판치는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한 달이 넘도록 반란수괴를 처벌은커녕 체포조차 못 하고 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시민들이 계엄군보다 일찍 도착해 국회를 지켰다. 국회의원들이 의사당 안에 모일 수 있도록 엄호했고, 계엄 해제를 결의할 때까지 밖에서 계엄군의 총부리를 막아섰다. 사실상 비상계엄은 국회로 달려갔던, 또 전국 각지에서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가슴 졸였던 국민이 해제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그래서 내란 세력이 꿈꾸었던 제2, 제3의 계엄도 막아낸 것이다.
광장은 내란 세력 발본색원, 일소척결, 엄단처리를 염원하며 다른 세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런데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을 탄핵 소추했다며 의기양양한 제도권 안 자유주의 세력의 관심은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트려버렸는지 탄핵소추 이후 그들은 갈팡질팡 헛발질만 해댄다. 세간의 말대로 당장 눈앞에 조기 대선만 보이기 때문일까. ‘헌정사상 최초’ 사건이 날마다 쏟아지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나마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광장의 응원봉을 ‘민주당 응원봉’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번갈아 이 사회를 지배해 온 세력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권력다툼만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서로 다른 해석으로 ‘법’을 들먹이며 다투는 사이 한국 사회는 부서지고 있다. 물론 윤석열은 어떤 과정을 거치든 법대로 처리될 것이라 믿는다. 이미 온 국민이 범죄 과정을 생중계로 목도했고, 이후 확보된 증좌도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헌이냐 합헌이냐, 불법이냐 합법이냐로 윤석열을 잡아 가두고 파면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작금의 혼란은 해결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법은 엄중하나, 지금의 혼란이 과연 ‘법대로’ 하지 않아서인가.
문제는 그 이후가 아니겠는가. 일소척결은 우리 상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 이후 세상을 다지고 세우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거니와 그들에게만 맡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리당략으로 이합집산하고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변칙들이 난무하면, 결국 윤석열은 제2의 전두환으로 살아 돌아오고, 윤석열이 실패한 내란을 다시 시도할 제2, 제3의 윤석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저항의 들불이 역사를 끌고
이 시국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윤석열 일당이 일신의 안위에 집착해 보지 못하고 있는, 그러나 종국에는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될 세력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3일 국회 앞으로 모여들었던 이들, 12월 21일 트랙터를 몰고 남태령 고개를 넘은 이들, 이들을 맞이하려 새벽에 남태령으로 모여든 이들, 날마다 국회나 헌법재판소나 광화문 그리고 전국 각지 광장에 모여 발랄한 새 세상을 보여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정쟁에 눈멀어 말싸움 법싸움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온 국민이 그들을 보고 있다. 그렇게 온 국민은 그들과 서로 호응하며 새로운 희망 한 움큼씩 끌어모으고 있다.
1987년에도 저항의 들불은 전국에서 타올랐다. 6.29선언으로 개헌에 합의했지만, 그 주체는 정치권에 국한됐다. 노동자·민중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멈추지 않고 사회 민주화와 일터 민주화를 향해 계속 전진했다.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 현장을 바꾸어내고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굴곡진 역사를 곧게 펴고 뒤에서 떠받쳐 더 옳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왔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내란에 맞닥뜨렸다. 그래서 더더욱 윤석열 일당에 대한 처리는 전두환 일당에 대한 처리와 달라야 한다.
재일교포 소설가 김달수(1919~1997)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단문에서 “지금 나는 깊은 슬픔과 분노의 구렁에 빠져있다. 하기야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이 우리 것이기는 했지만”이라고 썼다. 어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한국전쟁 직후에도, 70여 년이 지난 2025년 오늘에도 슬픔과 분노뿐이겠는가. 슬픔과 분노가 우리 것이라면, 단죄도 미래도 우리 것이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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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는 오랜 노동운동의 길 위에 있는 활동가로서 현재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기획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