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Simon Joseph & Unsplash+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한 가지 패턴, 즉 자유주의적 중심의 붕괴와 좌파 또는 극우, 신파시스트에 대한 지지 증가에 부합한다. 좌파가 부재하거나 약한 상황에서는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에서도 드러났는데, 마크롱의 정당이 대폭 패배했고, 신파시즘의 부상이 겨우 형성된 좌파 연합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는 또한 스리랑카라는 우리의 인접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좌파 후보가 갑작스럽고 상당한 지지율 증가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며 자유주의적 중심에 속한 현직 대통령을 물리쳤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자유주의적 중심의 붕괴는 자유주의의 위기를 나타내며, 현대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 뿌리는 오늘날 정치적 자유주의가 경제적 신자유주의에 묶여 있으며, 신자유주의 자체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에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 철학은 자유주의적 정치 실천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신고전주의 경제학 모두를 아우르는 부르주아 경제 사상의 오랜 전통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두 흐름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자유로움의 미덕을 믿었으며, 국가의 간섭으로 인해 억제된 시장을 우선적으로 해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의 전반적인 공허함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났으며(전쟁의 경제적 뿌리는 시장의 미덕에 대한 모든 주장을 뒤집었다), 더 노골적으로는 대공황에서 드러났다. 케인스는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가 "잠깐의 흥분기"를 제외하면 체계적으로 대규모 노동자를 비자발적으로 실업 상태에 두며, 자유시장은 이상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결함이 많아 사회주의의 물결로 인해 자본주의가 전복될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자유주의자였고, 체제가 수정되지 않을 경우 사회주의적 위협이 커질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며,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라고 부른 새로운 버전의 자유주의를 제안했다.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특징이었던 국가 개입 회피 대신, 총수요를 촉진하고 높은 고용률을 달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국가 개입을 특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인스주의는 금융 자본에 의해 결코 수용되지 않았다. 케인스 본인은 이를 흥미롭게 여겼으며,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체계적인 국가 개입이 자본가들, 특히 케인스가 "무기능적 투자자(functionless investors)"라고 불렀던 금융 분야에 종사하는 자본가 집단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당성을 잃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은 지속적인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케인스주의는 전쟁 이후에야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는데, 이는 전쟁이 금융 자본을 약화시키고 케인스주의를 수용한 사회민주주의가 부상했기 때문이다.
전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호황은 금융 자본의 통합과 그 규모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이는 점차 국제적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전후 자본주의는 국가 개입으로 보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발생한 인플레이션 급등이라는 다른 유형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는 전후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두 가지 현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하나는 높은 고용률로 인해 노동 예비군이 축소되어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안정화 역할"을 상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식민화로 인해 제3세계 수요를 억압하여 1차 상품 가격을 낮게 유지하던 메커니즘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국제 금융 자본이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 체제를 무효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자유 시장의 미덕을 다시 전파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복원적 재등장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촉진하도록 했다. 새로운 상황에서는 "투자자의 신뢰 유지"(즉, 국제 금융 자본의 요구에 굴복하며 자본 유출을 방지하는 것)가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기 때문에, 케인스의 "새로운 자유주의"는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적 중심, 사회민주주의의 상당 부분, 심지어 좌파의 일부까지도 신자유주의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위기에 봉착하기 전에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제3세계의 노동자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겼으며, 위기에 봉착한 후에는 그 고통이 훨씬 더 커졌다. 세계 경제의 성장률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계획경제적(디리지즘, dirigisme) 시기와 비교해 상당히 둔화되었으며, 2008년 미국의 자산 가격 거품이 마지막으로 붕괴된 이후 더욱 둔화되었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소득 불평등의 대규모 증가로 인한 총수요 부족(이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 경향을 초래함)의 결과로, 미국의 자산 가격 거품이 부의 효과를 통해 세계 총수요를 유지시켰던 것이 터지면서 표면화되었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 틀 안에서는 극복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적 수요 관리를 할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거품이 이 위기의 강도를 다소 완화할 수 있더라도, 이전 거품의 경험 때문에 사람들이 더 신중해지면서 그런 거품이 불가능해졌다. 사실, 새로운 거품을 자극하려는 통화 정책은 정체된 수요 속에서도 더 높은 이윤 마진을 통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데 그치며, 이는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간단히 말해, 현대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헌신하고 있는 만큼, 국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는 당연히 국민들이 자유주의를 외면하고 우파와 좌파의 다른 정치 세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다. 우파 역시 국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의 선거 전 수사는 언제나 선거 후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불일치한다. 이는 이탈리아의 멜로니가 보여준 바이며, 프랑스 마린 르펜의 총리 후보였던 조르당 바르델라가 선거 이전부터 국제 금융 자본에 대한 당의 입장을 변화시키며 보여준 바와 같다. 하지만 우파는 위기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든 활동성을 보여주려는 듯, 보통 소수 종교나 민족 집단, 또는 이민자와 같은 "타자(the other)"에 대한 수사를 선동한다. 반면 자유주의적 중심은 위기의 존재조차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점 자본은 위기에 직면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우파나 신파시스트로 지지를 이동하며, 이는 자유주의적 중심의 약화와 자유주의 위기의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트럼프는 멜로니처럼 단순히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관행을 따르고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으로부터의 수입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보호하려는 경제적 의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 트럼프는 자유무역에서 보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국제 금융 자본의 국경 간 자유로운 이동에 제한을 가하겠다고 언급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핵심은 그의 선거 전 수사에서도 여전히 도전받지 않고 있다. 둘째, 보호주의는 트럼프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게다가 보호주의만으로는 미국 경제를 부활시킬 수 없다. 보호주의는 기껏해야 경쟁 경제로부터의 수입을 줄이는 대가로 국내 생산을 장려할 수 있을 뿐이며, 국내 시장 규모를 확대하려면 재정 적자나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한 국가 지출 확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지난 임기 동안 드러난 기업 감세 선호를 보면, 그는 국가 지출 확대에 나서지 않을 것이므로, 보호주의로 인한 일시적인 반등 이후 미국 경제는 정체와 위기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트럼프의 승리는 예상된 결과였으며, 이는 자유주의적 중심의 붕괴라는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과 부합한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의 경제적 의제, 즉 더 큰 보호주의를 도입하면서도 (값싼 수입품 부재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일시적인 일자리 증가 외에는 신자유주의 기본 원칙을 고수하는 그의 행보를 국민들이 꿰뚫어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국제적 맥락은 좌파의 부상에 유리하다. 오직 좌파만이 신자유주의를 종식시켜 현재의 위기를 끝낼 수 있으며,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자유주의적 중심에 있으며, 이는 이후에 논의될 문제다.) 그러나 좌파는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번역] 류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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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