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체제 전환 운동을 한다고?

"인구(人口)1)가 아니라 사람이다지역은 사라지지 않고 파괴당하고 있다."

지역과 인구 통치

인구는 입 벌린 사람을 표상한다. ‘사람의 입으로 사람 수를 세는 정치 질서는 인민을 가축화(家畜化)한다통치자는 입 벌린 인민들의 목구멍을 보며 누구를 먹일지 고민한다어떤 가축은 늘리고어떤 가축은 죽이거나내쫓을지도 통치자에게 속한 과제다인구 통치 하에는 인민이 다스리도록 하자는 민주주의(democracy)가 만들어지기 보다는 인민을 탈정치화하고 인민의 머릿수를 관리하는 전체주의가 작동할 공산이 더 크다.

지난 6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하면서 스파르타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스파르타는 익히 알려졌듯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가 몰락한 대표적인 군국주의 도시 국가다스파르타의 패망은 단순히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두정 하에 노예 계급(헤일로타이)에 대한 착취와 학살불안해진 경제와 정치 체제그리고 정복 전쟁이 잦았던 당시 지정학적 조건 등 대외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그리고 우리는 인구 통치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2024년을 지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무색하게도 지역은 탈정치화된 공간으로서인구 통치가 발현되는 주된 장소 단위가 되고 있다지역은 늘 인구가 문제였고인구 수는 어떤 인민과 공동체의 삶의 문제보다 우선시되어오고 있다. 2030년 음성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음성군 조병옥 군수의 군정 방향은 행정안전부로부터 시 승격을 승인 받기 위한 처절한 인구 유입 경쟁으로 귀결되고 있고인근 진천군을 비롯한 지자체들 사정 역시 다르지 않다일자리와 주택을 늘려도 인구 감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음성군은 최근 대학교에 재학 중인 관내 대학생이 음성군에 주소를 유지하면 2년에 걸쳐 100만원을 지원하는 등 전입 지원금을 전방위적으로 대폭 확대하겠다고 나서고 있다한 지자체의 인구 증가가 다른 지자체의 인구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제로썸 게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게임인가?

지역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당하고 있는 중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근대 민주화를 향한 인민의 항쟁이 모두 지역을 기반으로 봉기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지역의 허약한 정치적 현실은 사뭇 이해가 되지 않는다하지만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경제 권력과 은밀하게 결탁해온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민주주의의 뿌리가 말라갔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신자유주의 질서가 국경의 문턱과 장벽을 부수며 각국의 정치․경제 질서에 물리력을 행사했던 현장은 다름 아닌 지역과 마을 공동체였다프랑스의 지성인 자끄 엘륄의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유명한 격언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으로 구상하고 지역적으로 파괴하면서 전 지구적 착취 구조를 강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권력의 통치 양식과 조응한다.

지역의 정치적 현실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지역은 인구 통치에 동원되는 단위이기도 하지만신자유주의 질서에서 권력을 획득한 기업 단체들과 중앙․지방 정부가 동맹을 맺고 자신들의 경제 계획을 실현하는 미개척지이기도 하다엘리트 기술 관료와 자본 권력이 지역의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지역 공간을 분할하고 재구성한다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아프리카 대륙에 직선을 그으며 영토를 분할했던 것처럼 지방 정부는 기업들의 생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 지도를 펼쳐놓고 직선을 긋는다미개척지의 선주민들은 마을을 잃고네모 반듯한 산업단지에 입주한 공장의 노동력으로 반강제적으로 징발된다이때 지방정부는 산단 건설과 기업 유치 덕분에 몇 개의 일자리 창출이 기대되는지 공보를 통해 선전한다건설 중장비가 밀고 지나간 마을의 이름과 이야기는 역사가 되지 못한 채 유실된다지역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당하고 있는 중이다.

음성군도 마찬가지다. 6백 여 개의 자연 부락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농촌지역이었던 음성군에는 어느덧 26개가 넘는 농공․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현재 조성 중에 있다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들어선 성본산업단지 건설을 막기 위해 농사밖에 모르던 농민들이 1인 시위천막 시위서울 상경 시위를 하고 혈서를 쓰는 등 수단과 방법장소를 가리지 않고 6년이 넘게 싸웠다하지만 충청북도는 성본산단 개발사업의 준공을 인가했고주민들의 삶이나 마찬가지인 마을과 농지는 강제 수용되었다안타깝게도 이들의 치열했던 싸움은 잊혀지고 있다.2)

지역 정치라는 빼앗긴 상상력

음성군비영리단체협의회에서 지난 6월에 개최한 음성군의회 모니터링 시민 참가단’ 필수 교육에서 '지방자치법'상 주민의 권리에 대해 들을 때 충격적이었던 것은주민의 권리가 약소해서가 아니라 주민의 권리가 무엇인지 그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던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지방자치법 제17조는 주민이 주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의 결정 및 집행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고 정하고 있고주민은 소속 지자체의 재산과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와 그 지자체로부터 균등하게 행정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도 정하고 있다하지만 성본산단 건설로부터 자신의 생계와 공동체를 지키고자했던 주민들에게는 무용한 법적 권리였다.

성본산단 건설의 사례에서 지방정부 정책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주민의 권리는 개발을 용인하는 법률과 음성군 집행부의 행정음성군의회 의원들이 개발업자들과 이룬 동맹에 의해 분쇄되었다먼저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은 산업단지 조성 시 토지 소유자들이 매매를 원하지 않더라도 사업 시행자가 토지를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법이 이 모양이어도 군의원들이 관련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사업 추진은 불가했다하지만 8명의 군의원 중 5명이 산단 조성사업 추진을 위한 특수목적법인 출자 및 매입확약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통과되었다찬성표를 던진 손달섭 전 의원과 김순옥 전 의원은 임기를 마치고 곧바로 성본산단 대표이사와 감사로 각각 취업하였다각종 인허가 등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퇴임 후에 산업단지 관리소장으로 재취업하고 있는 관행도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 되겠다.

이처럼 지배 동맹은 제도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며 지역 사회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지역 주민들이 정당을 만들어 정치 결사체를 만들고 집단적인 정치 행위를 펼치는 것은 원천 차단되어 있다현행 '정당법'은 수도에 중앙당을 두고 5개 이상 시·도당을 갖추지 못할 경우 정당설립이 불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지역 정치가 수도권 중심의 정치에 종속되어 있는 현행 제도에서 지방 자치는 요원하고 지역에서 인민의 권력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하나에 지역에 있어서 종업하는 동종의 노동자 3분의 2이상이 하나의 단체협약을 적용받게 되면 해당 지역 다른 동종의 노동자들에 대하여도 단체협약을 적용할 수 있다는 지역적 구속력을 보장하고 있지만지역 노동자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공단과 지역 차원의 단체협약을 맺는 방식 역시 멀게 느껴진다.

지역의 눈높이에서 체제 전환 운동을 상상한다

부정의하고 파괴적인 현 체제의 모순은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있지만 현실에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하지만 체제 말단에 있는 지역과 노동 현장의 층위에서 관찰하면 비로소 손에 잡힐 수 있는 실체가 언뜻 보인다이 글 작업은 지난 3월 23일에 있었던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따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대회에 참석한 우리는 체제전환운동의 주체가 되어 서로를 조직하자고 했다서로를 조직한다는 것은각자 위치한 삶의 자리에어쩌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현장을 체제의 문제로서 설명하고그 세계에 동료이웃을 초대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그 현장들을 지역의 관점에서 하나씩 조명해보고자 한다.

출처: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

내가 음성에 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성본리 주민들의 싸움은 체제 모순에 맞선 투쟁이었지만주민들은 고립된 채로 6년을 싸울 수밖에 없었다나는 산단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을 위해 활동했지만노동자들의 일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폭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질 않았다체제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더 다양한 지역 사회의 문제들이 지역 주민노동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로 촘촘하게 연결되고 확장될 것이다산단 건설 투쟁이 있었던 성본리와 LNG발전소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평곡리 주민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를 상상해본다평곡리 주민과 여전히 송전탑 건설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경남 밀양의 고정마을 주민의 만남도충남 태안에서경남 하동에서 석탄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만나 각자 처한 어려운 고비들을 나눌 수 있다면 다른 차원의 공동의 싸움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5월 사상 첫 정의로운 전환 파업을 시도했던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의 파업 첫 날하동영흥영월부산인천당진에서 일하고 있는 조합원들과 다양한 지역과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후정의 활동가들이 한 데 모였다각 조별 토론으로 진행된 간담회는 체제의 고리를 따라 우리의 동맹도 구축될 수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그날 같은 조로 만난 10명의 조합원활동가들은 모두 파괴되어 가는 지역의 주민이었고불안과 공포 속에서 내일을 걱정하는 노동자이고 누군가의 반려자가족이었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들이었지만 가로질러 만날수록 우리는 입체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서로 연대하고 동맹을 맺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6월 25발전HPS지부는 지부의 다섯 가지 핵심 요구안 중 3가지를 관철시킨 단체협약에 최종 합의했다발전소 폐쇄 등으로 인하여 조합원 신분에 변동이 있을 경우 노사 합동으로 고용보장협의체를 구성하여 논의하고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적극 노력한다는 내용이 합의 내용에 포함되었다모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이 소식을 텔레그램을 통해 전해 듣는데 간담회 때 만났던 조합원들의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올랐다체제 전환은 우리의 몸을 담고 있는 사업장과 지역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정치적인 변혁의 공간으로 만드는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인구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쟁취하는 인민이 되자. 


1) ‘인구 관리 통치의 정치사적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치 비판에 관하여서는 「오늘의 교육」 (교육공동체 벗) 63호에 실린 정치학자 채효정의 인구, 정치, 교육편을 읽기를 권한다.

2) 성본산단 건설 과정의 문제점과 주민의 투쟁에 관하여서는 뉴스타파, “음성군 산업단지 '복마전'...주민은 땅잃고 인허가 관계자는 재취업”(2023.2.28.)을 참고하였다.

덧붙이는 말

박윤준은 삶과 노동을 잇는 배움터 이짓 운영위원이고 음성노동인권센터 상담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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