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자칫 놓치기 쉬운 좋은 영화들을 소개하고,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연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퍼펙트 데이즈 스틸 사진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과연 무엇을 놓친 걸까? 감식안이 변해버린 건가? 그도 그럴 것이 국내 매체 대부분에서 수줍은 사랑을 고백하듯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상찬 일색의 리뷰를 연일 쏟아내고, 예술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현재 관객 8만 이상을 동원하며 극장가의 화제작으로 호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을 넘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대동소이하다.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데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이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뿐더러 국내외 SNS에는 앞다투어 영화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음미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대한 찬사의 비평이 쏟아지고 6, 70년대 팝에 대한 중장년의 향수가 흘러넘친다.
간만에 나온 거장의 신작을 향한 감탄의 행렬에서 혼자만 열외가 되었나 괜스레 주춤거리게 된다. 정말로 뭔가 놓친 걸까. 왜 이 영화에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는지 거듭 장면들을 반추하고 시퀀스를 더듬어봐도 마찬가지다. 단지 <퍼펙트 데이즈>가 일본 극우 재단의 지원작이기 때문에 이런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닐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잠시 그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관객이 코모레비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매력적인 OST에 마음을 뺏겨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이는데, 이 영화는 극우 재단의 기획하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크레딧에서 빔 밴더스가 특별히 감사를 표한 재단이 바로 '일본 재단 The Nippon Foundation'. 태평양 전쟁 때 A급 전범 용의자였던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비영리 기관으로, 교과서 개정 운동과 평화헌법 폐기를 주창하는 극우 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막대한 자금력을 토대로 국제사회에 일본 보수계의 논리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는 일본 재단과 도쿄의 시부야구가 공동으로 추진한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맞아 낙후된 도쿄의 17개 화장실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어 일본 재단이 영화 감독 빔 벤더스에게 홍보용 단편영화 제작을 의뢰한 게 <퍼펙트 데이즈>의 시작이다.
물론 영화 역사가 증명하듯, 제작 경로와 영화적 완성도는 별개의 두 트랙일 경우가 많다. 내가 느낀 무감흥은 누가 돈을 댔고 지원을 했냐는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단지 영화 속 주인공 히라야마의 행위와 감정이 카탈로그처럼 정렬된 채 인공의 세계에 정박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바로 그것이 무감흥의 주된 이유다.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도쿄 시부야 지역에 2020년부터 2023년 사이에 문을 연 17개 공중화장실의 청소부다. 중년 남성인 그는 작은 복층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며 시계추처럼 정확히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를 청소하는 소리에 깨어나, 다다미 침구를 정리하고, 콧수염을 다듬고, 면도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입고, 청소 작업차를 타고 6, 70년대 미국 팝을 들으며 출근길에 오른다.
그 규칙적인 패턴은 청소 노동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한 치의 오차도 불허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17개의 화장실을 정밀하고 빈틈없이 청소한다. 작은 의료용 거울로 변기 아래를 뜯어보고, 소변기 필터를 솔로 문지르고, 수도꼭지에 반질반질 윤을 낸다. 마치 하나의 작품을 세공하는 장인처럼 그 모든 노동 행위가 절제되고 깍듯하다.
점심시간에 히라야마는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나무를 감상하다 작은 35mm 카메라를 꺼내 잽싸게 한순간을 포착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즉 코모레비다. 그는 이렇게 찍은 사진을 인화한 다음 월별, 연도별로 정리해 똑같은 상자에 꼼꼼하게 정리해 놓는다.
퇴근 후에는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거나 단골 선술집에 들러 가볍게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읽다 만 책을 집어 든다. 월리엄 포크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고전 작가들이다. 동시대 작품은 읽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 책을 읽다 스르르 잠이 드는데, 그때마다 나뭇잎과 햇살이 춤추는 흑백의 꿈을 꾼다. 몇 시간 후 다시 거리의 빗질 소리가 들리고, 그의 일상은 똑같은 패턴으로 다시 시작된다.
출처 : 퍼펙트 데이즈 스틸 사진
히라야마의 삶은 소위 미니멀리즘이라 말할 만큼 금욕과 절제에 지배되어 있다. 집안의 물건도 최소화되어 있고, 일상 생활도 강박적으로 반복적인 패턴을 따른다.
그러면서도 화장실 청소 노동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가 하면 순간순간 햇빛을 채집하거나, 지난 시절의 전설적인 음반과 월리엄 포크너와 같은 고전 소설들을 즐기거나, 비스듬한 오후 햇살의 창가에 누워 순간의 충만함을 음미한다. 자족적이고 조율된 삶, 일본의 과거에서 날아온 엽서 같은 풍경들.
다시 말해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형화된 '일본적 풍경'이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 화장실 청소처럼 홀대받는 노동을 경건함을 가지고 묵묵히 수행하는 일본식 장인 정신, 절제된 삶, 반짝거리는 햇살에 대한 하이쿠적 감상, 문화 황금기 시대의 팝, 단골 식당과 선술집에서 혼자 느끼는 소확행. 우리가 익히 피상적으로 박제화한 일본적인 이미지들 아닌가. 국내외 그 어느 평도 이 영화와 오리엔탈리즘의 관계를 논하지 않는 게 기이할 정도다. 단순히 유럽의 백인이 일본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일본을 정형화하는 그 시선 때문에 문제적이다.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이 도쿄의 이국적 장소들을 카탈로그 화하고 채집함으로써 도쿄 관광 열풍을 인도했다면,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17개의 도쿄 공중화장실을 랜드마크로 전경화하고, 일본 소시민의 절제된 삶이라는 가공된 이미지들을 펼쳐 보임으로써 북반구 예술영화 소비자들의 시청각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또다시 일본 관광 열풍을 선도하는 패턴을 따르고 있다. 모르면 몰라도 이것이야말로 애초에 일본 재단이 기대하던 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에서 느낀 무감흥의 속사정은 더 깊고 은밀하다. 이 영화가 구축한 현실은 오타쿠가 써 내려간 목록의 세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인공 히라야마가 수행하는 반복적인 일상과 노동의 패턴은 과연 현실적인가? 흔히 이 영화와 비견되는 짐 자무쉬의 <패터슨 Paterson> 역시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의 쳇바퀴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패터슨>의 일상이 아내와 승객들과 이웃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드러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라면, <퍼펙트 데이즈>에서의 일상은 주변과의 단절 속에서 주인공 개인이 만든 폐쇄된 세계나 다름없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거의 말수가 없고 혼자 세상과 동떨어진 채 고독하게 음악과 책과 햇빛을 수집한다.
한편으로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Jeanne Dielman>에서도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상 패턴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 속에서의 일상은 외부 세계의 광포한 폭력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이 악착같이 규율을 부여하면서 구성한 질서 잡힌 소우주다. 마찬가지로 <퍼펙트 데이즈>에서의 일상 역시 단절과 회피를 통해 구축한 자기충족적인 소우주다. 따라서 언제든 외부의 영향을 받고 부서질 만큼 그 토대가 연약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 히라야마가 구성한 이 일상의 성채는 내내 견고하게 보이다가 영화 후반부에 세 번의 충격을 받고 금이 간다. 함께 일하던 젊은 동료가 일을 관두고 연장 근무에 들어갔을 때, 조카와 여동생이 찾아왔을 때, 희미하게 연정을 품고 있던 선술집 마담이 묘령의 남자와 함께 있는 걸 훔쳐보았을 때. 그러니까 노동, 가족, 사랑 같은 실제 세계가 갑자기 틈입하면서 감정적 소요가 발생하고 안온한 일상의 표면이 찢어지며 틈새가 벌어진다. 말하자면 히라야마의 평화롭고 자기 충족적 일상은 실제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구축된 것이다. 청소 밴을 몰고 출근하는 엔딩 장면에서 울먹거리는 히라야마의 길고 긴 클로즈업 숏은 이렇듯 부서지기 쉬운 인공의 왕국에 보내는 처연한 애가일 것이다. 따뜻한 햇살이 나무 그늘 사이로 비쳤다가 금세 사라지는 그 찰나의 순간처럼 가없이 소중하고 또 그렇게 덧없는.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늘 연장 근무, 박봉, 실업 속에 놓인 채 윌리엄 포크너와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즐길 여유가 없을지언정 또 그 나름대로 각자의 삶 속에서 행복을 길어 올린다. 또 가족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럼에도 반짝거리는 소소한 행복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더군다나 숱한 사랑의 고통에 부대끼면서도 우리들은 어떤 놀라운 구원들과 마주하곤 한다.
이런 실제 세계의 일상들 대신, 히라야마가 추구하는 일상의 목록은 다분히 인위적이고, 복고적이며, 힙스터스럽다. 구석구석 광을 내며 화장실을 청소할 것, 햇빛을 사진으로 찍어 채집할 것, 카세트테이프로 루 리드의 'Perfect Day'와 패티 스미스의 'Redondo Beach'와 같은 황금시대의 팝의 목록을 계속 상기할 것, 월리엄 포크너와 같은 고전 소설들의 목록을 이어갈 것, 그리고 누구로부터 침해되지 않는 자신만의 루틴을 따를 것. 즉 오타쿠의 목록으로 구축한 인공의 일상이다.
때문에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청소노동자가 아니라 빔 벤더스가 그대로 투영된 존재처럼 느껴진다.
출처 : 퍼펙트 데이즈 스틸 사진
히랴아마의 카세트테이프 목록은 곧 미국 팝의 열렬한 오타쿠였던 빔 벤더스의 취향의 목록이다. 또 주인공의 이름 '히라야마'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빔 벤더스의 곡진한 헌사나 다름없다. 히라야마라는 이름은 오즈의 <동경 이야기>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고, 유작인 <꽁치의 맛>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빔 벤더스는 1985년 오즈 야스지로의 발자취를 따라 도쿄를 구석구석 뒤지는 <도쿄가>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퍼펙트 데이즈>의 영화적 형식 또한 오즈 영화의 형식을 고스란히 빌린 것이다. 물론 오즈가 일상의 반복과 앵글의 엄격한 규칙 속에 당대의 사회상과 통속적 비애를 은근히 반영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사회상과 대부분의 실제 세계를 소거시킨다. 더 나아가 히라야마의 과거조차 이 오타쿠의 목록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높다.
과연 히라야마의 과거는 무엇인가? 부잣집 아들인데 그 부유한 출신 배경을 마다하고 저렇게 자기만족을 위해 에피큐리언적인 금욕의 삶을 살아왔던 걸까?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던 걸까? 좀체 입을 열지 않는 히라야마 때문에, 딱 한 번 여동생이 등장하는 엔딩 시퀀스 때문에 히라야마의 불분명한 과거사와 정체성을 놓고 관객들이 무수히 설왕설래를 벌였지만, 막상 히라야마의 가족은 1962년 작 <꽁치의 맛>의 주인공 가족일 개연성이 크다. <꽁치의 맛>의 히라야마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함장 출신이자 자동차 두 대와 운전사를 둘 정도로 부유한데, <퍼펙트 데이즈>에 자동차와 운전사를 대동하고 등장한 부유한 여동생의 모습이 이 연관성을 충분히 유추하게 한다. 다시 말해, 빔 벤더스는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삶을 구성하는데 현실을 참조한 것이 아니라 오타쿠의 영화 목록을 참조했다.
이것이 내가 <퍼펙트 데이즈>를 보며 감흥을 받지 못한 이유다. 구체적 현실이 소거되고 오타쿠의 목록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 실제 세계와 공명하기보다 향수와 복고로 가득한 고급의 취향 리스트를 전면에 앞세워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를 토로하는 오타쿠적 세계관.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란 개인으로 각기 고립되고 분해되었지만, 그것을 자기 관리와 절제를 통해 충분히 쾌락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기완결적 세계다. 이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와 닮아있다고 말하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출처 : 퍼펙트 데이즈 스틸 사진
당연히 <퍼펙트 데이즈>의 영화적 완성도를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부터 거장 빔 벤더스가 쌓아 올린 영화 세계는 실로 방대하고, 또 오즈 야스지로와 일본을 사랑하는 만큼 그 나름대로 자기 취향의 목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다만, <퍼펙트 데이즈>를 관람하는 부유한 북반구 관객들의 어떤 태도, 나뭇잎을 희롱하는 햇살과 향수 어린 70년대 OST에 감탄하며 자기 규율과 절제를 칭송하는 일련의 소비 행태가 자꾸 눈에 밟히게 된다. 실제 세계 속에서 오염된 타자들과 부대끼면서 현실을 바꾸고 행복을 길어 올리는 대신, 현실을 회피하고 각자 고립된 채 우아한 자기 관리, 자기 계발, 그리고 문화상품의 목록 속에서 자족의 미소를 짓는 유폐된 세계와 상당히 닮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뭇잎 사이로 출렁이는 햇빛은 아름답다. 하지만 혼자서 감상하고 그것을 매번 사진으로 찍어 수집하고 컬렉팅해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행복은 실로 고립과 우울의 쓸쓸한 그림자일 뿐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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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은 영화 연출이 주업이지만, 칼럼도 쓰고 책도 쓰고 강의도 나간다. 동분서주 오지랖을 떠는 것 같아도 결국엔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백수 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