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부는 ‘참교육은 위장된 민중교육’이라는 유인물 800만장을 반상회에 뿌렸고 문공부는 교원노조를 ‘좌경 폭력 혁명 세력’으로 매도하며 TV의 편향 보도를 강요했다. 대검은 공안 차원에서 교원노조원을 대거 구속했고 교원노조 고립화 작전에 경찰과 안기부가 동원되었다. 경제기획원은 경제단체를 전교조 비방전에 내세웠고 정부 홍보 예산을 앞당겨 지출했다. 감사원은 탄압을 위한 예산 전용을 묵인했다. 각 시·도는 모든 공무원을 조합원 탈퇴공작에 동원하였고 문교부는 관변 학부모 조직을 동원, 반대 시위를 사주하고 직접 조합원들의 징계와 탈퇴 공작의 전면에 서서 채찍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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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에 쏠린 교사들의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던진 당근도 몇 개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92년까지 매년 3천7백억 원씩 총 1조 1천백억 원을 투입, 노후 책걸상 교체, 교실 난방 설비, 낙후 교실 수리, 교무실 확충, 호봉 재조정, 안전공제회 설립, 교원소청심사 창구 일원화 따위였다. 여교사 탈의실 설치, 교사 20명당 1대 꼴로 전화 증설이 생색내기로 나왔으니 그 시절 교육환경의 열악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용 대한교련(한국교총의 전신)은 교육문제 해결의 현실적 대안은 교원노조가 아니라 <교원지위법> 제정이라며 설레발을 쳐댔다.
7월 초까지 구속 34명, 파면·직위해제 109명 등 정권의 대탄압이 본격화되는 중에도 조직 확대는 계속되어 결성대회 이후 두 달 만에 온갖 시련을 겪으며 600개 가까운 분회가 탄생했다. 서울 성동고분회 창립(6월11일)에 홍일점으로 참가한 강화숙(사진, 현 서울고)의 회상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1위를 하려고 분회장 차용택이 열심히 했는데 구로고에 뒤졌다. 평교협 회원 20여 명 중 12명이 가입했다. 난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옳은 일 하는데 무섭다고 혼자 빠질 수는 없었다. 커다란 흙더미에 모래 하나 더 얹는다는 심정으로 참가했다. 막상 해직이 되고 나서 충격이 너무 커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지만….”
분회 결성을 통해 조합원들의 신상이 드러나면서 정권은 가능한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하여 가족을 겁박하고 인륜을 파괴하면서 각개 격파를 시도했다. 조합원들도 학교에서 농성 단식 시위로 치열하게 맞섰다. 그 와중에 부산에서는 힘들여 교사로 키운 딸을 교육 관료들이 빨갱이로 매도한 데 분노한 아버지가 자살로 항의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학기 말을 앞두고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전교조를 지지·지원하는 사회적 연대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결성 전부터 연대를 해 온 민주노조 진영과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에 더하여 경남지역을 필두로 스스로 ‘참교육의 주체’임을 자각한 학부모들의 조직이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고등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광주 광덕고(김택중), 서울 구로고(양달섭), 경북 예천여고(김창환) 등 선생님들을 지키려는 학생들의 집단행동과 투쟁이 도처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6월 25일 전교조는 제1차 대의원대회(전남대)를 전격 개최하여 조직을 추스르고 본격적인 사수 투쟁을 결의한다. 원천봉쇄를 뚫기 위해 전날 집결한 대의원 672명(재적883명)은 이부영 위원장직무대리, 이수호 사무처장, 박성규(연신중, 현재 출판인)처장 대행, 김진경(민중교육 해직) 정책실장, 김민곤 편집실장, 윤광장 이규삼 박병호 장병익 회계감사위원 등 임원과 일꾼들을 인준하고 7월9일 ‘전교조 탄압 저지 및 합법성쟁취를 위한 제1차 범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즈음 “이 세상에 교사의 모가지보다 더/ 잘 짤라지는 모가지가 있을까/ 감옥보다 더 참기 어려운 굴욕/에 몸을 떨던 장주섭(전남 백제여상)은 “가져가시오 내 모가지 모가지를/ 교사의 모가지를” 가져가라며 86년에 이어 또 다시 해직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