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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12월 대선 직전 문교부장관은 전국을 돌며 ‘교원과의 대화’를 조직, ‘교장 승용차 제공’ ‘교감 업무추진비 8만원 지급’ ‘원로수당 3만원 신설’ ‘강원도 교원 사택 77동 신축’ 등 선심 공약을 남발했다.
전교협 공정선거감시단에는 민정당의 부정선거운동 사례가 접수되기도 했다. 전북 김제군 교육자대회에서 김제농고 김희곤 교장(군 교련회장)은 인사말 중에 ‘우리 민정당’ 운운 하여 본심을 드러내었고 강원 동해시 김정남 민정당 의원 간담회에 교육청에서 학교당 교사 2명씩 참여를 할당했고 노태우의 유세장에 ‘수업에 지장이 없으면 참가해도 좋다’고 했고 춘천에서는 국민학교에 오전수업 후 참가를 권유하기도 했다. 서울 예일여고 야간부 학생 15명이 민정당 유세장에 동원된 것도 드러났다.
그러나 양김과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16년만의 직선제 대선은 ‘믿어 주세요!’를 외친 노태우의 피 묻은 손을 들어주었다. 개표 조작 당선무효 투쟁도 구로구청 담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그런 가운데 88년 4.26총선에서 3김이 주도하는 야3당이 승리하여 상반기는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 등 청문회 정국이 열렸다. 국회 교육문화상임위 배치된 세칭 교육 3총사 강삼재 박석무 이철 의원의 활약이 돋보였다. TV로 생중계된 국회 청문회는 사람들의 민주의식을 드높여 어린 학생들도 청문회 놀이를 하고, 고교생들의 직선제 학생회에 대한 요구가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고 87년 하반기에 이어 교육현장의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강요받던 영세사립학교 교사들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학정상화 투쟁으로 88년 2월까지 나주 세지중 17명, 공주 신풍중·종고 7명, 서울 명신고 4명, 정화여상 1명등 30명이 해직되었다. 사립교원의 신분은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상황에 즈음하여 전교협은 <교권탄압특위>를 구성하고 각 지역 교협과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88년 1월22일 2천 여 교사·학생이 참가하여 교권탄압 규탄대회(연세대 대강당)를 열고 피해 당사자들의 사례발표와 학생들의 교육민주화를 위한 간절한 호소를 듣고 연대농성투쟁을 결의했다. 대회 후 세지 신풍 명신의 해직교사들은 전교협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서울 광주 충남 부산 전북 경기 인천 교협, 민교협 교사들도 연대투쟁에 돌입, 사학비리를 규탄하는 범국민 서명운동, 스티커 붙이기, 항의 편지 항의 전화와 매일 교육감을 찾아가 사학교육민주화의 소망을 담은 ‘꽃 달아주기’ 퍼포먼스도 했다. 이 투쟁은 1월31일 명동성당 입구의 교권수호결의대회로 연결되었다.
전교협은 겨울방학 투쟁의 성과를 모아, 곪을 대로 곪아 터지는 ‘사학 비리와 반교육적 작태를 척결하고 바르고 참된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사립학교정상화추진위원회>를 3월 26일 결성했다(여의도 여성백인회관). 회장 김난희(파주여종고) 부회장 이기남(세지중 해직) 황금순(신풍고 해직) 총무 김성진(유성전공 직위해제) 운영위원장 배춘일(전북상산고 해직) 등으로 집행력을 갖춘 <사정추>는 88년 내내 전국에서 전개된 사학정상화 투쟁과 기부금 반환 요구 투쟁을 지도·지원하는 중심축이 된다.
운영위원장 배춘일의 활약은 특히 돋보였다. 간담회에서 이사장의 교육관, 학원운영관, 학교장의 역할, 교사 임금 등을 질문했다는 이유만으로 88년 2월 해임된 1년차 교사 남광균(음악)의 예덕실고(산업체부설)-그 학교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관절염, 무좀, 습진 등 질병에 시달렸고 기숙사는 추운 겨울에도 대다수가 찬물에 목욕을 하는 실정이었다-에서 시작하여 40%가 여교사인데도 어머니 여교사가 한 명도 없는 제주 삼성여고(교장 고창하-서귀포 교육회장), 5공 시절 고적대로 유명한 동두천여상 양심선언 교사(김흥래 박재선 박재후 이종만) 해임(7.20) 사건, 사학비리의 백화점 부산 경희여상, 장애자 복지시설을 겸한 이리 혜화학교 학생 교사들의 서울 평민당사 농성, 가투, 정읍 동신여상, 청주 양백여상, 장항 정의여중·고, 목포 신명여상, 무안 망운중, 서울 정희여상의 32일간 시교위 점거 농성 등 88년 사학 투쟁의 현장을 찾아,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전국을 뛰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