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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관련 해직교사들이 ‘특별 신규채용’ 형식으로 복직된 후 13년째인 지금까지 호봉과 경력조차 회복되지 않고 있다. 관련법 제5조의6(불이익행위 금지 등)은 ‘관련자로 인정된 자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또는 사용자 등으로부터 민주화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어떠한 차별대우 및 불이익을 받지 아니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정부는 구차한 법해석으로 이들의 ‘현존하는 불이익’에 아직도 눈감고 있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태우의 6·29선언 직후 손제석 문교부장관은 교육 분야 민주화 조치의 일환으로 9월초까지 해직교사들의 복직을 약속했다. 70년대 말부터 전교협 결성까지 부당하게 해직된 공·사립 교사가 146명에 달했다. 당사자들의 복직요구가 있기도 전에 나온 장관의 공언은 얼마 후 장관 자신이 개각으로 교체되면서 헛말이 된다. ‘속이구’의 시작이었다.
장관의 공언에 고무된 해직교사들이 7월 10일 긴급히 <전국해직교사복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당 시·도 교위와 문교부를 방문하자 당국자들은 선선히 복직 약속을 했다. 새로 임명된 서명원 장관은 8월 임시국회 문공위에서 “9월 1일부터 차례로 복직시킬 방침이며 이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법무부에 요청해 놓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2학기가 시작되고 9월이 다가도록 단 한 명도 복직되지 않았다. 동료교사들이나 국민들은 언론보도를 보고는 해직교사들이 전원 복직되었다고 믿고 있었으니 분통 터질 일이었다. 대전의 한 해직교사는 친구의 복직 축하전보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해직교사들은 9월 28일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수도원 안에 있던 민교협 사무실에 모여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요구는 ‘구속교사 석방과 해직교사 복직’이었다. 농성 3일째 이들은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정기국회에서 장관이 ‘해직교사들의 징계사면을 법무부에 요청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것이다.
분노한 이들은 10월 12일 농성장을 종로5가 KNCC 인권위 사무실로 옮겨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한편 복직촉구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투쟁은 사흘 후 해직교사복직촉구대회(흥사단 강당)로 이어졌다. 현직교사를 포함하여 300여 명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 <복직대책위>를 해소하고 투쟁의 장기화를 대비하여 <전국해직교사회>를 띄웠다. 이 날 대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이 대학로에서 종로5가 쪽으로 침묵행진을 하자 경찰은 다수가 부상하고 실신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하며 30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경찰은 최교진을 구속하고 김태선 노웅희 송원재 이동훈 이상덕 이상훈 이장원을 불구속 입건, 12명을 즉심에 회부하는 등 과잉 대응을 했다. 이를 인정한 판사는 즉심 12명 전원에게 선고유예로 내보내고 구속자도 기소유예로 곧 풀려난다.
그러나 이 투쟁 이후 해직교사 복직투쟁 전선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원인은 복직 약속 이행에 대한 기대로 당사자들의 투쟁 동력이 강하지 못했던 점과 전국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던 교사협의회 건설 투쟁에 운동역량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투옥 중이던 유상덕 이수일과 남민전, 민중교육 사건 구속자 등이 제외되고, 서울 정화여상 명신고 전남 세지, 충남 신풍 등 이제 막 터져 나오던 사학민주화투쟁 해직교사가 양산되는 가운데, 복직 조치는 이듬해 4월에 가서야 겨우 절반 정도 이루어졌다.
이들을 사건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80년 광주항쟁 : 이상호 ◇81년 부림 사건 : 고호석 김희욱 설경혜 윤연희 하성원 ◇81년 아람회 사건 : 정해숙 박해전 황보윤식 ◇81년 오송회 사건 : 이광웅 박정석 채규구 엄택수 전성원 조성용 황윤태 이옥렬 김상기 ◇85년 민중교육 사건 : 강병철 고광헌 송대헌 심성보 심임섭 유도혁 이순권 이철국 전무용 전인순 조재도 황재학 홍선웅 ◇86년 교육민주화운동 : 고희숙 권재명 김관규 김순녕 김태선 노옥희 노웅희 문희경 이미영 이을재 이홍구 정영훈 정익화 조용진 조호원 ◇86년 민교투 사건 : 노현설 송원재 윤병선 이상대 이장원 ◇기타 사건 : 고재록 권형민 김대성 김대열 김원규 김은경 김일헌 민경순 박기영 박노익 박수원 박현주 손정옥 양형원 엄태홍 유시춘 이석환 이선희 이정현 이치석 주세영 채두석 한규태 한남석 함순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