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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여의도 광장에 강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근조 교육악법’을 내려 쓴 커다란 만장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분노의 함성’을 담은 깃발과 작은 만장들이 펄럭이며 고층 건물들 가운데 때 아닌 구호의 숲을 이루었다.
전국에서 모인 교사, 교수, 예비교사 학부모까지 1만 3천 교육동지들은 처음 겪는 집회의 규모에 놀랐다. 1961년 이후 교육계 최대 집회였다. 서울 동북부교협신문은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백묵 가루가 가슴 가득/ 하얀 먼지로 쌓여도/ 바튼 기침조차 내뱉지 못하던/ 기나긴 침묵, 40년/ 마침내, 여기, 동지여/ 침묵을 가르는 용트림이 있으니/ 듣는가! 이 여의도의 함성을/ 보는가! 힘차게 나부끼는/ 참교육의 깃발을/(...)
그랬다. 그 날 여의도 광장에 모인 교사들은 86년 5월 교육민주화 선언의 작은 떨림이 2년 반의 단련을 거쳐 어느덧 한강물을 차고 국회의사당을 휘감아 오르는 거대한 용트림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 대회장은 잔치마당이었고, 정겨운 ‘팔도 사투리 경연장’이었다. 말투는 달라도 문선대를 따라 움직이는 몸짓은 한결 같았다.
악법의 옹호자들은 그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그것은 교사들의 봉기였다. 그랬다. 처음 서명지에 이름 석 자 쓸 때도 손이 떨리고 직원회의에서 마이크 한번 잡기 위해 밤잠을 설치던 청맹과니 교사들이었다. 그러나 따로 훈련받지 않아도 세상 개변의 흐름 속에 눈이 뜨이고 뜻과 뜻이 만나 입이 열리는 경험을 하면서 두려움이 물러난 자리에 집단의 신명이 들어섰던 것이다.
지금은 무한경쟁에 내몰린 우리 교사들이 학생들과 소통하기 어려워 고통을 겪고 있지만, 20년 전 교사들은 참 엉뚱하게 고달팠다. 지배 권력의 비호 아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교장, 악덕재단의 전횡이 고통의 제일 원인이었으나 고달픈 까닭은 또 여러 가지였다.
‘교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적정 우대와 신분 보장’(구 교육법 제13조)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22년 경력 교사의 임금(1987년 48만원)이 기업 대졸 평사원(통신공사 사원 58만 2,00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봉급 인상율도 도시근로자 평균의 절반에 그쳤다. 이런 판국에 1정 연수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심지어 출산휴가 강사비까지 부담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병설유치원 전임강사들은 월급 177,500원(상여금 400%)에 정규교사의 업무를 강요당했다. 법정 교원 확보율은 72.2%(사립 정규교사 채용율 69%)에 불과했고 보충 자율학습에 시달리는 고교교사 주당 업무시간이 61.4시간이나 되었다. 일부 벽·오지를 제외하고 학급당 학생수는 55~60명이었다.
숙직제도도 남교사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저녁 밥값도 안 되는 수당 2,000원에 오전 휴식 시간도 없어 맹물 마시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학교마다 월평균 200건이 넘게 쏟아지는 공문들은 일인당 공문처리 시간으로 주당 6.1시간을 빼앗아 갔다. 교사의 본업이 잡무인지 학생 교육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30개 주요 직업군 중에 교직 선호도가 25위 안팎에 불과했다. 교사 봉기의 여건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날 본 대회를 마친 대오는 국회 앞까지 행진을 한 후 지역별로 서울 시내 차량행진을 하고 시민들의 따뜻한 호응 속에 홍보를 했다. 교사대회로서는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
이 대회의 열기에 밀려 야3당은 11월 22일 전교협 안을 대폭 수용하여 교무회의 복수 추천 교장선출 임기제, 교무회의 의결기구, 학생 학습권 침해 않는 범위 내 단체행동권 보장 등을 합의했으나, 공화당과 민주당은 대한교련, 교장단과 사학연합회가 반발하자 여론수렴이라는 명분으로 단일안 제출을 유보하였다. 이에 전교협은 교수 학부모 학생들과 연대를 강화하여 12월 내내 전 조직을 가동하여 집회, 시위, 농성 천만 서명운동 등으로 야3당을 압박해 들어갔다. 8천만 원 뇌물수수로 구속된 최열곤 씨(전 삼락회장)가 서울 영파여고 교지에 ‘교육감 치사’ 3매 원고료로 2백만 원을 받은 사실이 폭로되고, 교사들은 12월 8일 연합고사 감독료가 대폭(?) 인상되어 싱글벙글 하던 시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