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은 교직원노조 결성 후 우선 해결과제로 ◇교원의 봉급 인상과 처우 개선(20%~50% 인상) ◇과밀학급 노후시설 등 교육환경 개선 ◇수업시수 감축, 잡무경감 ◇사립교원 신분 보장을 들었다. 이런 교사들의 요구는 4월25일 전교협 서교협 연석회의에서 △공무원 직종·직급간 보수차별 철폐 △호봉승급기간 차별 해소와 승급액 인상 △법정 정원 충원(특히 사학) △초등 교과 전담제 실시 △과밀학급 과대학급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재정 확보 △부당한 잡무와 자질구레한 공문서 작성·결재 없애기, 일체의 수금 및 판매 행위 중단, 각종 동원 중지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 |
이런 요구 투쟁과 더불어 전교조 건설 발기인대회를 앞두고 80년대 교사교육운동의 주요 성과 하나가 우뚝한 깃발로 솟아올랐다. 바로 <교과모임연합>의 창립(초대 의장 김진경-국어, 상임부의장 신병철-역사)이다. 89년 5월11일 저녁 서울 동국대 사범대 학림관에 모인 200여 명의 전교협과 교과모임 교사들, 서울지역사범대학생협의회 소속 학생들은 “무기력한 한탄과 소극적 비판에서 벗어나 당당히 우리들의 대안을 창출하고 제시하여 더 이상 학교 교육이 외세와 지배 권력의 손아귀에 머물지 만은 않게 하기 위해” 힘을 모았음을 천명했다.
<교과모임연합> 건설은 88년 2월, <국어교육을위한교사모임>의 발기와 비슷한 시기에 ‘교과교협 건설’이 전교협 내부에 제안되고 불과 1년 남짓 만에 이루어졌다. 정부의 철저한 통제 속에 교사들의 자주성과 전문성이 숨 쉴 틈이 없던 시절에는 이른바 교과교육 연구는 현장 실정과 동떨어진 대학 교수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니 실제 교육 현장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국가가 만들어 제공하는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 그리고 이를 재탕 삼탕 하는 상업화된 참고서에 의지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사정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올바른 교육을 ‘스스로 잘’ 하고 싶어 하는 교사들의 바람과 교과교육에 대한 교사들의 본원적인 관심이 교과 모임 조직화의 동력이었다.
국어와 역사 교사 모임이 경쟁하듯 결성되고, 이어 농업 영어 독어 지리 과학 공업 기술 도덕 윤리 미술 교사 모임이 창립되었으며 사회 음악 체육 교과 모임이 뒤따랐다. 국어, 역사 모임은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연합> 창립선언문에 언급된 바대로 ‘단위교과 모임의 작은 파도가 <연합>의 큰 파도로’ 모인 것이다. 이 파도가 ‘교직원노조의 더 큰 파도로, 민족·민주 운동의 커다란 해일로 모여 해방된 세상으로 나가’리라는 것이 그날 창립대회에 모인 교사들의 믿음이었다.
교사들의 자주적인 교과 모임 결성 운동은 교육과정을 포함한 교육내용의 민주화를 교사들 스스로 이루어 내려는 취지의 발로였다. 이는 교권 확보, 신분 보장, 처우 개선, 교육 환경 개선 등 교사들의 경제적 요구 실현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교육민주화 운동의 두 바퀴 중 하나였다. 그러나 6월 항쟁 이전에는 교육내용의 국가독점 체제에 대한 교사들의 사소한 문제제기조차 가혹한 탄압을 불러 일으켰다. 1983년의 이른바 <상록회 사건>(교과서 통일 관련 내용 분석)과『민중교육』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노태우 정권도 국어교사모임이 발행한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개편교과서 지침서>(중학교 국어 1-1)에 시비를 걸고 나와 해당교사들의 징계를 운위했다. 이런 정부의 반응에 대하여 창립 당일 교과모임연합은 <교직원노조추진위 교과위원회> 명의로 문교부장관(정원식)과 한국교육개발원장에게 보내는 ‘교과서 문제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발표하고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 수호를 위한 공청회 개최 ◇전체주의 체제의 산물인 국정교과서 제도 폐지와 대안 모색을 위해 교사들과 협력 ◇국정·검인정 교과서 제도의 비밀주의 철폐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폐지 등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