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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부터 서울로 가는 전국 버스 정류장, 고속터미널, 기차역이 모두 경찰과 교육관료들로 봉쇄된 가운데 오로지 조직의 지침에 따라 결성대회 사수의 일념으로 보여준 활약들은 하나하나가 감동 그 자체였다. 부산에서 10만 원짜리 택시를 타고 온 박종기 선생(해운대고), 40리 산길을 걸어 교육관료들을 따돌린 경북 청송 김 선생, 전국을 일주하다시피 빙빙 돌아 서울에 도착한 목포 홍일고 교사들, 55세의 나이로 봉쇄된 한양대에 ‘개구멍’으로 들어가려다 교통사고를 당한 광주 김상식 선생(수창국), 교장 교감의 연금 또는 납치를 뿌리친 경우, 평소 품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자결 위협을 하며 가까스로 상경한 경북 봉화 박태숙 선생, 투쟁기금으로 아기 백일 금반지 3개를 내어 놓은 여교사, 동료교사 탄압에 분노하여 노조 가입을 집단으로 결의한 대구 경상고, 동촌중, 마산 성지여고 교사들, 28일 오전 상경길이 막혀 광주 고속터미널에서 연좌농성한 전남 광주지역 3천여 명의 교사들, 비선을 따라 낯선 서울 땅, 지하철 2호선 주변을 종일 헤맨 사람들, 예비검문에 걸려 경찰서에 끌려간 300여 교사들, 문상객을 가장하는 등 갖은 수단으로 전날 미리 한양대에 들어가 전야제를 치르고 철야하며 대회 당일 마침내 굴비두릅 엮이듯 백골단에게 끌려 나온 김현준(작고) 등 200여 명 철야 농성 교사들…
당시 한양대 교수로 현장을 지켜보고, 이후 민교협 교수들 140여 명과 전교조에 가입한 박현서 초대 전교조대학위원장의 증언이다. “교사들이 27일 밤을 새우고 28일 아침 학생회관에서 집회를 하는데 오후 1시 20분 쯤 백골단이 대학 직원들 안내로 문을 부수고 침탈해 들어와 마구 연행했어. 침낭이 마구 쌓여 있는데...일부 나이 든 교사들이 연행을 피하고 나서 길 아래를 향해 고래고래 욕을 하더군. ‘이 xx같은 xxx들아, 교장 교감 평생 잘 해 먹어라! ’고 말이야. 그러니까 옆에 있던 다른 교사들이 그래. 이봐요,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 참교육 하자는 교사들이 그리 욕을 하면 쓰겄소?”
그날 교육관료들의 집결지는 한양대 길 건너 행당중학교였다. 그들 중에는 경찰 백골단보다 훨씬 심하게 패악질을 하며 설쳐대는 무리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권의 탄압이 그토록 강할 줄. 전교협 지도부는 87년 6월 항쟁 이후의 민주진영 역량 강화의 정도로 볼 때 교사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은 쉽지 않으리라 예측했다. 전교협 간부들의 방문을 받은 노무현 의원은 국회의원회관에서 “교사 100명도 못 자른다. 500명을 자르면 정권이 무너진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군대를 제외한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였다. 청와대를 사령탑으로 해서 법무부(검찰) 내무부(경찰) 문교부(교육청과 대한교련) 공보부 기획예산처, 안기부 감사원 총무처에서 동네 반상회까지 모든 행정기구가 전교조 공격에 징발되었다. 일개 노동조합을 상대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배세력은 교원노조 결성 저지에 사활을 건 듯했다.
결성선언문에 밝힌 바대로 ‘민족사의 대의에 서서 진리와 양심에 따라 강철같이 단결한 40만 교직원의 대열’의 기세가 그만큼 거세었던 것이다. 그랬다. 청년교사 강성호(충북 제원고) 조태훈(서울 인덕공고)을 ‘북침설’ 주장 따위의 조작사건으로 얽어 5월 2일 구속시킨 국가보안법조차 교사들의 전진을 막지 못했다. ‘열악한 교육환경, 낮은 임금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스승은커녕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지식판매원, 입시기술자’로 내몰리던 ‘나약한 교사들’이 신들린 것처럼 ‘겨레의 교육 성업을 수임 받고 학생 학부모와 함께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을 하고 나서자 권력이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 교사들에게 두려운 것은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빛’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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