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차관: 1차 대전과 헤게모니 문제

헤게모니 노트 03


출처: Unsplash, British Library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캠페인의 열기 속에서 경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으로 이상한 우회로를 택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관세왕' 매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을 다시 미국 공론의 의제로 끌어올렸다. 

"윌리엄 매킨리는 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과소평가된 대통령이었다. 그를 뒤따른 이들이 돈을 가져갔다. 루즈벨트는 그 돈으로 공원과 댐을 건설했다. 하지만 매킨리가 그 돈을 만들었고 그는 진정한 관세 왕이었다."

밴스(J. D. Vance)를 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고립주의'의 유령을 불러일으켰다.

공화당 경제 정책 역사의 이러한 왜곡된 이미지에 맞서, 민주당은 본능적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FDR(Franklin D. Roosevelt)의 뉴딜 행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리더십의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FDR은 미국의 국내 정치 경제를 재조정하고, 상호 자유 무역에 기반한 무역 자유화 과정을 시작했으며, 미국을 글로벌리즘 정책에 헌신하게 했다.

미국 정치 담론의 특징 중 하나는 오랜 기억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때 미국의 패권을 구성했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실제로 20세기 초로 돌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미국의 경제력이 처음으로 세계 정세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1890년대나 1930년대가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몇 년이었다. 내가 앞으로 몇 가지 '헤게모니 노트'에서 확장할 내용인데, 그 이야기는 즉흥성과 위기로 점철된 기묘한 이야기다.

19세기 후반 미국이 세계 권력의 중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과장하기 어렵다. 19세기의 거대한 세계 권력인 대영제국은 1893년까지 워싱턴 DC에 있는 공사를 대사관으로 승격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 경쟁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로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국은 중국의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으며, 미 기병대는 만리장성을 따라 말을 달렸다. 테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1907년 12월부터 1909년 2월까지 이른바 "그레이트 화이트 플릿(Great White Fleet, 미해군 전투 함대)"을 친선 항구 순회에 보내며 미국 해군의 힘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러나 1914년 7월, 유럽을 전쟁에서 구하기 위한 열띤 외교 활동이 펼쳐질 때, 미국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을 세계 권력의 중심으로 밀어 올린 것은 유럽이 전쟁을 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이는 아래 그래프에 나타난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출처: Maddison Project PPP GDP data

1916년, 구매력 조정 GDP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회고적 추정에 따르면, 미국 경제의 생산량이 대영제국의 합산 생산량을 추월했다. GDP, 국민 소득 및 부가 가치는 20세기 초 몇 십 년 동안 사용되기 시작한 통계적 지표였다. 이 지표들은 매력적으로 단순하지만, 순수한 경제력을 나타내는 데 있어 잠재적으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제"라고 알고 있는 복합적인 구조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금융, 산업 및 농업 생산, 원자재 및 에너지 공급, 기술 역량 등은 모두 "경제"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이 1914년 이후 세계 정세의 중심으로 이동한 이유는 유럽인들이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일으켰고, 군사적이든 외교적이든 이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착 상태가 미국을 제국주의 경쟁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만들었다. 만약 전쟁이 많은 이들의 희망대로 1914년 말에 끝났다면 이러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의 군사 교리와 기술이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은 물자의 싸움으로 변했다. 이때 미국의 금융, 제조 능력, 원자재는 유럽의 군사 기술이 여전히 우수한 상황에서도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미국의 자원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동원할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었다.

그것은 다시 미국 정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한 국가 기구와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강력한 경제적 이해관계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영국 제국, 프랑스 제국, 제정 러시아로 구성된 협상국과의 긴장된 관계를 중심으로한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다.

우드로 윌슨은 (고도로 인종화된)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비전을 옹호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국내 정치 경제 의제인 '새로운 자유(New Freedom)'는 덜 주목받는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몇 년 전, 윌슨과 그의 의회 지지자들, 그리고 광범위한 진보적 사회 운동은 관세를 대폭 인하하고 소득세를 도입했으며, 클레이튼 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키고 연방 준비 제도를 창설했다. 이는 미국의 금세기 정치 경제를 재조정하기 위한 급진적인 의제였다. 그러나 그 야망이 어떠하든, 20세기 초 미국 정부 기구의 전체 규모는 매우 작았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 GDP에서 연방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 국민 소득의 2퍼센트 미만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작고, 대규모 동원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윌슨을 비롯한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들은 협상국(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의 전쟁 노력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윌슨은 미국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승리 없는 평화' 즉, 모든 유럽 전쟁 당사자들의 겸손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내 책, 『대격변(The Deluge)』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국 정부가 외국의 정치 경제에 직접 개입한 1940년대의 무기대여법(Lend Lease)과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미국 민간 자본이 협상국 정부와 협력하여 미국 국가 경제의 자원을 동원했다.

당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여전히 매우 분권화되어 있었다. 통합된 국가 시스템은 전쟁을 통해 등장하게 되었다. 큰 돈의 주요 중심지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었으며, 이는 확고히 공화당 지지(윌슨의 반대당)였고 협상국을 지지했다. 1913년 워싱턴 DC에 연방준비위원회를 설립한 것은 뉴욕에 있던 이들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지도나 지시 없이, JP 모건은 1914년부터 1916년까지 협상국을 위한 미국 대출을 동원하여 미국에서 대규모 전쟁 물자 구매를 자금으로 지원했다. 이는 전쟁 이전 기간과 비교할 때 신용 흐름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전쟁 전 기간에는 민간 대출이 런던과 파리의 금융 중심지에서 주변부, 특히 미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흐름이 역전되었다.

JP 모건은 이전에 주변부였던 미국의 민간 대출자들로부터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 연합(협상국)의 정부로 엄청난 신용 흐름을 조정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지만, 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것은 정치적, 재정적으로 불안정했다. 이는 미국 경제를 전쟁의 위험과 특정 연합의 운명에 노출시켰다. 전쟁 초기 단계에서, JP 모건이 고용한 구매 사무소는 전쟁 이전에 미국 경제 전체가 수출한 것보다 더 많은 물자를 협상국에 보냈다. 이는 1916년 11월 가까스로 재선된 우드로 윌슨의 의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윌슨은 승리한 지 며칠 만에 연방준비제도(Fed)에 JP 모건-협상국 시스템을 방해하도록 지시했다. 연준은 전쟁 당사국에 대한 민간 대출 발행을 더 이상 승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협상국, 특히 영국에게 이는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영국 재무장관 레지널드 맥케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제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년 6월[1917년]이나 그 이전에 미국 대통령이 원한다면 우리에게 자신의 조건을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워싱턴 DC에 있는 대사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은 윌슨이 평화를 강요하려는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윌슨이 추가 대출 금지로 협상국 전쟁 노력에 얼마나 큰 타격을 입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베를린은 연합군 보급선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시작했다. 독일의 무모한 공격은 윌슨 행정부를 마지못해 전쟁으로 밀어 넣었다.

미국 정부 기구와 재정-금융 능력의 확장은 전쟁 때문에 강요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워싱턴은 이제 협상국과 함께 급진적인 새로운 구조를 갖춘 새로운 전쟁 금융 시스템을 구성했다.

JP 모건의 관리 하에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자금이 미국(이전의 주변부)에서 유럽의 옛 권력 중심으로 흘러갔다. 전쟁의 첫 번째 단계와 달리, 이번에는 정부 간에 자금이 흘러갔다. 월스트리트에서 부채를 발행하는 대신, 미국 정부는 소위 '자유 차관(Liberty Loans)'을 통해  그 수익을 협상국에 제공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직접적으로 금융적으로 얽혔고, 납세자와 납세자, 유권자와 유권자가 서로 연결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쯤, 거대한 금융 의무 네트워크가 유럽 열강과 미국을 연결하고 있었다(참고로 러시아는 1917년에 전쟁에서 탈락했다. 아래에 표시된 부채는 1917년 이전에 런던에서 주도한 금융 흐름의 일부였다).

이 새로운 동맹국 간 금융 시스템은 전쟁 동안 시작된 미국 재정 능력의 극적인 확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은 전쟁 비용을 주로 전쟁 부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이를 지속하기 위해 세금도 인상했다. 전쟁 중 미국 정부 재정 시스템의 격변은 윌슨이 미국 정치 경제를 변형하는 데 기여했다. 1912년과 1916년의 진보적 예산은 관세 수입이 연방 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던 이전과 달리, 다양한 종류의 직접세(소득세 및 이윤세)인 "내부 수입"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매킨리가 선호했던 방식이었다.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직접세, 특히 초과 이익 과세가 급증했다.

이 새로운 재정 기구가 가능하게 한 동원은 극적이었다. 국내 민간 지출 외에도, 자유 차관 형태의 미국 대외 대출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기에 뉴딜 규모에 달했다. 여기에 군사 지출까지 더해지면서 연방 정부의 GDP 비중은 2%에서 거의 25%로 증가했다.

출처: Hall 2019 IMF

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내부 재정 동원 및 국내 및 국제 금융 시스템을 중심으로 현대의 헤게모니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처음으로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제 미국 연방 정부는 처음으로 국내 경제력(GDP)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구세계 제국주의 열강을 금융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국가 기구와 금융 수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연합을 승리로 이끌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세계 문제의 궁극적인 중재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강력한 조합이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이 헤게모니는 항상 취약하고 경쟁이 치열했다. 공공 대 공공,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의 부채는 고통스러운 정치적 딜레마를 낳았다. 절충은 피할 수 없었다. 1922년 12월, 총 20개국이 미국 재무부에 118억 달러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해외 차관의 액면가는 1922년 미국 민간 보유 연방 부채의 52%, 미국 GDP의 16%를 차지했다. 미국의 전시 '동맹국'에 대한 상당한 양보는 미국 납세자들에게 직접적이고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논란이 된 것은 해외 대출뿐만이 아니었다. 부유한 미국인들은 새로운 세금 제도를 혐오했다. 민주당 포퓰리즘 진영의 주장에 따라 전시 소득세와 이윤세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반발은 전쟁 막바지인 1918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은 사회주의 성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모순적인 비난은 '부자 감세'와 그해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볼셰비키와 평화를 맺은 베를린과 윌슨의 전보 교환으로 인해 정당화되었다. 그 결과 공화당의 승리로 1919년 베르사유에서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던 윌슨의 역량이 약화되었다. 전후 질서에 대한 그의 비전을 영국과 프랑스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미국 상원의 공화당 다수파가 윌슨의 국제연맹 조약 비준을 거부한 것은 후대 선전가들이 '고립주의'라고 부르는, 패권주의의 첫 실패라는 악명 높은 시작이었다.

덜 주목받는 것은 윌슨 프로젝트의 정치 경제 붕괴다. 국내 정치적 저항으로 인해 전시 동맹국 간 부채에 대한 관대한 협상을 중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는 결국 독일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과도한 배상 요구를 촉발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부채 탕감을 거부하면서 세계 금융에 가해진 압력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전시 지출을 대폭 삭감하며 최고 세율을 인하하려는 국내적 추진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1920-1921년에 미국은 세계 경제에 가혹한 디플레이션 충격을 가했으며, 이 기억은 1945년 이후에도 남아 있었고 이는 향후 헤게모니 노트 주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차 세계대전이 강대국 관계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전쟁의 결과 덕분에 미국은 이전 어느 강대국보다 더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시대 '헤게모니'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었다. 1918년 이후 미국은 영국이 비운 글로벌 리더십의 자리를 채우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 조건 하의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동원이 만들어낸 "허브와 스포크 패턴(hub & spokes pattern, 허브(중심 국가)와 스포크(주변 국가)로 구성된 구조)"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은 미국의 의존적인 고객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전망에 분노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관리하려는 미국의 첫 번째 노력이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비극적으로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처] Chartbook 301 Liberty Loans: the Great War & the making of the hegemony problem (Hegemony notes 3)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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