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러나 사람은 유전정보 형태로 물려받은 본능으로만은 살아남을 길이 없다. 먹는 것, 입을 것, 잠자리……. 모두 가르치고 배워야 마련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백년의 대계’가 아니라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뒤로 종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할 삶의 길이었다.
사람은 살려고, 배우고 살리려고 가르친다. 달리 살릴 길이 없어서 가르친다. 달리 살 길이 없어서 배운다.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기는 쉽지 않다. 태어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네 발로 기고 벙어리가 된다.
그래도 살 수 있으면, 살릴 수 있으면 내버려 두어도 된다. 그러나 사람 새끼는 두 앞발(손)을 놀려서 먹이와 땔감과 집을 마련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또 말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떼 지어 살 수 있다. 그래서 걸음마도 가르치고 말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르고, 서로 도우면서 살 길도 찾는다. 그런데 가르치려는 사람이 스스로 손발 놀리고 몸 놀려 제 앞가림할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또 오순도순 머리 맞대고 서로 도울 길을 찾아 나서지 못한다면?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살 길이 없다. 이 아이들을 살릴 길이 없다.
열에 하나, 아홉에 하나꼴로, 이런저런 까닭으로 몸 놀리기 힘겨운 사람, 머리 쓰는 일에 더 알맞은 사람이 있다. ‘정전법(井田法)’도, ‘십일조(十一租)’도 그래서 생겨났다고 본다.
아이들이 열 시간, 열두 시간 딱딱한 걸상에 얼차려 자세로 ‘강시’처럼, ‘좀비’처럼 몸 굳히고 글만 달달 외우고, 머리만 굴려도 저절로 살 길이 열린다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은 아이들을 못 살게 하고 있다. 이래서는 인류가 살아남을 길이 없다.
아이들을 살리자고 ‘전교조’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래서 뜻있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살리자고 머리를 맞대 ‘전교조’라는 모임을 만들지 않았는가? 달리 길이 없다. 아이들은 걸상에 앉혀 놓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몸 놀리고 손발 놀리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데리고 다녀야 한다. 왜냐고? 우리의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백장선사(白丈禪師)’가 허투루 내뱉은 말이 아니다. 꼭 새겨야 할 말이다.
자연은 정복과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풀과 나무가 숨 쉴 길이 없으면 사람 목숨도 끊긴다. 목숨이란 무엇인가? 목으로 드나드는 숨, 들숨 날숨을 이르는 말이다. 풀과 나무가 내쉬는 숨을 우리가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날숨을 풀과 나무가 받아들여 함께 사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이렇게 목숨을 주고받고 목숨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왔다.
아이들이 부지런히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르고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서로 도와 살 길을 일러 주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아이들의 목숨을 볼모 삼아 제 배 채우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도 우리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