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년 7월26일 저녁 ‘전교조 사수를 위해 한 몸 기꺼이 역사에 바치기로 결단’하고 전국에서 모인 583명의 교사들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일제히 외쳤다. 전교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부당징계 저지와 전교조 사수를 위한 무기한 단식농성>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대의 앞에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당국의 협박과 회유에 흔들림 없이 인륜을 무시한 탈퇴 공작을 분쇄하고 구속, 파면, 해임 등 어떤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조직 사수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앞서 13일부터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본부 (제3선)집행부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단식수업과 교내 농성, 집단사표 제출의 잠정 중단을 선언하고 정부가 18일까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 전국 565개교 5천 여 명의 교사가 단식수업에 참여했고 그보다 많은 수의 교사들이 교내 철야농성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쟁 역량은 전반적으로 급격히 약화되는 중이었다. 조합원수가 6천 명으로 격감하였다는 정권 측의 허위 선전에 대응하기 위해 12일부터 한겨레신문 광고란에 조합원 만 2천여 명의 이름을 밝히는 이른바 ‘명단 공개 전술’을 구사한 직후 실제로 대량 탈퇴가 나타나기도 했다. ‘조합원의 단결 대오는 종이 위에서 정연’했으나 현실 속에서는 무력했다. 탄압에 대한 대응 투쟁이 분회 차원도 아니고 조합원 개개인에게 맡겨진 탓이었다. ‘다 죽으면 다 산다!’라거나 ‘필사즉생’이라는 구호를 실천할 만큼 교사대중의 계급성이 강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탄압의 강도와 대중의 상태를 바로 헤아리지 못한 지도부의 전술적 편향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전교조의 제의에 정권은 ‘먼저 조직을 해산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대화 따위는 아예 안중에 없다는 태도였다. 전교조가 선택할 폭은 좁았다. 당시 투쟁의 주력이었던 서울과 광주 지역은 별도로 교육청과 사학재단을 상대로 징계저지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조직세가 약한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탈퇴하고 징계도 거의 마무리 되어 방학 중에 지역 독자 투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명동성당 단농 투쟁의 주력은 역설적으로 세가 약한 지역 조합원들이었다.
단식농성의 조건은 참으로 열악했다. 궂은 비 내리더니 곧 7월 땡볕이었다. 돌바닥 잠자리에 비닐 천막, 집회와 선전전, 최루탄 가스 속 노점상들과 연대투쟁 등의 일정은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했다. 3일째부터 현정혜(현 상주 내서중), 원성혜(당시 울진 언양국), 이희연(서울 상계중) 조합원을 비롯한 여성들 중에 탈진자들이 나왔다. 단식수업으로 지친 몸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까닭이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총 11일의 단식 기간 중 연인원 250여 명이 탈진하고 15명이 응급실에 실려 갔으며 180여 명이 수액 주사를 맞았다. 인도주의의사협의회와 병원노련에서 의료봉사를 해주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 학부모, 동료 교사, 가족, 사회단체, 교수 등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투쟁 성금도 천만 원이 넘었다.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조선일보는 ‘밥 짓고 빨랫감 널린 천막촌’ 따위의 거짓 기사로 단식자들을 분노케 했다.
교사 시인 김종인(경북 김천여고)이 이들의 정서를 목 메인 노래로 대변하였다. “…/ 태풍 쥬디의 비바람 속에서 새우잠을 자며 견뎠다/ 아련히 일어나는 현기증, 담배 연기의 유혹/ 노점상 형제들이 끓이는 된장국 냄새/ 정문 앞 분식점 간판에도/ 통만두, 물만두, 군만두, 비빔밥 모든 유혹 물리치고 우리는/ 생수와 식염 약간으로 하루를 보냈다/ …/우리는 죽으러 왔다 명동성당 돌바닥에/ 대가리 부딪히고 일어서다 퍽퍽 쓰러지고/ 두 발로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우리들의 깃발, 참교육의 기치 지키기 위해서라면/ 굴종보다는 서서 죽으리라. 굶어 죽으리라// 보라 의연히 견디는 육백여 동지들의 눈빛/ ‘살아 숨쉬는 교육’을 노래하는 결의에 찬 모습….


1[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