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교육민주화운동 20년사 ⑮ 해직교사들, <교육출판기획실>을 열다





“낡은 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기성사회의 반대자들이 의당 겪게 되는 불이익과 불편을 견딜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스콧 니어링의 체험에서 나온 말처럼 『민중교육』사건 해직교사들은 생활의 불편 속에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섰다.



Y교협 등 공개단체와 지역 소모임 교사들은 정권에 대응할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했다. 다만 분노하는 동료교사들의 정서에 호소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해직된 성동고 교사 유상덕·윤재철이 먼저 서울과 충남에서 노웅희 이우경 김민순 등이 동분서주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800여만 원이 모였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논의 결과, 교육관련 출판 사업을 하기로 했다. 교사운동의 이론 토대를 쌓아 역량을 키운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1985년 11월 7일 서대문 근처 인창고교 아래 골목 박산부인과 307호에서 70여 명이 모여 ‘교출기’개소식을 했다. 80년대 자주적인 교사운동이 처음으로 물적 토대를 가지게 된 ‘사건’이었다. 고광헌(현 한겨레신문 이사) 이철국(현 고양 자유학교 교장) 심임섭(현 인천 삼랑고) 유상덕(현 경일고)이 상근했고 심성보(현 부산교대) 홍선웅(화가, 투병 중) 등은 이따금 나왔다. 해직 생활이 차츰 익숙해지면서 이들은 대학이나 단체의 강연 초청을 받았고, 현장 교권운동을 지원해 나갔다. 산부인과에 든 사무실은 저녁이 되면 젊은 교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면서 86년 본격적으로 전개된 교육민주화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이 기획실의 첫 작품은 86년 6월에 나온『교육현실과 교사』(청사)와 4월에 나온『교육노동운동』(석탑)이었다. 앞을 먼저 기획했으나 출판사의 사정으로 뒤가 먼저 나왔다. 특기할 것은 두 책 모두 ‘교육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전자는 일본 芝田進午(시바다신고)의 논문 ‘교육노동이론의 실천적 고찰’과 戶木田嘉久의 ‘현대 노동자 계급을 둘러싼 이론적 제 문제’를 실어 당시 활동가들 사이에서 논란 거리였던 ‘교사론’과 교사의 노동자성, 교육운동의 전망에 대한 관점을 넓혀 주었다.



후자에 ‘한국교육노동운동의 현황과 당면과제’라는 논문을 실은 유상덕은 소수 각성된 교사들의 소그룹 운동을 넘어 30만 교원들의 집단적인 운동으로 나아가는 방도로 교육노동운동을 제출했다. (얼마 전 교육노동운동이란 용어의 원조를 자처하는 활동가가 있었다. 족발이라도 ‘원조’를 내세울 때는 경계할 일이다.)『교육노동운동』은 ‘일본교원노조운동사’와 ‘4.19하의 교원노동조합운동’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어 교원노조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교출기’가 낸 두 권의 책이 불티 나 듯 나가자 운동권 출판사들이 마구 합작의 손을 내밀었다. 86년 하반기 해직교사들의 수기 모음집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공동체), 유명한 성래운 교수의 시 낭송 모음『내 무거운 책가방』(실천문학사)은 테이프와 함께 ‘노가 났다.’ 녹음은 CBS(기독교방송)의 윤 모, 고희범 PD(전 한겨레신문 사장)가 스튜디오까지 내 주면서 도와주었다.



해직교사들은 86년 상반기 민족 민주 운동의 교육 부문 진지의 하나로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한다. 5월 15일 민교협이 출범하면서 ‘교출기’의 역량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이전되었다. ‘교출기’는 이름만을 남겨 88년『민족과 교육』 89년『분단시대의 교육』등 출판 작업은 계속되었다.



민교협이 ‘민언련’ ‘민문연’ ‘민미협’ ‘자실’ 등 (민주화 운동) 문화 6단체와 연대하는 한편, <교육민주화선언> 후 회보「교육과 실천」을 창간하고 교사운동의 실질적인 지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자 전두환 내란정권은 그냥 두지 않았다. 86년 7월 15일 “교육운동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나간 사무국장 유상덕을 안기부 요원들이 채 가버린 것이다. 편집장 고광헌은 마침「교육과 실천」창간호 작업 차 자리에 없어 발톱을 피하고 몇 달간 ‘도바리’쳤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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