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러난 중학교 도덕 교과서의 에스파냐에 대한 오류는 우리 교과서가 지닌 많은 문제점의 편린에 불과하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롯, 다른 나라 교과서의 우리나라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으려 애쓰면서도 막상 우리 교과서는 오랫동안 무오류의 경전처럼 떠받들어 온 것이 교육계의 현실이다. 학생들은 초등 1학년부터 교과서 내용과 한 글자라도 다르면 ×표를 받아야 했다. ‘느림보’ 거북이는 살고 ‘날쌘’ 거북이는 죽는 판이었다. 교사들은 진실의 왜곡과 창의성 억압의 교육현실과 교과서를 들고 고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누적된 집단의 고통은 사회운동의 밑절미가 된다. 83년 상반기 <교육신보>는 교과서 문제에 대한 현장교사들의 목소리를 실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교사 강요배(창문여고, 현 민족미술인협회 회장)는 12년을 배우고도 미술이 ‘알 수 없는 것’이 되는 까닭을 우선 교과서에서 찾았다. 이순권(경기기공, 역사)은 무크『교육현장』의 세계사 교과서 분석 논문에서 “획일적 교육제도에서 보통 ‘지배된 교육내용’을 담고 있는 교과서는 일방적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지만, 사회 제 계층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회현실과 유리됨과 아울러 현실을 호도할 위험성도 내포하게 된다”고 핵심을 짚었다.
교과서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어 가는 지점에서 이른바 ‘교과서 분석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83년 진보적인 기독교 단체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은 ‘교육과 사회’를 연차 연구 주제로 잡았다. 기사연이 3월 4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백낙청 교수는 “교육이념이 이 사회에 오늘날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했다. 같은 좌담회에서 송건호 선생은 ‘남북통일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라고 하였던 바, 기사연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우리 교과서 안의 통일관련 내용을 분석하는 것을 사업으로 채택하게 된다.
이 일은 제안자인 김용복 부원장(현 한일신학대학교 총장)의 책임 아래 이미경(현 국회의원)간사가 맡았다. 이 간사는 유상덕 교사(경기고, 지리)에게 분석팀 조직을 부탁하여, 4월부터 서울Y중등교사회(집회 때마다 노래 <상록수>를 부르고 회지 <상록>을 발간하여 일명 상록회라 불렀다.
이 사건을 경찰과 언론이 상록회 사건이라 한 까닭이다.)
회원 노웅희(지리) 송상헌 이순권(이상 역사)과 지역 소모임에서 활동하던 김한조 송영길(이상 사회) 안승문(도덕), 초등 이상길 손명선 등 9명이 김진균 강만길 리영희 교수에게 연구에 필요한 기본 강의를 듣고 작업을 했다. 그런데 9월 경 당시 운동권에서 돌던 팜플렛 <야학비판>의 유통 경로를 수사하던 경찰이 이들 중 한 명의 집을 수색하다가 사회교과서 내용 비판 노트를 발견하여 본격 수사에 들어간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12월 초 교사들 전원을 연행, 사회주의자로 몰아가며 고문 수사하다가, 정치적으로 활용가치가 더 큰 리영희 강만길 두 교수 이름이 나오자 그 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건을 키워갔다.
수사팀은 87년 박종철 열사를 고문·치사케 한 장본인(박처원, 유정방, 조한경 등)이었다. 기사연 원장 조승혁 목사까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한 검찰(김현치, 이사철)은 기독교계의 활동과 영향력으로 나라 안팎의 비난 여론이 일어나고 전두환이 은밀히 추진하던 남북대화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구속된 세 사람을 43일 만에 석방하였다.
교과서 분석 결과는 자료화되지 못했다. 88년 출간된 『교과서와 이데올로기』(윤구병 저)에 노웅희의 글이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동안 금기사항이던 통일문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진영의 통일투쟁을 촉발했으며, WCC 등이 한국통일문제에 공식적 관심 표명을 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사운동의 측면에서는 일시적인 활동의 위축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이후 각 교과서 분석 작업을 촉진하여, 80년대 후반 교과모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