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임용된‘새내기’선생님들을 환영한다. 어려운 교원임용고시를 통과하여 마침내 발령을 받은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 보기 좋다. 자신감을 갖고 학생들 앞에 선 초임교사의 존재는 학교를 한결 밝게 만든다. 이제 16일이면 첫 월급을 타겠다. 고생하신 부모님, 발령을 받지 못한 친구들, 신세진 분들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지겠다.
그런데 교단의 3월이 새내기 교사들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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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초의 일이다. 서울 강남여중에 3월 2일부터 출근을‘명~ 받은’신임교사 조수기는 첫 월급날을 며칠 앞두고‘3월 월급이 안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서무과장이 “아직 발령이 나지 않았고 배정을 받았을 뿐이다. 발령이 날 때까지는 정식 교사가 아니라서 월급이 나가지 않는다. 다만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시간당 800원 정도로 계산하여 육성회비 계정에서 10여만 원을 지급한다”는 설명을 듣고 놀란다.
선배 교사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짧게는 석 달, 길게는 6개월, 심지어 1년 가까이 봉급 없이 수업을 한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교장의 답변도 똑같았다. 황당했다. (1981년 사대를 나와 임용되면 20호봉으로 117500원. 각종 수당은 본봉 액수와 비슷했으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같은 학교 신임 송상헌과 다른 학교 신임교사들 몇 명을 모아 강남교육구청을 항의 방문하였다. “이렇게 하면 집단행동으로 징계 사유가 된다”는 위협성 발언을 들었다. 조수기는“발령만 안 나서 월급도 못 받는데 무슨 단체행동금지 위반이냐?”고 학무과장에게 따졌다. 마침 그날이 17일 월급날이었다.
소득 없이 돌아오는 길에 그는 노량진 역전다방에서 뭔가 행동을 하기로 하고 잘 아는 신임교사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해 서울시교위 산하에 국립사범대 출신 600여 명이 배정되었다. 거사에는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서울사대 역사과 교사들이 중심에 섰다.
구청별로 이인곤, 이철국, 이우재, 이정헌, 양달섭, 조호원, 송원재(현 서울지부장) 등이 조직작업을 분담했다. 대표는 가장 선배인 송상헌, 교육청에 법률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준비는 조수기가 맡았다. 사흘 후 지역별 대표회의를 소집, 학교마다 연판장을 돌려 교육청에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엄혹한 80년대 최초로 교사들의 집단행동이, 그것도‘새내기’들의 집단행동이 결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회의에서는 포기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아니다, 연판장을 청와대로 보내자, 교육구청에 내자, 강온 의견대립이 있었다. 격론 끝에 시교위에 제출하자는 것으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200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 추진했으나 최종적으로 150명 정도가 연판장에 서명했다. 연판장과 진정서를 제출할 날은 토요일로 정했다. 제출한 다음날 바로 학교에서 예상되는 격돌을 피하고 사회적 파장을 완화하여 신분상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고문조작 사건이 여기저기서 툭툭 터져 나오던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치하의 사회 분위기를 볼 때 상당한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조선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되었다. 이창갑 서울시교육감이 해외 출장 중 급거 귀국하였다. 서명교사는 학교별로 서명 취소를 강요당하고 일부는 교육구청에 불려가서 취소를 강요당했다. 마지막까지 취소를 거부한 교사는 86명이었다.
다행히 이 일로 징계를 받은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유신시대 투쟁 경력이 더 화려한 사람도 이미 발령을 받은 전례가 있었고, 서울시교위의 관행에 법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백 넘치는 신임교사들은‘3월 2일부로 발령’을 요구했다. 인사처리 미비로 발령이 불가하면 근무를 시키지 않아야 하는데 근무를 시켰다는 것은 이미 발령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므로 2일자로 소급 발령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헌법, 민법, 노동법 등의 법규에 저촉되는 위법 행위이라고 따졌다. 하지만 시교위는 신원조회 등 인사절차를 핑계로 3월 17일자로 소급 발령하였고, 재학 중 시위전력자는 다시 인사 면접을 받고 24일자로 소급 발령하였다.
투쟁은 사랑과 한 가지로 대상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다.
투쟁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20대 중반 새내기 교사들의 투쟁은 오랫동안 교사들의 정당한 임금 받을 권리를 훼손해 온 서울시교위의 해묵은 관행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982년부터는 신임교사들의 발령이 3월 2일자로 나게 되었다.
이 투쟁의 주역들은 곧바로 교사들의 지역 소모임과 공개단체에 참가하여 80년대 초반 서울지역 교사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