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월드컵 광풍(狂風) 속에서 월드컵을 말한다

실종된 매체 공적 기능과 자본의 이익을 뒤좇는 언론

6월 13일 밤 ‘아프리카의 복병’ 토고와의 조별 예선 첫 경기가 짜릿한 2-1 역전승으로 끝났다. 내내 끌려가며 스코어조차 0-1로 뒤지던 경기 후반 9분, 박지성 선수가 얻어낸 파울을 이천수 선수가 그림 같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끌어냈다. 그리고 20분 즈음 뒤 안정환 선수는 오른발 중거리 슛으로 역전을 이끌어냈다. 2002년 이탈리아와 가진 16강전의 골든골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 경기를 동시에 중계했던 KBS, MBC, SBS 방송 3사의 순간 시청률은 82.5%까지 치솟았고, 이 순간 전국의 데시벨(dB)은 아마 제트기가 이륙할 때 정도라는 150dB은 훌쩍 넘겼을 것이다. 30여만 명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것을 비롯해 수백만 명의 ‘붉은 악마’들이 광주 전남대, 천안 종합운동장을 거쳐 대구 범어네거리,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까지 전국을 휩쓸었음은 물론이다.


얼치기 축구팬의 월드컵 비판


독일월드컵이 이렇게 막 시작했다. 아니, 사실 이 글이 종이 위에 활자로 드러날 즈음에는 아마도 월드컵이 막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발간되는 6월말, 7월초쯤이면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조별 예선에서 토고, 스위스, 프랑스를 모두 꺾고 16강에 진출했을 수도 있다. 16강, 8강, 나아가 ‘2002년 4강 신화’를 재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안타깝게도 세 경기를 끝내자마자 ‘23인의 태극전사’들은 일찌감치 짐을 싸고, 독일 쾰른 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중앙아시아쯤 상공을 날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원고 작성과 출판 사이 동안 좋은 월드컵 성적이 나와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참고로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정치부에서 월드컵 특별취재팀으로 파견돼 64경기 대부분을 봤다. 안타깝게도 경기장은 아니고, 업무상 TV를 지켜보며 기사를 썼다. 회사 바로 앞인 시청 광장을 붉게 점령한 붉은 악마들의 ‘대~한민국’ 틈바구니에 끼지도 못했고, 오히려 기사 마감시간과 경기 종료 시간이 항상 겹치는 바람에 초긴장 상태에서 경기를 지켜본 기억이 많았다. 다만 오전 중 느긋하게 재방송을 보면서 축구의 단순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매력에 푹 빠졌었다. 그 직전까지 야구가 지상 최고의 스포츠라고 여겼지만 월드컵을 통해 비로소 축구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노조로 소속을 옮기기 직전까지 체육부 축구 기자를 7개월 정도 했다. 취재 업무 외에도 간간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찾아 비록 3등급 팬 수준 정도겠지만 프로축구 K-리그도 직접 봐주는 축구팬의 센스도 잊지 않았다. 나름의 축구 전술적 이해를 갖고 경기를 분석하고 볼 줄 안다는 식으로 맥주잔 앞에 놓고 침 튀겨가며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고 잘난 체 하기도 했다.


효순, 미선이 밀어낸 ‘2002년 대~한민국’


2002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뇌리 바깥으로 밀어버리며 대한민국을 진동시킨 ‘대~한민국’ 함성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주한미군에 의한 또 다른 죽음, 전동록씨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점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회사 게시판에 최소한의 균형잡힌 보도를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혹은 아니었다. 4년이 지난 2006년 6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난 한 달 내내, 아니 몇 달 동안 신문과 방송 등 언론매체의 유일한 관심은 월드컵이었고, 축구였고, 그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뒷얘기, 앞 얘기였다.


토고전 경기가 끝난 다음날인 14일자 신문은 일제히 새까만 통단 제목을 달아 승전보를 날렸다. ‘통단’이란, 신문 지면에 세로 선(단·段)을 그어 나누지 않고, 통째로 씀을 말한다. 중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통 1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할 정도로 잘 안 쓰는 일이다. 일단 각 신문의 통단 제목을 한 번 훑어보자.



‘통쾌한 역전승…황홀한 첫날밤’(조선일보)
‘아드보 코드 6월의 신화 이어가다’(중앙일보)
‘짜릿했다, 황홀한 축제의 밤’(동아일보)
‘보인다 16강…붉은 신화 다시 열린다‘(한겨레)
‘역전의 마술 16강 길 열었다’(경향)
‘신들린 역전승…또 신화가 시작됐다’(서울신문)
‘해냈다! 신화는 계속된다’(한국일보)



자본 이익 좇아 스포츠신문으로 변신한 종합일간지


평소 3~4개 지면을 월드컵 특별 지면으로 써오면서 최소한의 평상심을 유지하던 신문들이 ‘황홀’, ‘신화’ 등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8~11개 면을 아낌없이 할애했다. 마치 스포츠신문을 방불케 했다. 한겨레, 서울신문, 세계일보 등은 방송사의 과도한 편성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고, 특히 한겨레는 ‘월드컵 광풍의 그늘을 잊지 말자’(6월 6일자)는 사설로 당시 많은 이들의 우려에 대한 계언을 잊지 않았지만, 자신들 역시 월드컵이 본격화하자 자본의 상술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길거리 응원의 신흥 명소인 청계천과 광화문 사거리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동아일보는 본사 사옥에 LG텔레콤과 나이키의 초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시청 바로 뒤편에 있는 서울신문은 SK텔레콤의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선일보 건물에는 아무 것도 장치되지 않은 점이 오히려 이례적이다.


신문사 건물에 자본의 월드컵 관련 광고 현수막이 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월드컵이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일제히 흐르고 있으며 신문사는 이틈에 자본의 이익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존의 지면도 부족해, 몸까지 대주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신문의 심각성도 방송사들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월드컵 특별 편성’ 앞에 빛이 바랬다.


TV를 끄던지, 축구를 보던지


아마도 한 번 쯤은 다 경험하셨을 것이다.
모처럼 쉬는 휴일 오후 딱히 할 일은 없어 TV를 켰다. 그런데 이리 저리 채널을 돌려봐도 온통 월드컵 얘기, 축구 얘기만으로 도배됐다. 월드컵 경기 되풀이 중계에, 쇼프로그램도 월드컵 특별 제작, 9시 뉴스의 스포츠 뉴스화 등등. 그나마 한 달에 7,000원에서 1만원 남짓의 돈을 지불하면서 케이블자본 업체(SO)의 시혜를 받는 소비자라면 ‘다행스럽게도’ 철지난 드라마, 해묵은 쇼프로그램, 몇 년 전 영화라도 볼 수 있겠지만, 방송 3사 지상파만을 보고 있는 시청자는 하릴없이 축구를 봐야만 한다.


‘TV를 끄거나, 축구를 보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던 경험은 월드컵을 거친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보다 못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하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는 6월 13일 성명서를 내고 방송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이러한 방송의 행태를 아래처럼 조목조목 비판했다. 다소 길지만 절대적 공감이 가는 내용이기에 부분 인용해본다.



“…(전략)…KBS는 월드컵 64경기를 모두 생중계하겠다고 밝혔고, MBC와 SBS도 모든 경기를 생중계 또는 녹화중계 하겠다는 방침이다. …(중략)…각 방송사의 메인 뉴스프로그램도 넘치는 월드컵 보도로 ‘스포츠 뉴스’와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고, 월드컵 개막일 직전부터는 아예 주요 뉴스 앵커와 상당수의 기자들이 독일에서 리포팅을 하고 있는 수준이다. 또 월드컵 개막 이후 첫 휴일인 10~11일 동안 드라마 몇 편을 제외하고는 월드컵과 무관한 프로그램을 찾을 수가 없었으며, 거의 모든 오락 프로그램은 ‘월드컵 특집’으로 편성돼 ‘붉은 악마’ 옷차림을 한 출연자들이 월드컵을 주제로 잡다한 이야기를 쏟아내거나 게임을 했다. …(중략)…이외에도 교양 프로그램 또한 거의 월드컵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간판 시사프로그램까지도 월드컵 띄우기에 이용당하고 있다.…(중략)…시청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방송할 수 있게 되었는지 분노를 넘어 허탈감까지 느끼게 된다.”



민언련 측은 “월드컵 개최국인 독일은 자국팀 경기였던 개막전도 독일 공영방송인 ZDF에서만 중계했다.”면서 “돈벌이를 위해 월드컵에 올인 하는 우리 지상파 방송사들의 행태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가를 보여준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2006년 6월, 중요 이슈들은 또다시 ‘대~한민국’에 묻히고


결국 신문과 방송에 공통되는 문제는 ‘실종된 매체 공적 기능’과 ‘자본의 이익을 뒤좇는 언론’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6월 월드컵 당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이 지극히 자발적인 시민 에너지의 분출이라는 긍정적 측면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뒤인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시민들의 참여와 축제의 장이었던 시청 앞 광장은 자본의 탐욕과 ‘강요되는 애국’만이 존재하는 거대한 광고의 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사이 광주에서 6·15 공동선언 6주년 맞이 행사로 민족통일대축전이 열렸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광주 정상회의가 열렸고, 한·미 FTA 1차 협상이 진행됐고, 사실상 완패로 끝났다는 협상 내용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고,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는 미국 원정시위를 가졌다. 주한 미국대사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개성공단에 방문한 뒤 “노동자의 임금이 북한 정권으로 흘러들어간다.”는 말을 흘렸고, 로이터통신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가능성’을 급박하게 타전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민족의 문제, 세계 평화의 문제는 정작 한반도 시민 사이에서는 관심 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반면 언론노조는 한·미 FTA저지를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총파업을 추진하고 있고, 소속 조합원들은 최소한의 인식조차 냉랭한 상태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7월 중순으로 예정된 언론노조 총파업은 과연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내며 잘 준비되고 있을까. 단 하루라도 신문이 나오지 않고, 방송이 녹화프로그램을 반복해서 트는 이런 초유의 상황은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일까? 1만 8천 언론노동자들이 총단결해서 한·미 FTA 협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항의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연속 4강 신화를 쓰더라도, 북미의 갈등 대립은 한 치의 진전도 있을 수 없다. 설령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내친 김에 월드컵 우승을 하더라도, 법률, 의료, 방송 등 국민 경제의 파탄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빤한 한·미 FTA 협상은 예정대로 착착 추진될 것이다. 두 눈 부릅뜬 국민들이 평화의 가치, 자존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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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삼 | 전국언론노조 서울신문지부 위원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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