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전면적 위기가 재격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쓰라린 패배” 이후 공세를 더욱 강화하였고 이는 멈출 줄 모르고 진행되고 있다. 또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해체 이후, 미국을 위시한 서유럽 제국주의자들은 고삐 풀린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한 “반동의 시대”임에 분명하다.
현재와 같은 반동의 시대는 노동자계급을 분열, 약화시키며 그 전위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림은 물론, 이미 거쳐 온 과거의 저급한 단계로 정치사상을 퇴보시킨다.1)
이는 지금부터 거의 70년 전 트로츠키의 말이다. 트로츠키에 대한 판단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인식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반동의 시대”에 대한 그의 통찰은 탁월하다. “반동의 시대”는 그러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패배와 자본의 파상적인 공세에 의해 초래되는 상황은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킨다. 노동자계급은 그 분열로 더욱 “약화”되며, 이는 “약화”의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인 노동자계급과 그 전위의 분열로 현상한다. 그 결과 전위는 고립된다.
노동자계급이 분열되고 약화되며 전위가 고립되는 것은 “반동의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한 경우 곧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나 이론에 입각해 잘못된 투쟁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정세판단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전술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또한 오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다. 오류를 전혀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해 반성하고 극복하면 되는 문제이다. 패배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반동의 시대”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반동의 시대”가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분열, 약화시키며 그 전위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 것에 있다.
노동자계급의 힘은 단결에서 비롯된다. 또한 노동자계급운동의 힘은 올바른 “사상․이론”에 근거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한다. 올바른 입장으로 단결된 힘! 이것이 비록 한순간 패배를 하더라도 하루빨리 이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그런데 이른바 “반동의 시대”는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림은 물론, 이미 거쳐 온 과거의 저급한 단계로 정치사상을 퇴보시킨다.” 바로 그것에 이 “반동의 시대”의 특징, 그 ‘반동적 성격’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반동의 시대”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반동의 시대”에 이러한 이데올로기 수준의 하락과 정치사상의 퇴보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 수준의 하락과 정치사상의 퇴보는 반동의 시대에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반동의 시대”를 극복하는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로 반작용하기 때문이다.2)
그런데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돌아볼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반동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다른 시대, 다른 상황이 아닌 지금 우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은 분열․대립하고 있고, 따라서 그만큼 많이 약화되어 있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전위, 혹은 전위를 자처하는 세력들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운동내의 “반동의 시대”의 표현은 그 무엇보다도 사상․이론적 퇴행이다. 현재 노동자계급운동에서 상대적 다수를 이루는 이른바 “우파”는 ‘민족주의적 편향’을 넘어 ‘몰계급적 국가주의’로 경도되고 있으며, 협소한 경제주의와 실리주의와 결합하여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계급협조주의”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3) 이른바 “좌파”의 일부 역시 ‘진보정치’로 표현되는 “사민주의․개량주의”로 자신을 변모시켰으며, 변질되는 “우파”와 한배를 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현재 좌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앞서의 기회주의적 노선에 비판적이며 스스로 ‘맑스주의자’ 혹은 ‘맑스-레닌주의자’임을 주장하는 “좌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소수이며, 이들 역시 사상적․이론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소련을 위시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후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그만큼 노동자계급운동의 사상적․이론적․정치적 혼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4) 이들 중에는 최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이의 철학’ 혹은 ‘차이의 정치학’5)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상적․이론적․정치적 혼란의 최악의 표현이다. 그들은 “반동의 시대”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또 사상․이론적으로 퇴보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가장 반동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창조적(?)인 개념을 발명하여 자신을 꾸미고 있으며, 온갖 알아듣지 못할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려 들지만 그들의 사상적 본질은 무정부주의로 이것은 명백한 사상․이론적 후퇴이다. 그들은 맑스주의(맑스-레닌주의)의 의의를 계승하려고 한다거나 혹은 그 한계와 오류를 넘어서려고 한다지만 그들의 주장은 명백히 맑스주의(맑스-레닌주의)에서의 이탈이다.6)
2
‘차이의 철학’ 혹은 ‘차이의 정치학’을 주장하는 사람(이하 차이주의자)들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며, 따라서 이들에게는 헤겔주의의 핵심, 즉 변증법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맑스주의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7) ‘차이주의자’들은 변증법이 ‘동일성의 철학’이고 그것은 ‘적대의 정치학’의 철학적 기초가 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차이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가 비판되는 것은 당연하다.8) 왜냐하면 맑스주의의 구성부분의 하나는 철학으로 그것에는 ‘유물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이 포함되며, 맑스주의의 원천의 한 요소는 헤겔의 변증법이기 때문이다.9)
‘차이주의자’들에게 이른바 “차이의 철학” 혹은 “차이를 사유하는 방법”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차이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무언가를 형성하는 구성적인 역할을”10)하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생성되는 원동력이며, 그러한 창조를 통해 생산된 것이기도 하”11)고, “차이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여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하고 “자신이 타자들의 관계 속에 들어가며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기회, 또는 가장 단순하게는 다른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12)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맑스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사고방법은 ‘차이주의자’들에게는 최악의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성의 철학” 혹은 “대립이나 적대의 사유”로서 변증법적 사고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제거하거나 배제하고 동일한 것만을 재생산하는 동일자의 메커니즘”이고, “맑스주의 역시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13)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차이주의자’들에게 변증법은 그런 것이고 맑스주의는 그런 것이다.14)
3
철학의 영역에서는 ‘차이의 철학’이 ‘변증법’ 혹은 ‘유물변증법’ 더 나아가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차이주의자’ 이진경씨는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는 앞의 글에서 ‘차이의 철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를 ‘적대의 정치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실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나 노선차이, 또는 어떤 저작에 대한 해석 차이에 대해 통상 맑스주의자들이 갖는 일반적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레닌주의 정통성을 잣대로 하든, 또는 트로츠키나 마오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잣대로 하든, 맑스주의자들은 차이나 이견을 ‘장애물’로 본다. 그것은 투쟁하여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거나 설득을 통해서든 비판이나 ‘숙청’을 통해서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비판이나 비난을 위해 ‘기회주의’나 ‘수정주의’, ‘개량주의’ 등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결국 그 차이는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이라는 계급적 대립 내지 적대로 소급된다.15)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음해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자들이 특수한 경우에 차이나 이견을 장애물로 보기는 하지만 ‘모든’ 차이나 이견을 ‘장애물’로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차이나 이견을 ‘장애물’로 본다.”는 이진경 씨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사실이다. 그것이 ‘장애물’로 작용할 때 바로 그러하다. 어떤 “차이”와 어떤 “이견”이 ‘장애물’로 작용할 때 그것을 장애물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애물’을 ‘장애물’로 보는 것은 정당한 것이며 그렇데 보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그럴 경우 때에 따라 “차이”와 “이견”은 “투쟁하여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거나 설득을 통해서든 비판이나 ‘숙청’을 통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는 이진경 씨 자신이 ‘차이의 철학’ 혹은 ‘차이의 정치학’을 그렇게 반복하여 강변하는 것도 그가 악의적으로 규정한 ‘동일성의 철학’, ‘적대의 정치학’을 장애물로 보는 것이고 그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고 “설득” 혹은 “비판”하여 “숙청”하는 것이다.16)
그는 이렇게 쓴다.
이러한 적대 정치학이 가장 선명하게 작동하는 곳은 아마도 당이나 조직과 관련된 문제에서일 것이다. 당 규약 문제로 발생한 이견이, 서로를 ‘소부르주아 기회주의’라고 비난하는 조직분열로 귀착된 러시아사회민주당의 경우는 아마도 고전적인 사례일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이후 진행된 과정에 따라 그것이 이견과 논쟁이 조직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당연시하게 하는 하나의 고전적 전범이 되었음은 또한 부정할 수 없다.16)
이진경 씨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너무 협소한 교훈을 얻는다.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며 ꡔ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ꡕ를 쓴 레닌이나 「신조」를 비판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동조한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차이의 정치학’을 모르는 자들에 불과하다. 또 “우리가 통일할 수 있기 전에, 통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확고하고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통일은 순수하게 허구가 될 것이며 그것은 지배적인 혼란을 은폐하고 혼란의 근본적인 제거를 방해할 것이다.”17)라며 ‘경제주의자’들과 선을 긋고 당 건설을 위해 투쟁한 ꡔ이스크라ꡕ 그룹은 그에게 있어서는 “적대적 정치”의 실현자들이다. 그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을 “적대의 정치학”의 고전적인 사례로 말하지만 제2차 대회는 26개 조직이 모여서 하나의 당을 사실상 재건해낸 대회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제2차대회가 당 규약 문제만이 문제였고 그 때문에 분열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또한 사실이 아니다. 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령․전술․조직 문제에서 중앙위원회와 중앙기관지 편집부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이견이 있었고 심지어 몇몇 분파의 탈퇴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하나의 깃발아래 모였다. ‘차이의 철학’,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안경을 쓴 그의 눈에는 이후의 과정에서도 분열만이 보인다. 그에게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합을 노력했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4차 대회(통합대회)와 해당파에 맞서 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1910년 중앙위원회'통일'총회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최고 형태로서의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발전과 당과 노동자계급의 긴밀한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진경 씨의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 씨는 민주집중제에 대해서도 독특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런 이유(의견차이, 견해 차이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갖는 것, 이견이 조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인용자)에서 우리는 민주집중제에 대해서, 또 조직 내 분파 금지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적 토론과 비판이 논리적으로 가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든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해야 한다는 전제 밑에서만 가능하고 그 한도 안에서만 허용된다. … 최대치로 확대 해석한다고 해도 비판과 이견은 결국은 하나의 결론 안에서, 그 동일성 안에서만 허용되며, 그 동일성을 보충하는 한에서만 바람직한 것으로 긍정된다. 그러한 한도를 벗어났을 때, 이견은 제거되거나 청소되어야 한다.18)
이러한 주장은 ‘민주집중제’에 대한 이진경 씨의 부정적 사고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는 ‘민주집중제’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집중제가 조직 내 의견차이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어떻든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해야 한다는 전제 밑에서만 가능하고 그 한도 안에서만 허용된다.”라는 그의 주장과 “비판과 이견은 결국은 하나의 결론 안에서, 그 동일성 안에서만 허용되며, 그 동일성을 보충하는 한에서만 바람직한 것으로 긍정된다.”는 그의 주장은 설명이 덧붙여져야 올바른 주장인지 잘못된 주장인지 판단이 가능하다. 즉 그가 말하는 “하나의 결론”이 “행동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면 그의 주장은 옳다. “비판과 이견”은 “행동의 통일”을 전제해야만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반드시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 “하나의 결론”이 “합치해야 한다는 전제”라는 말에 은근히 숨겨진 그 무엇, “이견의 제거” 혹은 “청소”라는 표현에 숨겨진 그 무엇, 즉 “비판의 금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민주집중제’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다. 왜냐하면 ‘민주집중제’의 중요한 원칙의 하나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며, ‘민주집중제’에서 ‘비판의 자유’는 핵심적 내용이고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
이진경 씨는 이어 “견해 차이를 계급모순이나 적대로 환원하는 적대 정치학”20)을 개탄한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노동운동내의 의견 차이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이해에 대한 무지와 왜곡에서 비롯한다.
레닌은 「유럽노동운동에서의 의견 차이」21)라는 글에서 당시 유럽과 미국의 노동운동에서의 전술상의 기본적 의견 차이는 반세기 이상에 걸쳐 나타나는 수정주의(기회주의, 개량주의)와 무정부주의(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탈은 우연이나 개별적 인물, 개별적 집단, 민족적 특수성이나 전통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제도와 발전의 성격에 근본 원인이 있어 그것이 끊임없는 일탈을 재생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술에 관한 의견 차이를 주기적으로 발생시키는 가장 심각한 원인 중의 하나는 노동운동이 성장하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만일 이 운동을 그 어떤 환상적인 이상의 척도로 재지 말고, 그것을 보통 사람들의 실천운동으로 간주한다면, 새롭고 새로운 ‘신병’들의 인입, 근로대중의 새로운 충돌의 인입은 당연히 이론과 전술 분야에서 동요가 생기며, 낡은 오류들이 반복되며, 낡아버린 견해와 낡아버린 수법들에로 일시 복귀하는 것 등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어느 나라의 노동운동도 신병의 훈련에 축적된 정력과 주의와 시간을 다소간 주기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각각의 나라들과 대중 경제의 각각의 부분들에서 동일하지 않다. ...발전이 뒤떨어졌거나 또는 뒤떨어지고 있는 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세계관 특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세계관의 모든 전통들과 결정적으로 인연을 끊지 못한 채 맑스주의의 일부 측면들만을, 새로운 세계관의 개별적 부분들이나 개별적 구호, 요구들만을 습득하고 있는 그러한 노동운동의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
다음으로 의견 차이의 끊임없는 원천으로 되고 있는 것은 모순 속에서, 그리고 모순을 통하여 진행되는 사회발전의 변증법적 성격이다.
…
끝으로 노동운동의 참가자들 속에서 의견 차이를 낳는 극히 중요한 원인으로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통치계급, 특수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전술의 변화이다.
…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원인들은 노동운동 내에서와 프롤레타리아층 내에서 전술에 관한 의견 차이를 일으킨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그와 접촉하고 있는 농민도 포함한 소부르주아층들 사이에는 장벽이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개별적인 인물이나 집단이나 계층이 소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로 이행한다면 이것은 한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에도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22)
분명 레닌은 노동운동 내에서 차이를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를 부르주아적 사고 혹은 소부르주아지의 노동자계급에로의 유입에서 찾는다. 하지만 레닌은 그것이 차이의 모든 원인이라고 환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단지 여러 원인의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레닌은 다른 더 많은 원인을 더 큰 비중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레닌만의 의견이 아니다. 더 나아가 레닌은 차이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제도와 발전의 성격”에서 찾는다.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진경 씨의 주장은 의견 차이의 원인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입장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그것에 대해 비판한 것에 불과한 잘못된 주장인 것이다.23)
4
‘차이주의자’들의 공격의 지점은 맑스주의적 사유방법은 차이를 사유하는 방법이 아니라 “대립이나 적대의 사유”이고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립이나 적대의 사유는 차이를 이미 옳다고 믿는 어떤 것의 ‘적’이나 ‘동지’ 둘 중의 하나로 가른다. 그토록 다양한 것들은 오직 적과 동지 둘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동일성을 갖거나 동일성을 보충하는 한에서 차이는 ‘동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엔 적이거나 ‘적을 위해 기능하는 것’-종종 앞잡이, 스파이 등의 극단적 표현을 얻기도 한다-으로 본다. 전자가 동일화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배제와 타도의 대상이다. 이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제거하거나 배제하고 동일한 것만을 재생산하는 동일자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구현한다. 마찬가지로 차이를 대립이나 모순, 또는 적대로 환원하는 한, 그리고 그러한 적대를 투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한, 맑스주의 역시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24)
유물변증법적 사고는 차이, 대립, 모순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일정한 대상과 과정들을 파악할 때 구별을 위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 특징을 부각시킨다. 차이는 통일적인 대상 속에 존재하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계기들이다. 이때 차이는 그 대상과 과정이 ‘자기동일성’을 얻는 계기들이다. 이러한 차이는 대립으로 나아가는데 대립에서 차이들은 서로 무관하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대상으로 서로 제약하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일정한 대상과 과정들 속의 대립물의 통일을 변증법적 모순이라고 한다. 그리고 운동을 모순이 해결되는 과정, 즉 투쟁의 과정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잘못된 사유 방법인가? 절대 아니다. 세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이러한 유물변증법적 사유 방법이 유일하게 올바른 사유 방식이다.25)
아무튼 이 지점에서도 이진경씨는 문제를 왜곡하고 협소화시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 그는 맑스주의가 모든 모순을 적대로 환원한다고 은근히 암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그 ‘맑스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모든 모순을 적대로 환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적대와 모순을 엄격하게 구별한다.26) 즉, 모순을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으로 나눈다. 그리고 이것을 구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말한 공식(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인용자)을 모든 사물에다 부당하게 틀어 맞출 것이 아니라 각종 모순의 투쟁 상황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모순과 투쟁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지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즉 투쟁의 형태는 모순의 성격이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어떤 모순은 공개적인 적대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모순은 그렇지 않다. 사물의 구체적 발전에 의하여 어떤 모순은 본래 비적대적이던 것이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하며 또 어떤 모순은 본래 적대적이던 것이 비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
레닌은 ‘적대와 모순은 결코 같지 않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전자는 소멸하나 후자는 남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적대는 모순투쟁 형태의 하나일 뿐이고 그 일체의 형태는 아니므로 이 공식을 아무 대나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27)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또 맑스주의가 악의적 의미의 ‘적대의 정치학’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짧은 인용만으로도 충분하다. 맑스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진경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가 새롭게 모시는 사람들의 도움 역시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판한 ‘맑스주의’는 ‘맑스주의’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철학은 틀렸고 그들의 정치학 역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간단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 간단한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 뿐이다.28) ≪노사과연≫
1) 트로츠키,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 ꡔ역사의 대안 트로츠키주의ꡕ, 풀무질, 2003, p. 193.
2) “이러한 정세 하에서 전위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이 퇴행적 흐름에 떠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위는 시류에 맞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불리한 세력관계로 인해 전위가 이미 획득한 정치적 진지를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전위는 최소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진지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진지는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치른 과거의 투쟁경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 방침을 ‘종파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역사의 물결과 함께 새롭고 거대한 파도를 준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앞의 글, p.193.)
3) 채만수, 「‘사회적 교섭주의’, 그리고 노동자와 민족문제-이른바 ‘사회적 교섭’문제를 둘러싼 민주노총의 최근 사태를 보면서-」, ꡔ정세와 노동ꡕ, 창간호, 2005. 5, pp. 9-21.
4) 바만 아자드 저, 채만수 역, ꡔ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ꡕ, 노사과연, 2005. 5.의 역자후기, pp. 183-9.
5) 이러한 주장이 조금 통속적으로 표현하여 "'다르다'와 '틀리다'는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면 나는 그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엉터리" 주장이다. 물론 이 틀린 것에는 자신들이 포함되어있다.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강성윤, 「엉터리는 엉터리라고 말해야 한다」, ꡔ진보평론ꡕ 24호, 2005년 여름, 현장에서 미래를, pp. 310-18.)
6) 이에 대해서는 이성백, 「맑스 사상과 차이의 철학」, ꡔ맑스, 왜 희망인가?ꡕ, 메이데이, 2005, pp. 145-68.을 참조하라.
7) 이들의 정신적 교조인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야”, 또한 이들의 흠모의 대상인 푸코 역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주요한 책임자들은 바로 헤겔과 맑스다”(이성백, 앞의 글, p. 151에서 재인용)
8) “맑스주의가 처음부터 서구의 전통적인 동일자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을 직시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적대성을 지적하고 있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차이의 철학을 주창한 사상가들이 맑스적 사유에 대해 호의와 애정을 갖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이 차이의 사유가 맑스주의 안에서 차단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일차성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동일자를 둘이나 그 이상으로 쪼개고 대립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며, 더구나 적대와 투쟁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문제 설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립이나 모순이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방법임은 이미 들뢰즈가 지적한 바 있지만, 적대의 사유 역시 그 이상으로 차이를 제거하고 배제하는 동일성의 철학을 동일자의 메커니즘을 함축하기 때문이다.”(이진경, 「맑스주의에서 차이와 적대문제」, ꡔ맑스, 왜 희망인가?ꡕ, 메이데이, 2005, p. 98.) ‘차이주의자’의 이진경씨는 변증법을 버림으로서 맑스를 떠나 들뢰즈의 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있다.
9)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론이다. ... 그러나 맑스는 18세기 유물론에 머물지 않고 철학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철학을 독일 고전철학, 특히 헤겔 체계의 성과들에 의해 충실화시켰다. 이 헤겔의 체계는 그것대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들 성과 중 중요한 것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가장 완전하며 심오하고, 일면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형태에서 발전의 학설, 영원히 발전해가는 물질의 반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인간 지식의 상대성에 관한 학설이다.”(강조 원문-인용자) (레닌,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부분」, ꡔ칼 맑스ꡕ, 새날, 1993, pp. 72-3.)
10) 이진경, 앞의 글, p. 109.
11) 앞의 글, p. 110.
12) 앞의 글, p. 112.
13) 앞의 글, pp. 102-3.
14) 여기서 나는 ‘차이주의자’들이 맑스주의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이외에 그들의 알아듣지 못할 주장에 대한 비판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양과 시간”이 내게는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5) 이진경, 앞의 글, p. 98-9.
16) 혹시 이진경 씨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술과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香(향)만 먹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달바(乾達婆)"의 현신이거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솔로몬의 재림일 것이다. 하지만 '차이주의자'들(이진경 씨나 조정환 씨 등)의 속내가 그렇지 않음은 말 그대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16) 이진경, 앞의 글, p. 99.
17) 레닌, 「[이스크라] 편집국의 선언-편집국의 이름으로」, ꡔ레닌저작집 1ꡕ, 전진, p. 135.
18) 앞의 글, p. 100.
19) 이에 대해서는 신양식, 「민주집중제에 대하여-“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대한 레닌의 주장을 중심으로」, ꡔ정세와 노동ꡕ 제2호, 2005. 6, pp. 86-109를 참조하라. 부연하자면, 이진경 씨는 우리가 너무 쉽게 ‘민주집중제’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집중제’가 확립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후발주자로서의 그 혜택을 ‘쉽게’ 누리는 것이다. 훌륭한 선현들이 있어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다. 혀를 찰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다. 또 여기서 의도적이라고 한 것은 그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영민한 그가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다.
20) 이진경, 앞의 글, p. 101. “이견의 원천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에 스며든 다른 계급, 특히 소부르주아 계급의 기회주의로 설명된다. … 요컨대 당의 안과 밖에서 의견 차이는 물론, 당내에서 의견 차이 또한 계급 대립 내지 계급 적대로 환원된다.” 같은 글, pp. 99-100.
21) 이 글은 레닌이 1910년에 안톤 판네쿡의 ꡔ노동운동에서의 전술상 의견 차이ꡕ라는 책의 결론을 소개하며 쓴 글이다. 이 책의 저자 판네쿡은 요즘 ‘평의회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조명되는 바로 그 판네쿡이다.
22) 레닌, 「유럽노동운동에서의 의견 차이」, ꡔ전략과 전술ꡕ, 학민사, pp. 80-84.
23) 또한 “어느 나라의 노동운동도 신병의 훈련에 축적된 정력과 주의와 시간을 다소간 주기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표현은 레닌이 이들을 단순히 “제거”, “청소” 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훈련에 축적된 정력과 주의와 시간을” 쏟아야 할 동지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4) 이진경, 앞의 글, pp. 102-103.
25) 이 지점에서 이진경 씨와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 동시에 이진경 씨는 ‘틀렸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한 증명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26) 레닌은 그의 글에서 “적대와 모순은 결코 똑같지 않다. 사회주의에서 전자는 사라지지만 후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마오는 ꡔ모순론ꡕ에서 “적대란 모순투쟁의 모든 형태가 아니라 모순투쟁의 한 형태”라고 하였다.
27) 마오, ꡔ모순론ꡕ, (ꡔ모택동 선집ꡕ 1.), 범우사, pp. 395-6.
28) 마지막으로 상황은 다르지만, 맑스가 루게에게 했던 말이 이진경씨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여기에 옮긴다.
“신문의 한 난에 숨겨져 있는 오류들의 그물을 찢어발기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상세한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모든 독자들이 그러한 문필적 협잡 행위를 이해할 만한 교양과 시간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 ‘프로이센 인’은 우선 당장은 정치적․사회적 관점의 집필 행위를 중단할 의무, 독일의 상태들에 대한 장괄설을 그만둘 의무,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상태에 관한 양심적인 자기변명에서 시작할 의무를 독자 대중에게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맑스, 「기사 ‘프로인센 왕과 사회개혁. 한 프로이센 인이’(ꡔ전진!ꡕ 제60호)에 대한 비판적 평주들」, ꡔ맑스-엥겔스 저작선집ꡕ제1권, pp.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