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조합 투쟁의 배경
1) 플랜트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다.
플랜트 노동자들은 생산설비의 제조, 보수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통칭한다. 즉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건설하거나 그 공장을 유지 보수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다.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은 용접, 배관, 제관, 기계, 계전, 비계 등의 일을 하며 노동조합의 체계 또한 이렇게 6개의 업종 분회로 구성되어 있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조합은 다른 비정규직 노동조합처럼 활동가들이 직접 현장에 들어가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플랜트 노동자들은 업종 성격상 한 지역에서 물량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서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포항과 여수에 건설된 플랜트 노동조합을 보고 상황이 열악한 울산에서도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처음 4~5명으로 시작된 노동자들의 모임에서 더 많은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하자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초기 노동조합 건설 준비 모임에 300여명의 플랜트 노동자들이 참석한다.
이 열기로 노동조합은 2004년 1월 6일 건설되고, 1월 19일 울산 종합 체육관에서 조합 건설 보고대회를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약 1,000여명의 플랜트 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된다. 플랜트 노동자들은 조별 단위로 작업을 한다는 특성 때문에 초기 노동조합 건설이 용이할 수 있었으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열악해진 노동조건 때문에 불만이 극도로 쌓여 있었고 노동조합과 같은 집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욕구가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2) 열악한 노동조건과 중대재해의 위험
플랜트 노동자들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30년 플랜트 업종에 종사한 노동자들이다. 플랜트 노동자들은 다른 건설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 숙련된 작업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숙련공들이다. 그러나 97년 IMF 이후 임금은 삭감되고 노동조건과 임금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2000년부터 경기는 회복되어갔으나 플랜트 노동자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였다. 각 업체들은 중층적인 다단계 하도급 방식을 취하였고 플랜트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에서 더욱더 허덕이게 되었다.
또한 석유화학 공장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플랜트 노동자들은 항상 화학 물질을 뒤집어 쓰면서 일하는 유해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플랜트 업종 특성상 현장에서 사고는 곧바로 사망으로 이어지는 중대재해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올해 초부터 파업까지 5개월 동안 사망한 플랜트 노동자는 4명이 넘었다.
또한 다단계 하청 구조로 인한 중간 착취로 인하여 플랜트 노동자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점심 식사를 자비로 해결하는가 하면 점심식사가 업체에서 지급된다 하더라도 중간 업체들의 밥값 갈취로 형편없는 도시락을 먹어야만 했다. 비오는 날, 비를 피할 휴게시설은 고사하고 옷을 갈아 입는 탈의실 조차 없어서 길거리에서 옷을 갈아입고 기름투성이로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요구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환경과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3) 사측의 노동조합 탄압과 블랙리스트 운영
2004년 1월 6일 플랜트 노동조합 건설 이후, 4월 22일 삼양제넥스에서는 소수저장탱크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탱크위에서 작업하던 플랜트 노동자 3명이 전원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하였다. 울산 플랜트 노동조합은 삼양제넥스를 대상으로 유족보상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하였고, 노동조합은 첫 투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삼양제넥스 투쟁으로 SK를 비롯한 울산 석유화학 공단의 자본가들은 건설플랜트 노조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울산의 석유화학 공단에서 플랜트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약 4만 명에 달했고 노동조합이 정상적으로 출범하고 조합원이 대폭 늘어날 경우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조합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이에 SK, 삼성정밀화학 등 석유화학공단의 대규모 자본들은 노동조합을 와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하도급 관리자들을 통하여 작업자에게 노동조합 탈퇴서 서명을 강요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노동조합 간부와 활동가들에 대한 현장 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지역, 업종을 중심으로 조직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건설초기 내부 정비기간이 필요하였고 건설초기부터 진행된 대기업의 노조와해 책동에 대하여 방어할 만한 힘이 노동조합에는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현장 플랜트 노동자들에서 한편에서는 노동조합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게 되었다.
4) 2005년 임단협 투쟁의 목표와 요구사항
이런 조건 속에서 2004년 말부터 진행된 임단협 투쟁은 노동조합 건설초기 자본의 공격을 막아내고 노동조합을 힘있게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임단협 체결의 방식은 개별 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석유화학 공단 전체 플랜트 업종을 대상으로 지역 단협을 체결해야 했으며 단협체결을 통하여, 노동조합을 인정받고 그것으로서 조직률을 현격하게 높여내는 것이 2005년 임단협의 최대 목표였다.
핵심 요구사항은 △근로조건 개선(1일 8시간 노동, 유급휴일 및 주․월차보장) △평균임금 하락과 노동강도를 강화하는 재하청(다단계) 금지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산업안전의 보장 △탈의실, 샤워실과 중식 및 휴게시설 확보 △노동조합 인정 등 최소의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는 내용이었다.
노동조합은 2004년 6월 22일부터 핵심 업체 58개를 대상으로 단체 교섭을 요구하였고 2005년 2월 28일까지 16차례의 교섭을 요구하였으나 사측은 교섭에 불응하였다. 결국 울산 플랜트 노동조합은 2005년 3월 27일 임시 총회를 통하여 총파업을 결의하고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2.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조합 파업투쟁의 전개과정
1) 작업저지 투쟁과 공권력의 파업탄압
3월 27일 총파업 선언 후 건설플랜트 조합원들은 아침 5시부터 각 업체별 출근 저지 투쟁에 돌입하였다. 조직인원 4만여 명 중에서 파업참가 대오는 약 1,000여명, 파업으로 인하여 현장에 타격이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파업대오는 각 현장을 순회하면서 파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직접 현장에서 작업자들을 끌어내면서 그 자리에서 조합원으로 가입하거나 작업을 그만두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자본과 공권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4월 1일 출근 투쟁 중인 조합원 30명을 폭력 진압하여 많은 조합원들이 다치고 연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용접분회장이 구속되었다. 조합원들은 곧바로 경찰서에 항의투쟁을 진행하였으나 역시 그 자리에서 용접분회 조직국장이 연행, 구속되었다. 또한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지도부를 비롯한 핵심활동가 6인에 대하여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급기야 4월 8일 시청앞 항의 집회에서는 830명이 넘는 파업 대오 전원을 연행하고 11명을 구속시키는등의 초유의 강경 탄압이 시작되었다.
2) 지도부의 소극적 전술로 조합원이 동요하다.
이러한 검, 경의 초유의 탄압은 파업 지도부를 위축시키는데 충분하였다. 이후 파업지도부는 시청과 노동부를 압박해야 한다며 시청앞 집회와 노동부 항의 방문, 대시민 선전전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배치하였다. 파업이 현장 작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출근 저지 투쟁 및 현장앞 거점 투쟁을 포기하고 투쟁 전술을 전환한 것이다. 또한 지도부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불법적인 행위는 일체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경찰과의 마찰을 최대한 자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경찰들은 소극적 투쟁전술을 구사하는 지도부를 제외하고 현장의 건강한 활동가들을 표적수사하며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사측은 현장에 조합원이 없다는 이유로 교섭 참석에 불응하였다.
지도부의 준법투쟁 선언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행되는 공권력의 탄압, 교섭조차 할 수 없는 상황, 파업이 장기화 됨에 따라 가중되는 생활고 등으로 조합원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가기 시작하였다. 각 소대와 분회별로 투쟁 수위를 높일 것을 지도부에 강력하게 요청하는 건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집회와 투쟁과정에서도 조합원들의 분노의 표출은 높아만 가게 되었다.
3) 수세적 투쟁에서 공세적 투쟁으로의 전환하다.
이러한 현장 조합원들의 위기감과 압박은 투쟁을 좀 더 적극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4월 30일 조합원 3명은 서울 SK건설현장의 크레인 단식 점거 농성에 돌입하였고, 5월 1일 울산에서는 SK 현장에 있는 70M 정유탑 고공 점거 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파업 1달 동안 쌓여 있던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는 폭발하였다. 집중집회에서 각 분회는 자발적으로 공권력과의 투쟁을 준비하였고 5월 6일 SK정문앞 집회에서는 공권력의 물리력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SK공장 정문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자본과 언론은 파업대오를 폭도로 몰아가며 여론공세를 취하였지만 이때부터 비로소 건설플랜트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하이닉스 투쟁과 함께 비정규직 투쟁의 전국적인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후 영남 노동자대회, 전국노동자대회 등의 일정이 배치되게 되고,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건설플랜트 파업 지원을 위한 연대 총파업이 조직된다.
4) 핵심 쟁점을 양보하고 절충적 타협안을 받아들이다.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조합원의 투쟁력이 공권력을 압도함에 따라 정권과 자본측의 압박감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울산 시장의 주제로 ‘다자간 협상’이라는 협상틀이 제시되었고 노동조합은 다자간 협상에 참여하게 된다. 이 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집단교섭’으로 임단협 논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개별교섭’으로 임단협 논의를 진행할 것인가였다. 사측은 집단교섭을 통하여 임단협이 체결될 경우 임단협이 지역적 구속력을 갖고 건설플렌트 노조는 조직화의 열세를 극복하고 위력적인 조합으로 거듭날 것임이 자명하였기에 집단교섭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역시 요구조건이 기본적인 근로기준법 준수였으나 그것이 해결되는 방식은 집단교섭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도부는 5월 27일 전국 노동자대회에서 경찰과의 대규모 충돌에 무리가 있고 이후 파업대오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집단교섭을 양보하고 몇가지 처우개선안에 합의하게 된다.
합의안은 △1일 8시간 노동, 주 44시간 노동 보장과 4대 보험 적용 △불법 다단계 하도급 규제(단 실무협의에서 논의) △조합원 채용시 불이익 금지(단 방안은 실무협의 논의) △조합비 일괄 공제(단 현장출입문제는 실무협의 별도논의) △민주노총 지역본부는 폭력사태에 대한 사과와 플랜트노조는 이후 합법적인 조합활동 할 것을 약속 △이후 합의까지 다자간 협상 틀 유지 등이었다.
이것은 200여개가 넘는 플랜트 사업장 중 2개 사업장이 이 교섭에 참석하였고 이 합의안에 대한 강제력이 전혀 없는 합의였다.
3. 울산 건설플랜트 파업의 의미와 과제
1)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건설플랜트 노동조합은 한 사업장에 묶여 있지 않고, 2-3개월의 단기 노동을 제공하며 생활하는 일용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플랜트 노동자들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점점 더 열악해져 가는 임금과 노동조건 속에서 착취 당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현재 전체 노동자 중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노동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임을 감안해 볼 때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은 현재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상태와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대다수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한 착취와 비인간적인 처우 속에 놓여 있고 인내의 한계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울산에서 2만 명이 넘는 자동차 영세 부품 사업장의 현실만 보더라도 그 처지는 플랜트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화장실 조차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최소한의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 사업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 사업장의 대부분은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다. 플랜트를 비롯하여 이들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민주노조활동의 세례를 전혀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플랜트 파업에서 보여지듯이 이후 이들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확산 발전될 것이다.
2)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일용노동자, 미조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비정규직운동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는 특수 고용직 노동자들, 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건설되고 비정규직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정규직 운동이 사내하청 중심의 비정규직 투쟁에서 일용직 노동자, 대다수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몇 년간 소규모이지만 치열하게 전개된 비정규직 투쟁의 성과란 측면과 함께 이들 영세 노동자들의 처지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노동조합의 체계에 있어서도 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별 노조에서 업종별 노조, 지역별 노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것은 기존 노동자 운동이 기업별 노조에서 의식적으로 기업의 벽을 허물고 산별로 전환하려는 노력과는 별도로 상황이 열악함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자생적인 흐름이다. 이것은 자본과 정권에게도 대단히 위험하고 위력적인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정권과 자본은 초기에서부터 다른 어느 투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탄압을 자행하면서 사업장에 묶여 있지 않는 비정규직의 조직화와 투쟁을 가로막고 있다.
이후 노동자운동의 발전은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어떻게 조직하고 엄호할 것인가가 핵심 관건이며 이미 사내하청 노동자의 조직화 시대를 넘어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3) 투쟁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침체와 계급적 단결력의 저하를 보여주다.
5월 1일부터 공세적인 투쟁이 진행되면서 플랜트의 파업은 단사를 넘어 지역 사안으로, 전국 사안으로 번져 갔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에서도 총연맹 차원에서는 플랜트 파업 지원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울산에서 개최하고, 울산 지역에서는 민주노총 울산지역 본부 주최로 지역 연대 총파업을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현대 자동차에서는 노조 간부 취업 비리가 터지게 되고 민주노총 지역본부장의 비리 연루 의혹이 불거지는 등 지역 총파업을 조직하는데 여러 가지 악재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포기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총파업 당일 5월 27일 민주노총 산하 택시 연맹의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을 뿐 대공장 노동자들의 참여는 매우 저조하였다. 2005년 연대 총파업 조직은 단순히 플랜트 파업의 지지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2001년 효성을 중심으로 한 화섬3사 연대총파업 조직이 현대자동차의 총파업 철회로 불발이 나고 이후 울산지역의 연대 기운은 점차 사그러 들어갔다. 2005년 울산지역 연대 총파업은 이런 선상에서 지역의 연대투쟁 기풍을 높여내고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단결을 성장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였음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연대총파업이 불발로 그쳤다. 2001년의 연대총파업의 불발이 대공장의 기업이기주의와 관성화된 현장조직운동의 결과였다면 2005년 연대총파업의 불발은 관료주의의 부패고리가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민주노총 자체의 위기감의 고조와 현저하게 떨어진 민주노조운동의 현장 장악력과 조직력이 그 원인이다.
앞으로 노동자운동에서는 비인간적 착취에 신음하고 있는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공세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기업별 조합 중심에서 지역적 업종별 중심의 노동조합이 속속 출현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과 분위기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이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대공장에 의존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관성과 관료화의 극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4) 미완의 파업, 투쟁은 계속된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조합은 파업 72일을 마지막으로 현장에 복귀하였다. 오는 6월 1일 조합원 찬반투표로 최종 합의안에 대한 신임을 물을 것이며 아마 별다른 무리가 없는 한 총회는 가결되고 현장에 복귀할 것이다.
그러나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이 백기투항하고 몇가지 처우개선에 합의한 것으로는 이후 노동조합을 지켜내고 성장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합의안 이행이 ‘도덕적 양심’에 따라 이행되어야 한다는 울산 시장의 말처럼 현재 합의안 조차도 제대로 지켜질 지는 미지수이다.
파업 과정에서 43명의 조합원이 구속되었다. 구속된 43명중 임원은 한 명도 없고 상집 간부가 1명 포함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공권력이 얼마만큼 현장을 무참히 짓밟으면서 현장 조직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탄압을 자행했는 지가 단적으로 보여진다.
합의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불법 폭력사태에 대한 사과와 이후 합법적인 조합활동을 할 것에 서명을 했다. 파업과정에서도 불법적인 행위를 안 할 것을 선언하며 조합원 투쟁의 열기를 억누르는 모습이 보여졌다.
이후 건설 플랜트 노동조합은 파업과정에서 보여지는 조합원의 역동성과 전투성을 지도부가 어떻게 끌어내고 받아 안으며 투쟁할 것인가가 승리의 핵심 관건이 될 것이다. ≪노사과연≫
- 덧붙이는 말
-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2호(200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