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를 보기, 상영하기, 쓰기

2012년 가을프로그래머로서 첫 번째 영화제를 마치고 미얀마 양곤으로 출장을 온 것은 그 해 여름 인도 첸나이여성영화제에서 만났던 핀란드 여성 영화인의 미얀마에 여성감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미얀마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을만큼 무지했)는데여성감독이라니 게다가 많다니미얀마라면 불교국가군부독재-민주화 운동아웅산 수치 정도의 투박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고 2007년 승려들의 민주화 운동이른바 샤프란 혁명으로 인해 조금 더 관심이 생긴 정도였기에 미얀마 영화(문화)라는 것 자체가 생경했고특히 여성감독이 많이 활동한다는 것이 선뜻 상상되지 않았다그 때 영화제 아시아 담당 프로그래머로 다음 해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던 나는 나만큼이나 미얀마 영화가 생경했던 영화제 구성원들을 아주 힘겹게 설득한 후 간신히 미얀마로 떠날 수 있었다.

이 즈음은 바야흐로 1962년 군부독재 이후그리고 1988년 항쟁 이후 미얀마에 큰 변화의 흐름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2007년의 항쟁 이후거세진 민주화와 인권존중에 대한 국내외의 염원과 압박으로 2008년 선거를 통한 국회구성을 명시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2010년 저항세력의 구심인 아웅산 수 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고 2012년 NLD(민주주의민족동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미국은 이 시기 미얀마의 민주화를 향한 변화의 힘에 대한 신뢰와 촉구의 의미로 제재를 완화하기도 했다내가 양곤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 일정 첫 행선지로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여정을 계획하고 짐을 챙기는 가운데도 외국인의 입국과 여행에 대한 규정이 계속 바뀌고 있어환전과 관련된 절차나 외국인이 거리에서 사진과 영상촬영을 얼마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 했어야 했다.

출장의 주 목적은 미얀마 양곤필름스쿨(YFS)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YFS는 2005년에 설립된 비영리 독립 기관으로미얀마 최초의 영화제작 전문 교육기관이다입학생은 여남 성비 1:1, 미얀마의 다양한 인종들의 쿼터를 고려하여 선발한다미얀마에 가면 여성 감독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물론미얀마에도 이전에 영화제작과 역사는 있었지만 적어도 독립다큐멘터리 역사의 세대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없었던 감독 성비 동등으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버마계 영국인 린지 메리슨이 설립자이자 총장으로, EU, 핀란드 외무부조지 소로스의 오픈 소사이어티 등의 다양한 출처의 지원으로 운영된다도착한 다음 날 양곤필름스쿨을 방문 했고마침 그 해 졸업 워크숍 작품 중 한편을 시사하는 상영회가 있었다이 날의 시사회는 아직도 나에게 여러 질문을 남기는 인상 깊은 경험이다시사회는 양곤필름스쿨 내부행사가 아니라 EU에서 방문한 게스트들에게 한 해의 성과를 보여주는즉 다음 해 예산 지원의 문제가 걸린 시험대였다그 날 상영한 영화는 초 삐온 감독의 <판소단 스트리트 62번가 No. 62, Pansodan Street>(2013)으로양곤 거리의 한 건물의 외부와 내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다양한 소음과 이야기 소리사람들의 발걸음카메라와 눈을 맞추는 쥐와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무엇인가를 강하게 감지하게 된다.

출처 : 판소단 스트리트 62번가 No. 62, Pansodan Street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영화적 경험이었지만상영 후 반응은 좋지 않았다유럽연합의 대표로 시사회에 참석한 십여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인들이라고 했다당시 양곤필름스쿨의 제작 총괄 디렉터이자 그 자신도 학교의 졸업생인 닌 일 라이(Hnin Ei Hlaing)가 Q&A를 진행했다약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언론인들 중 대표인 듯한 사람이 이 영화에는 왜 군부독재에 대한 것이 나오지 않냐고혹시 검열 때문인지 물었다닌 일 라이 감독은 덤덤하게 검열 때문이기도 하지만무엇보다 각각 찍고 싶은 것을 찍는다고 말했다양곤은 군부독재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지구상에서 예외적인 도시가 되기보다군부독재와 그 저항의 역사는 도시를 축조한 하나의 역사이지만 그러나 동시대의 생활양식과 도시개발 문제글로벌 자본의 문제가 혼용되어있는 미묘함과 복잡함 장소라는 것그리고 영화가 그것을 탁월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것은 유럽연합 기준에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선명한 증거가 되지 못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서로 약간씩 어긋나는 대화 도중영화의 중심이 되는 주소의 건물 거주자들이 무단점유자(squatter)라는 것이 밝혀지자유럽연합의 저널리스트들은 비로소 안심한 것 같았다다시 영화에 대한 질문이 활기를 띠었다영화는 거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점유자들과 그 탄압으로 재조립되어 유럽인들에게 납득 되어졌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잘못을 바로잡기- 2002: 원주민의 민주주의에 접근하기 Righting Wrongs – 2002: Accessing Democracy among the Aboriginals”라는 에세이에서 “(글의제목은 인권은 하나의 권리나 일련의 권리를 갖거나 주장하는 것에 관한 논의일 뿐 아니라 누가 잘못을 바로잡고 어떤 권리를 배포하고 있는지 관한 논의여야 한다고 인권 개념은 (사회진화적 인식을 전달하고 배포하는데일종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사회진화적인 의제로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부여받고 그 과제를 충당함으로써 양곤필름스쿨은 운영되지만동시에 여기서 제작되는 영화들은 그것을 비켜나며 미묘함과 더 복잡한 표면들로 영화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영화에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은 이 영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시아’ 혹은 나의 외부와 내부를 이루는 경계와 지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나는 출장계획서에 군부독재의 문제를 민주화 운동을 서구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것과 다른 젠더적이고 일상적인 관점의 영화들을 발견하겠다며 썼다남성 운동가와 권력 기관 중심의 기존관점과 다른 접근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지만사실 군부독재와 저항이라는 구도의 틀로만 미얀마 영화를 재단하려고 했던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미얀마의 가장 큰 양곤 역시 전 세계에서 예외적일 수 없는 성장하고 있는 도시와 해외자본개발과 같이 현재 역동적으로 진행 중인 도시의 변화와 그간 축적된 도시라는 생각동시대의 힘들과 역동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 했던 것일까나와 외부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을까혹은 무엇을 안다고 믿고 있고무엇을 모른다고 믿고 있었을까.

그로부터 며칠간 양곤에 머물면서 양곤필름스쿨에서 제작된 영화를 보았다상투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스피박 표현으로 더 진화해야 할의제를 내세우는 국제 NGO 납품용 영화오리엔탈리스트적 페티시를 자극하는 국제영화제용 영화도 있었지만 다수의 영화들이 일상의 아주 가까운 곳에 카메라를 대고 바라보는 영화들이었다가족친구이웃집도시의 친숙한 장소들이 영화들은 개별 영화들 내적으로도 미학적이고 주제적인 논리를 갖추고 있지만그간의 미디어와 관련된 역사도 함축한다이전까지 미얀마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촬영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곤필름스쿨의 초기 영화들은 실내와 친밀하고 가까운 인물을 대상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군부의 유화 정책과 함께 학교는 도시의 장소라는 최초의 야외촬영을 기본으로 한 워크숍 주제를 냈고, <판소단 스트리트 62번가>는 그 워크숍 작품 중 한 편이다또한 졸업 워크숍 작품 중 여성이 감독을 맡은 단편이 월등히 많았다입학생을 여남 동수로 받는 학교의 정책이 기본적으로 큰 기여를 한 결과지만다른 이유들도 있었다당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것이 작가 예술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히지 않았고 국제적인 직업을 얻는 기회즉 국제 NGO나 외국 방송국의 해외지부에 취직하는 데 있어서는 사운드나 촬영 등 기술 스탭이 유리했다.

출처 : 판소단 스트리트 62번가 No. 62, Pansodan Street

2013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양곤필름스쿨 출신 여성감독들이 방문했을 때관객들이 가장 많은 관심 역시 학교에서 제작된 영화에 여성감독 작품의 비율이 더 높을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영화를 찍을 때는 협의할 일이 많다. (미얀마 특성 상군관에 허가를 받고 미리 협상해야 하는 일들도 많고일반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찍는 도중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대화할 일도 많다이 모든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은 감독이고 보통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대화를 잘 한다고 대답했었다전체연출을 맡는 감독직이 일반적인 생각처럼 썩 인기있는반드시 권위가 가장 큰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영화제작과 영화문화가 새로 생겨 날 때는 관련된 개념과 가치들 역시 다른 맥락에서 의미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는 느낌이었다당시 미얀마 감독들은 항상 그런 질문들이 많다는 것에 신기해하고 감독이라는 위치가 어떤 특권적 위치가 있을까를 오히려 어리둥절했었는데물론 이후에는 양곤필름스쿨의 영화들도 해외 영화제 출품과 수상이 빈번해지면서 기술자(technician)보다는 국제적인 의미에서감독(filmmaker)’으로서 정체화하는 영화인들이 많아졌을 것이라고 짐작 되지만어떤 말이나 개념지위는 절대적인 것은 없고 맥락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생각의 지평을 넓혀 주었던 것은 미얀마 내에서의 버마인’ 중심주의에 대한 경계였다양곤필름스쿨의 입학에서 소수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은 성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미얀마 내 다양한 인종 구성을 고려하여 일정한 비율로 선발한다보통 국제사회에서 미얀마 저항세력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군부가 정한 국가명인 미얀마를 거부하고 그 이전 명칭인 버마를 더 선호해왔다의외로 미얀마 내 저항세력들에게 널리 퍼진 명칭은 아니었다국제 운동가들과 관계를 맺어 온 미얀마인들이 아니라면 그 맥락들을 잘 알지 못 했고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감독을 초청할 때 미얀마 정부와 한국 정부 등 관과 협상할 일들이 많을테니버마 여성영화라고 칭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때 버마라고 지칭할 때 미얀마의 소수인종들을 누락하는 것이 아니겠냐며 의아해했다. 2015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국가고문이 된 후에도 국가 명칭을 그대로 미얀마로 유지하면서 지금은 국제 액티비즘 내에서도 미얀마/버마를 혼용하고해외 활동가들과 교류가 커진 미얀마 내 활동가들 역시 미얀마/버마를 혼용하는 것이 보통이다어느 것이 더 옳은가어떤 명칭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라기 보다 모든 지칭과 지식에는 맥락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되는 계기였다.

나에게 아시아란 이렇게 나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축조된 지식을 흔드는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맥락적으로 구체적인 체계이다이국적인 것도 아니고 더 다양한 지식도 아니다아시아라는 단위는 인식과 삶의 조건에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를 더욱 격렬하게 드러낸다아시아 여러 지역의 영화를 공부하면서 무엇보다 자극이 되어 왔던 것은 아시아 각 지역의 영화사나 역사문화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보다는선험적으로 주어진 내부로서 한국과 막연한 외부로서 서구라는 나의 기본적 인식 단위 사이에 참조점들이 들어오면서 기존 생각들과 지식들이 해체되고 그 지식들이 형성되어 온 구조와 역사의 과정들이 드러나 보이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2012년 미얀마 양곤 필름에서의 경험과 생각도 그 중요한 일부분이고아시아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상영기획을 아직까지 지속하고 있는 동력이다.

한편으로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관찰과 고민을 던져주었던 미얀마의 영화문화 커뮤니티가 2021년에 완전히 위기에 처했다가장 변화의 힘이 컸던 역사가 한꺼번에 없어져 버린 듯 하고다층적이고 동시적인 역동들이 결국에는 다시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민주화미디어 환경의 변화독립영화계의 형성글로벌 자본주의 등 2010년대 이후로 복합적인 역동들이 미얀마 영화문화와 새로운 세대들을 만들어 냈고그래서 단지 정권을 어떤 세력이 점유했다는 것만으로 다시 질서가 재정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난 일년간 미얀마 새로운 세대들의 격렬한 저항에서 볼 수 있다현재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생활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군부에 저항하고시민군에 참여지원하며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양곤필름스쿨 출신 영화인들을 비롯 모든 문화예술인들모든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말

황미요조는 영화 연구자, 영화상영 기획자이다. 서울, 벵갈루루, 뉴욕, 도쿄에서 영화 이론, 문화 연구, 동아시아학,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아시아영화와 페미니즘 영화사를 강의하고 있고, 다양한 영화 상영을 기획한다. 아시아 여러 지역 영화에서 관찰되는 재현과 관객 현상을 젠더적이고 비인간 중심적인 관점으로 살피고, 모든 불안정한 순간들과 그 영화적 번역에 주목한다. '아시아' 영화사를 공부하고 탐험하면서 생각했던 것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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