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비서의 비밀 안가: 조선공산당 비상대책위가 구성된 곳

낙원동 195번지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은 동대문 방향으로는 종묘가종각 방향으로는 탑골공원이 있다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위락시설이 밀집해있던 장소였다당시 경성 주민이 즐겨 찾는 탑골공원고급 요릿집으로 명성이 높았던 명월관연극과 영화 상영으로 장안의 명소였던 단성사 등이 촘촘히 들어선 곳이다.

탑골공원은 고려 시절 흥복사가 있던 자리다그곳에 세조는 1465년에 원각사라는 절을 중건한다하지만 연산군 시절에 원각사를 폐사하고 장악원이라는 기생방을 설치하였다그 후 중종 때 폐지된 장악원 건물의 목재를 활용하자는 제안에 따라 건물도 철거되었다그 후 공터였던 이곳에 민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1897년 고종 34년에 총 세무사로 근무하던 영국인 존 브라운이 이곳에 공원을 조성할 것을 건의하여 1899년 민가를 철거하고 조성한 서울 최초의 공원이다그 이후 황실 군악대의 음악연주회를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서양인과 정부 관료들에게만 공개되다가 1911년 4월부터 주말에 한해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여 1913년 7월부터 매일 일반에게 개방되었다이후 탑골공원은 1919년 3.1운동의 진원지로 그 상징성이 일제에 위협이 되어 매년 3월 1일을 전후하여 일경을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펼치곤 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하급관료였던 안순환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일본침탈이 본격화되며 번창하였던 일본요리옥을 본떠서 1903년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의 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명월루라는 이름의 조선 요리옥을 설립하였다당시 광화문 사거리는 지금과 같이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직선으로 이어진 도로가 아니었다광화문 사거리에는 황토마루라 불리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던 곳으로 지금과 달리 삼거리에 가까웠다. 1912년 경성시구개정사업에 따라 지금과 같은 공간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명월관은 한옥이던 건물을 3층 양옥건물로 올릴 만큼 번창하였다안순환은 명월관 운영과 일진회의 인맥으로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대한제국의 연회와 음식을 주관하는 부서인 전서관의 장을 맡았다안순환은 1918년 인사동의 이완용의 집을 사서 태화관이라는 이름의 명월관 분점을 열만큼 큰 부를 쌓았다. 1919년 안순환은 명월관을 민봉호라는 사업가에게 팔았고 명월관이 화재로 전소된 후 민봉호는 김성수에게 터를 팔아 지금의 동아일보 사옥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그 이후 궁중음식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명성을 높인 명월관의 이름과 기구를 이종구가 민봉호에게 3만원에 사서 돈의동 145번지에 (구 피카디리 극장터대지 600평에 건평 1200평의 2층 양옥을 지어 영업할 만큼 대표적인 요리집이 되었다.

단성사는 1907년 연예단성사로 문을 연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극장이었다. 1919년 당시 조선인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의리적 구토 개봉일인 10월 27일은 지금도 한국영화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단성사는 단순히 영화나 연극을 상영한 곳이 아니라 제작배급상영 자체적으로 했던 극장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이렇듯 공원화려한 요릿집과 극장이 밀집해있는 가운데에 낙원동 195번지가 있었다.

좌측 지도는 1936년 경성부대관우측 지도는 1936년 제작된 경성 지도의 일부이다지도 안의 붉은색 원이 낙원동 195번지이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김재봉의 안가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다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오미리였고 서울에서 머물던 집은 가회동 67번지였다그러한 그가 왜 유흥업소가 즐비한 낙원동에 머물고 있었을까그 이유는 1925년 11월 22일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벌어진 폭행사건때문이었다신의주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방 세포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공개조직으로 신만청년회에 속해있었다결혼식 피로연을 하던 청년회원들은 옆방의 일제 형사지방유지 일행과 시비가 붙었고 그들을 집단 폭행하였다단순한 폭행 사건으로 보였던 이 사건은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비밀문건이 적발되면서 중대한 조직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고려공산청년회는 국제공청으로 보내는 보고서를 신의주를 통해 전달하였는데 폭행 사건을 조사하던 일경이 신만청년회 회원의 집을 수색하면서 비밀문건을 찾아낸 것이었다.

사건의 중대함을 인식한 일제경찰은 신속하게 수사망을 확대하였고 사건 발생 1주일인 11월 29일 밤 박헌영 주세죽 부부에 대한 체포를 시작으로, 30일 새벽 7시에는 주종건유진희임원근권오설이 붙잡혔다아직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제 경찰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던 주종건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인 권오설을 당일 석방하였다이들 둘이 석방됨으로 사건의 전파가 가능하였지만당과 공청의 주요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3일 뒤인 12월 3일에는 김재봉의 가회동 거처에도 가택수색이 들이닥쳤다.

책임비서인 김재봉은 신속히 지하로 잠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책임비서인 그에게는 긴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다무엇보다도 파괴되는 조직을 복구해야 했다김재봉은 이미 1921년에 상해임시정부 선전과 자금을 모으다 적발이 되어 6개월의 징역을 복역하였고 1924년 10월에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924년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에서 파견된 정재달이재복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그뿐만이 아니라 공개단체 활동을 통해 김재봉의 얼굴은 이미 일제경찰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그렇기에 더욱 책임비서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안전하게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다.

아마도 김재봉은 일제경찰의 허를 찌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그가 몸을 숨기기로 결정한 곳은 도심의 한복판그것도 유흥지구이기에 유동인구가 많아서 낯선 이가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곳이면서 조직과 연루된 사람이 아닌 의외의 인물의 집을 선택한 것이다낙원동 195번지에 몸을 의탁한 곳은 김미산의 집이었다김미산은 명월관에서 일하는 여급이었다. 20년대에는 사상기생이라 하여 여성 종업원 중 사회주의에 공명하며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김미산도 그런 유형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사회주의자 대오에도 정칠성이라는 이름 높은 여성 사회주의자도 기생 출신이었다김미산은 훗날 김재봉이 체포된 이후에도 옥바라지하는데 김재봉은 감옥에서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 김미산이 사용한 비용을 갚아 달라고 요청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후계조직을 구축하라

김재봉은 긴급한 두 가지 사안을 처리하여야 했다우선당의 중앙집행위원회를 이어받을 2선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코민테른에 보고해야 하는 당 사업이었다당의 긴급한 현안은 당 공동창립의 분파였던 북풍파 처리와 관련한 사안이었다. 북풍파는 당 창립 이후에도 당의 비밀을 지키지 않았으며 자파의 조직원을 당내에 공개하여 끌어들이게 하지도 않았다비밀결사 조직에 요구되는 강철같은 조직의 규율이 이완되고 있었다혁명의 참모부가 되어야 할 당을 연합조직처럼 느슨하게 운영하려고 하였다김재봉은 이들을 제명처리 하기로 하였다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경찰의 검거에 맞서 도피 중인 동지들을 위한 자금을 요청하는 일이었다이 두 가지 업무는 책임비서인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그는 안가에서 두 업무를 진행하였다.

우선 검거를 면한 남아있는 중앙집행위원인 김찬주종건을 12월 10일 안가로 소집하여 의논하였다차기 집행부로 선정이 된 이들은 진주의 강달영과 안동의 이준태가 우선 선정되었다이들 모두에게 긴급히 전보를 보냈다. 15일경 두 사람을 안가에 만난 김재봉은 당이 처한 어려움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사전에 중책을 맡을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김재봉은 추가로 인선된 홍남표김철수이봉수를 말해주며 대의를 앞세운 간곡한 설득 끝에 강달영과 이준태는 2선 지도부를 승낙한다.

김재봉 등의 지도부가 강달영과 이준태를 선정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우선 이준태와는 동향이며, 2년제인 경성공업전습소를 1년 차이로 같이 다닌 동문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김재봉의 첫 번째 구속사건인 1921년 임시정부 선전사업에도 함께 참여하였으며 김재봉이 1921년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여하러 소련으로 갔을 때 이준태는 국내에서 무산자동맹에 가입하였다둘은 오래된 벗이었고 동지였다강달영은 1919년 진주지역 3.1운동의 지역 조직가였으며 그 참가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 1년 6월로 감형을 받았으며 지역 내 소작인 운동의 핵심이었고 조선노농총동맹에 진주대표로써 참여한다김재봉과는 1923년 고려총국 진주총국 세포단체의 책임자를 맡은 이후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더구나 훗날 일제경찰에게 체포된 김재봉은 강달영을 선임한 이유를 묻는 진술에서 강달영은 외부에 노출이 되어있지 않고조직간 통일에 적합한 인물이고의지가 강하고 실력 있는 혁명가라는 진술을 한다.

이제 김재봉은 당의 책임비서로서 급한 업무를 처리하였다. 2선 지도부에게 업무인계를 하면서 해외로 망명의 기회를 엿보던 그는 그만 12월 19일에 체포되고 만다.

1925년 11월과 12월에 체포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원은 모두 22명이었다조직의 중요비밀문건이 발각된 것에 비하면 적은 수의 인원이 검거되었다그것은 무엇보다 검거된 당원들의 결사적인 수사투쟁 덕분이었다김재봉 박헌영등 양 조직의 책임비서가 모두 검거되어 살인적인 고문수사 앞에서도 밝혀진 명백한 사실 외에는 모두 부인과 일관성있는 진술로 일경을 상대하였고 당과 공청은 그들의 헌신적 진술 투쟁 덕에 강달영 책임비서 체제가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말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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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종로3가 낙원동 김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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