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악과 수사 외압을 아우르는 윤석열식 퇴행


출처: Unsplash, Annie Spratt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현대 정치 동학의 핵심은 상대를 반대하는 것으로 ‘우리 편’을 조직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전임인 문재인 정권을 반대하면서 스스로를 조직했다. 집권 논리가 오직 이것뿐이었다. 윤석열 정권이 하는 일을 되짚어보기 위해 문재인 정권이 무엇이었는지를 끝없이 되짚어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권은 결국 뭐였나? 전형적인 주류(mainstream) 지향 정권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소득주도성장’으로 이름 붙인 일련의 경제 정책을 두고 보수세력은 ‘실험’이니 뭐니 하는 딱지를 붙여 공격했지만, 문재인 정권이 실제 추진한 일을 보면 신자유주의 담론이 금융위기와 함께 붕괴한 이후 시점에 국제 관료-엘리트 그룹이 하려고 한 일과 큰 방향에서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맥락 안에서도 그들이 하려던 바, 즉 최신 유행(?)을 제대로 뒤쫓아 가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을 이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에게 있어 문재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전체주의-권위주의 정권이다. 이를 근거로 윤석열 정권은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로 칭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결합으로 수렴한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은 다시 ‘공산전체주의’가 되고. 이 공산전체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반대하기 위해 이승만-박정희 코드가 동원된다. 이게 정치 논리에서 윤석열식 퇴행이 이뤄지는 메커니즘의 핵심이다.

윤석열 정권은 이런 방식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깃발 자체에 대해선 별로 진심이 아니지만, ‘퇴행’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다.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을 방통위원장으로 보낸 걸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문회 자리에서 천기를 누설한 것은 국민의힘의 박정훈 의원이다. TV조선 출신인 박정훈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이 어차피 탄핵을 할 거면서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검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에게 탄핵에도 불구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 등을 차질 없이 해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진숙 후보자의 답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박정훈 의원은 그 답을 듣고 흡족해했는데, 이건 결국 도덕성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만 있으면 방통위원장은 누가 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드러낸 거다.

야당이 이상인 방통위 부위원장에 대한 탄핵을 발의하자 ‘빛의 속도’로 사퇴해 버린 것도 마찬가지다. 방통위법에는 방통위원장에 대한 탄핵만 규정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상인 부위원장이 위원장 직무대행을 하고 있으므로 탄핵 대상이 된다는 거였다. 이에 대한 국민의힘의 반론은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탄핵 요건으로 할 수는 없다는 거다. 직무대행이 탄핵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는 그러면 법적으로 다퉈봐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최근 상황을 ‘바보들의 행진’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런 판단이라도 해놔야 후대의 사람들이 똑같은 바보스러운 행진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정권이 택한 것은 그냥 문제가 된 인사가 자진사퇴를 하는 거였다. 직무 정지 상태에서 법적 결론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냥 자진사퇴를 시키고 후임 상임위원을 임명해 부위원장으로 호선하는 게 더 빠르다고 본 거다. 이 결과 방통위는 ‘0인 체제’가 됐는데, 방통위원장 후보자를 임명 강행하고 방통위 상임위원을 지명하면 순식간에 ‘2인 체제’가 복구된다. 그러면 재빨리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를 끝마칠 수 있다는 게 윤석열 정권의 계산이다.

이런 식의, 제도를 자의적으로 운용하는 꼼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제도의 빈틈을 찾아내 ‘이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법조인 세계의 방식이다. 악덕한 법조인이나 할법한 방식을 동원해 이 정권이 관철하고자 하는 것은 방송장악이다. 그러한 점에서 권위주의적이라는 평가는 전 정권이 아니라 현 정권이 감당해야 할 것일 수밖에 없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대형 비리의 조짐마저 보인다는 것이다. 채 상병 사건에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관계자인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가 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종호 녹취록’에 언급된 경찰이 또 다른 수사 외압 사건에 ‘용산’과 함께 언급된 사실을 확인하면 놀라움은 2배가 된다. 도대체 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놀라울 뿐이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런 얘기다. 영등포경찰서가 마약 밀반입 수사를 하던 과정에 세관이 연루됐다는 단서를 발견했다. 수사팀은 이 내용을 포함한 언론 브리핑에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서울경찰청이 세관 관련 사실을 브리핑에서 빼거나 아예 브리핑을 취소할 것을 종용하는 등 사실상 수사 방해 행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용산에서 이 사건을 알고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가 전달됐다. 이때 수사팀에 외압성 전화를 건 인물 중 한 명은 ‘이종호 녹취록’에 등장하는 조모 경무관이다. 녹취록에서 이종호 전 대표는 조모 경무관의 승진을 기도한 것으로 돼 있다.

수사팀은 해체되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브리핑을 강행했다. 이후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지자 경찰청장은 조모 경무관에 대한 징계를 추진했다. 그러나 인사혁신처에서 진행된 징계 논의는 아주 이례적으로 흐지부지되었고, 경찰청장은 조모 경무관에 대해 직권으로 경고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외압에도 불구 수사를 밀어붙였던 영등포경찰서 형사과장은 강서경찰서 화곡지구대장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이 인물에게 외압을 행사하는 데 역할을 했던 이들은 징계를 당할 뻔한 조모 경무관을 제외하고는 다들 영전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사건의 흐름을 보면 권력이 개입했을 걸로 추정되는 최소 3차례의 중요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관세청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시점이다. 당시 서울청 등은 브리핑 예정일 이틀 후에 국정감사가 예정돼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야당 좋은 일 시켜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의 논리를 댔다고 한다. 둘째는 조모 경무관이 징계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경찰청장이 직접 징계 필요성을 언급한 사안이 흐지부지되는 건 최상위 레벨의 권력이 움직인 결과가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셋째는 영등포경찰서 형사과장이 좌천된 대목이다. 수사를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인사상 불이익을 주었겠는가?

주가조작 관련 사건으로 유죄를 받은 인물이 마약 수사를 둘러싼 사건에도 등장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더군다나 이 인물은 대통령의 배우자와 긴밀한 관계로 엮여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과거 정권이었다면 여야 합의로 특검을 추진하는 것에 무리가 없었을 사안이다. 특검이 아니더라도, 수사기관이 권력의 개입이 어려운 특수한 수사팀을 꾸리는 등 정권 차원의 뭔가 대응이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검찰은 겨우 대통령 배우자 조사 한 번 하는 것도 제대로 소화를 못 해 사분오열이 되고 있고 무언가 가닥을 잡아야 할 용산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이제 겨우 제2부속실 설치 같은 얘기나 꺼내 들고 있다.

오로지 상대를 반대하기 위한 논리로만 일관하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집권한 세력의 마지막은 불행할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그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자신의 불행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정권의 몰락이 만들어 낼 미래 역시 또다시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배트맨을 상대하겠다며 조커가 등장하고, 조커를 잡아야 한다며 고담시가 배트맨에 매달리는 형국이 다시 한번 되풀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되풀이되는 정치적 쳇바퀴 자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담론이 적어도 진보 내에서는 나름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왕년의 진보 일부까지 쳇바퀴 안으로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바보들의 행진’을 함께 하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정확히는 지난 대선 때부터 그랬다. 창피한 일이다. 상대를 반대하는 것으로 한쪽 편을 동원하는 정치적 구도에 스스로 동원되는 것으로는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오늘의 이 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증명될 것이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아니, 이 정권 끝나고도 계속 말이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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